‘여성서사’라는 카테고리가 최근에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지난 몇 년간의 경향성을 볼 때 여성서사는 창작자들이 가장 뜨거운 관심을 쏟는 주제 중 하나다. 예술계에서 여성서사를 적극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ㅇㅇ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부터 연원을 찾아야 한다. 문학, 미술, 사진, 만화 등 개인 창작 장르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예술계 성폭력 고발은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고은, 이윤택, 김기덕 등 거장 예술가들이 가해자로 호명되며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고발은 가해자를 단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계에 안전한 창작 환경 만들기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고 현실의 성차별과 성폭력을 새삼 의식하게 된 창작자들은 작품 내부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성역할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가부장적 질서에 문제제기하며,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가시화하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인 이성미 시인은 이를 두고 주제와 감각이 달라졌다고 평한 바 있다. 미투 운동 이전에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여성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여성서사’는 꾸준히 존재해 왔지만 이를 채우는 내용과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를 들어라
올해 남산소리극축제 무대를 여성서사극만으로 채운 이 과감한 기획은 미투 운동 이후 이어진 이러한 예술계 변화의 흐름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편의 여성서사극을 아우르는 축제 타이틀은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로 붙여졌는데, 다종다양한 여성서사 중에서 굳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축제 무대를 꾸민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들은 모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불의에 맞서 싸운 여자들이다.
5월 8일부터 18일까지 크라운해태홀에서 진행된 메인 공연은 이화SORI의 <솔의 기억>, 창작하는 타루의 <정수정전>, 사부작당의 <청비와 쓰담 특공대>, 방탄철가방의 <배달의 신이 된 여자 - 배달순>의 네 편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솔의 기억>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나주 유지인 박대인의 딸 기옥과 그의 집안 노비의 딸 솔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기옥의 증손녀 혜진에 이르는 긴 시간대를 다룬다(공연 리플릿에는 솔을 박대인 집의 노비로 소개하고 있으나 1894년 신분제 폐지로 공식적으로는 노비가 사라진 만큼 소작인이 보다 가까운 표현으로 보인다).
자매처럼 자란 기옥과 솔은 나란히 광주여고보(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해 학생들의 독서모임인 ‘소녀회’에 가입한다. ‘소녀회’는 표면상으로는 독서모임이었지만 그 결성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토론회를 열었고 광주고보의 남학생 독서회와 공동전선을 구축해 수업 거부, 동맹휴업, 백지동맹, 모금활동 등을 벌였다. 1929년 9월에는 광주학생소비조합을 설립해 금남로 3가에 2층 집을 얻어 1층은 빵집, 2층은 문방구로 운영하며 비밀모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