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름

리뷰 | 서울남산국악당 [남산소리극축제] -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

윤단우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발행일2024.06.20

살아 있는 내가 그 증거다

서울남산국악당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 한옥공연 우리소리 '모색' <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 5월 16일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라는 타이틀로 올려진 올해 남산소리극축제는 네 편의 메인 공연 외에 야외무대에서도 두 편의 공연을 선보이며 축제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꾸몄다. ‘싸우는 여자들’이라는 공통의 대전제 아래 메인 공연에서는 그 여자들이 어떤 싸움을 해내었는가 하는 스토리텔링에 좀 더 무게중심을 실은 작품들을 모아 올렸다면 야외무대에서는 ‘싸우는 여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인물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공연을 올렸다.
이에 따라 무대로 불려나온 여자들은 한국 역사에서 또 한국 여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두 명의 여성 운동가다. 3.1 독립운동의 주역 중 한 명인 유관순 열사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정부가 동원한 군 위안부의 실상을 고발한 김학순 열사가 그 주인공들이다.
2024 남산소리극축제 메인 포스터 <여설뎐>
5월 16일 서울남산국악당 야외마당에서 올려진 우리소리 모색의 <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는 제목처럼 김학순 열사의 생애를 다룬다. 이 작품은 지난 202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를 앞두고 서울시 성평등기금사업에 선정된 사단법인 여성문화네트워크의 제안으로 모색의 대표인 소리꾼 정세연이 작창과 각색, 소리를 맡아 제작한 것이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녹화 공연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번 공연이 관객들과 만나는 실질적인 초연 무대나 다름없다.

작품의 주인공인 김학순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한국인 최초로 공개 증언하며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1990년 일본이 군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한 데 분노해 공개 증언에 나섰고, 그의 증언에 용기를 얻은 다른 피해 생존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김학순은 일본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며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997년 평생 모은 재산 2천여만 원을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부한 뒤 일본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소리 '모색'<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5월16일/야외마당)
우리소리 '모색'<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5월16일/야외마당)
우리소리 '모색'<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5월16일/야외마당)
세상이 김학순이란 운동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의 공개 증언이 있던 91년이지만 정세연은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이전에 자연인 김학순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주목하며 그가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의 어린 시절 묘사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다. 공연은 만주 지린성에서 만삭인 김학순의 어머니가 출산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학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을 몹시 애지중지하며 기르지만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김학순은 어머니와 둘이 남겨진다.
김학순이 교회를 다니며 찬송가를 배우는 장면이나 어머니의 재혼 후 권번으로 보내져 기생수업을 받는 장면은 무거운 작품에서 그나마 마음을 내려놓고 웃을 수 있는 짧은 순간들이다. 정세연은 실수 연발인 코러스 출연자들과 연주자들을 마뜩찮게 바라보며 이래서야 기생이 될 수 있겠냐며 야단을 치고 관객들은 웃음으로 답한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뿐,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마친 김학순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기생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다가 일본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된다. 위안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정세연의 소리에서 김학순의 위안부 생활과 탈출,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다. 정세연은 위안부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위안소에서 탈출하기까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한국으로 돌아와 어디서 어떻게 정착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이 아플 때에도 생리 중에도 쉬지 못하고 하루에도 일고여덟 명씩 일본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잔인한 현실이나 위안부의 존재를 당연시하며 온갖 착취 행위를 요구하는 일본 군인들의 만행 등은 짧은 언급만으로도 분노를 일으키며, 탈출 기회를 엿보던 중에 만난 조선인 남성조차 위안부 여성을 강간했다는 진술에 이르면 분노의 대상은 가부장제를 구성하는 남성 권력 전체로 확장된다.
정세연은 그럼에도 탈출이라는 절대 과제 앞에 조선인 남성의 강간을 고발하기보다 그의 도움으로 탈출을 도모해야 했던 김학순의 현실을 담담한 어조로 되짚는데, 전통 판소리의 눈대목이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이나 극한의 감정을 표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정세연의 <김학순가>는 작중에서 가장 감정의 진폭이 큰 장면에서 오히려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눌러 담은 고통을 읽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는 서사가 비어 있다고 비판하기보다는 그 서사를 비워낸 의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일이다.
우리소리 '모색'<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5월16일/야외마당)
우리소리 '모색'<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5월16일/야외마당)
우리소리 '모색'<별에서 온 편지 - 김학순歌>(5월16일/야외마당)
대중문화에서 위안부라는 소재는 멀게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부터 영화 <귀향>을 거쳐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야기시켰다.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 피해자가 강간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조선 군인과의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의 주요 요소로 다루었고 <귀향>은 이성애 로맨스 요소를 탈각한 반면 피해자의 신체성과 강간을 시각적 볼거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귀향> 이후 만들어진 <눈길>이나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 등에서는 폭력의 재현 방식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성찰은 물론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폭력을 당하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피해자가 아니라 폭력을 스스로 증언할 수 있게 된 생존자로 재조명하는 시각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정세연은 김학순이 위안소를 탈출해 한국에 돌아온 뒤 전쟁을 겪으며 남편과 자식들을 먼저 보낸 고통을 짧게 언급하고 90년 6월 일본정부가 ‘일본군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발표하던 순간으로 곧장 이동한다. 뉴스를 보던 김학순은 “내가 위안부다! 내 몸뚱이가 증거다!”라고 외치며 공개 증언을 결심한다. 정세연은 김학순의 의분에 찬 목소리에 이어 그와 함께 증언한 240명의 피해 생존자를 호명하기 시작한다. 강일출, 김군자, 김순덕, 김복동, 길원옥, 심달연, 최선순, 황금주, 이옥선, 이용수……. 이름들이 불릴 때마다 코러스 출연자들이 ‘왔소’ ‘여깄소’하며 화답한다.
호명이 끝나고 나서 공연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발화와 이 통한의 역사가 우리 딸들에게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로 이어지며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김학순의 이름을 붙여 그의 생애와 발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연은 후반부 강일출부터 이용수에 이르는 운동가들의 이름들을 부르는 것으로 완성되기에 호명 이후의 장면들은 사실 에필로그나 다름없다. 정세연은 공연의 주요 대목마다 소리와 함께 의자를 사용한 퍼포먼스를 펼치는데, 공연 말미에서 그가 의자에 앉아 소녀상이 되는 모습은 작품의 의미가 시각적으로 압축된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공연 속 에필로그가 끝나면 공연 밖 진짜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모색 측에서는 노란 나비 모양의 카드를 준비해 관객들로부터 위안부 활동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받았고, 정세연은 공연을 마친 후 카드를 모아 관객들 앞에서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 공연을 올릴 데가 많지 않은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며 울먹거리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이 공연의 노래가 널리 울려퍼질 수 있는 무대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 이는 정세연 혼자만이 아니라 위안부 운동가들의 증언을 들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윤단우
작가. 칼럼니스트. 인터뷰어. 공연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에 공연 리뷰를 기고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공연 큐레이션 메일링 <위클리 허시어터>를 매주 발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은 여자다』,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 『여성, 신체, 공간, 폭력』 등이 있다.
사진제공 서울남산국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