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을

리뷰│서울돈화문국악당 [박세연-신쾌동의 伽倻琴]

송지원
발행일2023.09.18

가야금산조의
또 다른 길이 생긴 순간

 
지난날의 명인들이 연주하던 음악에는 지금 이 시대까지 전승의 어려움 없이 이어져 내려온 음악도 있지만, 전승이 끊어지고 오로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버린 음악도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악보, 혹은 음원이 남아 있어 다시 소리로 재현해 볼 수 있는 경우일 것이다. 악보가 남아 있다면 해석해서 연주할 수 있고, 음원으로 남아 있다면, 악보로 채보하고 다시 연주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9월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는 음원으로만 남아 있던 음악에 생명을 부여해서 다시 살려낸 음악회가 열렸다. ‘2023 서울돈화문국악당 공동기획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가야금 연주가 박세연이 올린 <신쾌동의 가야금>이란 무대였다.
신쾌동(1910~1977)
신쾌동의 거문고 연주

어린 시절의 신쾌동을 무대로 꺼내다

신쾌동(1910~1977)은 지난날 거문고산조의 명인이었지만 거문고에 앞서 가야금을 먼저 공부했고, 가야금 실력 또한 거문고만큼 빼어났던 인물이다. 그가 연주한 가야금 산조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신쾌동의 가야금 산조> 음반을 들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럼에도 <신쾌동의 가야금 산조>는 오로지 음반 속에만 남아 있어서 여타 연주자에 의한 연주는 들을 수가 없었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은 <신쾌동의 가야금산조>를 음반이 아닌, 실제 ‘지금 여기’의 연주자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으로 되살려냈으니, 이번 음악회는 음악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박세연은 이번 무대에서 신쾌동의 풍류 중에 ‘타령’, 신쾌동 가야금 산조, 새타령의 세 곡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 무대는 이태백의 장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윤중강의 해설이 함께 했다.
 
이번 무대는 박세연이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레코드 가게에서 구입한 ‘신쾌동 가야금 산조’ 카세트테이프(1984년 출시, 아세아음반사)가 인연이 되어 오르게 됐다. 거기에는 신쾌동이 가야금을 연주하고 김재선의 장구 장단이 함께 한 가야금 산조가 녹음되어 있었다.
박세연이 어린 시절 소장한 <신쾌동 가야금 산조>
박세연은 그 곡을 듣는 순간부터 음악에 매료되었다. 테이프가 닳을 정도로 듣고 또 들으면서 언젠가 나도 연주해 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이 마침내 이번 무대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박세연은 우선 레코드에 담긴 음악을 틀어놓고 채보해서 악보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1년 반 가량을 음악에 몰입해 연습했고 드디어 이번에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오직 레코드 하나에 존재하는 음악을 악보로 옮기고, 그것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박세연은 매우 자연스럽게 옛 명인의 음악을 소화했다.
 

세상의 빛을 본 신쾌동의 가야금산조

이번 연주회의 첫 곡은 신쾌동의 <풍류> 중 ‘타령’이었다. 레코드에 담긴 “신쾌동 선생의 풍류 중 타령을 들려주것습니다”라고 나오는 정감 있는 멘트부터 흘러나와, 마치 관객이 옛 음악회 현장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로 연주된 곡은 이번 무대의 하이라이트인 <신쾌동 가야금산조>였다.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의 순으로 33분간 연주된 산조는 몰입도가 매우 높았다. 신쾌동의 연주가 27분 소요되었으니 6분 정도 더 길게 연주한 셈이다.
<신쾌동의 伽倻琴>
<신쾌동의 伽倻琴>
<신쾌동의 伽倻琴>
진양조는 매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혹여 명인의 음악을 훼손시킬까 저어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박세연은 신쾌동이 연주한 진양조보다 다소 느리게 해석했다. 성음을 살리고 유려한 선율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신쾌동의 휘모리는 다이내믹의 변화가 거의 없지만 박세연은 휘모리다운 역동성을 음악에 투영시켜 생동감 있는 휘모리가 되도록 했다. 신쾌동 명인이 즉흥적인 가락으로 연주하느라 박세연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 가락도 간간이 있는 듯했다. 손이 먼저 나가 멈추지 못하고, 다음 가락이 먼저 나와 버리는 방식, 혹은 기경결해의 구도와 동떨어진 부분의 경우 약간의 타협이 필요한 경우에 손질한 듯하다. 또 휘모리에서 엇모리로 넘어가는 부분은 갑작스럽게 끝이나 버려 이 부분에서는 이태백의 장단을 윤활유로 삼아 오히려 신쾌동이 연주한 산조보다 여유롭게 마무리를 했다. 신쾌동의 산조에서 느낄 수 없는 다이내믹을 제대로 찾아낸 듯 보였다. 박세연이 연주하는 <신쾌동의 가야금 산조>는 신쾌동이 직접 연주한 산조에서 크게 강조하지 않았던 ‘섬세함’을 살려냈고, 그럼으로써 고요함과 일렁임이 공존하는 산조를 연출하여 관객을 몰입시켰다.
 

전설로 남은 명인과의 진정한 교감

이번 무대의 마지막 곡은 철가야금으로 연주한 남도잡가 <새타령>이었다. 음반 속의 <새타령>은 명주실 가야금에 의한 연주였지만, 박세연은 철가야금으로 <새타령>을 연주함으로써 금속성의 울림을 연출하였다.
 
지난날의 명인들이 연주한 음악에는 이 시대에는 범접할 수 없는 미묘한 에너지가 흐른다. 그것은 시간의 무게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예인의 정신이 살아 숨 쉬었던 옛 시대의 음악적 자장 속에서 표출된 에너지일 수도 있다. 박세연은 바로 그 지점을 <신쾌동의 가야금 음악>을 통해 뽑아내었다. 단순한 ‘소환’이 아닌 진정한 ‘교감’을 통한 소환이라 박세연의 이번 무대는 지난 시절의 명인과 ‘지금 여기’의 예인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듯, 소통의 무대가 되었다. 한성기, 김태문 등 지난날 명인들의 음악을 복원‧재현하는 선행작업을 이미 해 왔던 박세연은 이번 무대를 통해 신쾌동의 가야금 음악이 맥박이 뛰며 살아 있음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송지원
국악방송(FM 99.1MHz)의 ‘국악산책’ 진행자. 음악인문연구소장.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