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조는 매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혹여 명인의 음악을 훼손시킬까 저어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박세연은 신쾌동이 연주한 진양조보다 다소 느리게 해석했다. 성음을 살리고 유려한 선율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신쾌동의 휘모리는 다이내믹의 변화가 거의 없지만 박세연은 휘모리다운 역동성을 음악에 투영시켜 생동감 있는 휘모리가 되도록 했다. 신쾌동 명인이 즉흥적인 가락으로 연주하느라 박세연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 가락도 간간이 있는 듯했다. 손이 먼저 나가 멈추지 못하고, 다음 가락이 먼저 나와 버리는 방식, 혹은 기경결해의 구도와 동떨어진 부분의 경우 약간의 타협이 필요한 경우에 손질한 듯하다. 또 휘모리에서 엇모리로 넘어가는 부분은 갑작스럽게 끝이나 버려 이 부분에서는 이태백의 장단을 윤활유로 삼아 오히려 신쾌동이 연주한 산조보다 여유롭게 마무리를 했다. 신쾌동의 산조에서 느낄 수 없는 다이내믹을 제대로 찾아낸 듯 보였다. 박세연이 연주하는 <신쾌동의 가야금 산조>는 신쾌동이 직접 연주한 산조에서 크게 강조하지 않았던 ‘섬세함’을 살려냈고, 그럼으로써 고요함과 일렁임이 공존하는 산조를 연출하여 관객을 몰입시켰다.
전설로 남은 명인과의 진정한 교감
이번 무대의 마지막 곡은 철가야금으로 연주한 남도잡가 <새타령>이었다. 음반 속의 <새타령>은 명주실 가야금에 의한 연주였지만, 박세연은 철가야금으로 <새타령>을 연주함으로써 금속성의 울림을 연출하였다.
지난날의 명인들이 연주한 음악에는 이 시대에는 범접할 수 없는 미묘한 에너지가 흐른다. 그것은 시간의 무게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예인의 정신이 살아 숨 쉬었던 옛 시대의 음악적 자장 속에서 표출된 에너지일 수도 있다. 박세연은 바로 그 지점을 <신쾌동의 가야금 음악>을 통해 뽑아내었다. 단순한 ‘소환’이 아닌 진정한 ‘교감’을 통한 소환이라 박세연의 이번 무대는 지난 시절의 명인과 ‘지금 여기’의 예인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듯, 소통의 무대가 되었다. 한성기, 김태문 등 지난날 명인들의 음악을 복원‧재현하는 선행작업을 이미 해 왔던 박세연은 이번 무대를 통해 신쾌동의 가야금 음악이 맥박이 뛰며 살아 있음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