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효창(이하 권): 최근 공연에 입체성을 더할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다가, EASThug(이하 이스트허그)가 전통예술과 협업한 여러 작업을 보게 되었어요.
고동욱(이하 고): <굿, 트랜스 그리고 신명>을 시작으로, 올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내일의예술展’에 <신명: 풀림과 맺음>을 전시했어요. <신명: 풀림과 맺음>은 굿에서 신내림의 과정에서 변하는 뇌파 데이터를 미디어아트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한 전시였죠. 지난 7월에는 국립극단 ‘우리연극 원형의 재발견 - 하지맞이 놀굿풀굿’ 시리즈의 하나로 <당클매다>를 선보였습니다. 이 역시 굿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공연이고요.
권: 상자루의 음악 중 <푸너리>도 굿 음악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요. 이에 비해 이스트허그는 신내림 과정이나 치유 등을 주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 <신명: 풀림과 맺음>은 전통 굿과 미디어아트의 접목을 고민하다가 신내림 때의 심적 변화와 당사자의 뇌파를 미디어아트로 시각화하여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동기로 작업한 것이었어요. 굿은 음악과 복식, 시각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저는 연행자(무당)의 신내림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어요.
조성윤(이하 조): 조금은 놀랍네요. 상자루도 전통예술의 여러 요소를 토대로 작업하고 있지만, 그런 발상을 해본 적은 없거든요.
고: 아마도 이스트허그가 전통예술에 무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발상이 아닐까 싶습니다.(웃음)
남성훈(이하 남): 굿을 예로 들었는데, 전통예술에 접근하는 방향과 시선은 각기 다른 것 같아요. 상자루는 전통예술계 내부인의 시선으로, 작가님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고요. 사실 외부인의 시선으로 전통예술을 바라보고 이를 응용한 작품은 낯설고 신선해요.
고: 사실 이스트허그는 아티스트 그룹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 원래 스태프 그룹이었어요. 연극·뮤지컬·무용 공연에 참여하는 무대, 영상, 사운드디자이너 등 8명의 구성원이에요. 그러다가 아티스트로서의 욕망이 꿈틀거려 우리의 작품을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조: 조금은 남다른 과정을 통해 결성된 그룹인 만큼, 남다른 특징이 있을 것 같은데요.
고: 공연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쌓은 경험들은 단독적인 세계를 표현해온 예술가가 쌓은 경험과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국립극단에서 선보인 <당클매다>는 굿음악에 빠져 있던 심준보 음악감독의 몫도 컸지만, 그전에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나 그룹 듀오벗과 함께 하며 체득한 전통예술에 대한 경험과 감각도 큰 힘이 되었어요.
권: 전통예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방향의 변화에 있어 옮고 그름보다, 전통예술을 바라보고 응용하는 시선의 변화는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 같아요. 이러한 변화를 놓고 진행되었던 논박을 보며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전통예술의 본질로부터 일부러 멀어지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전통예술과 새로움 사이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 계승해야 할 ‘전통’, 혹은 변화시켜야 할 ‘전통’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한 바 있는데요. 이런 논의를 떠나서 저는 상자루처럼 활동하는 그룹과 예술가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이러한 고민과 움직임의 방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남: 상자루는 전통 타악기를 전공한 권효창, 작곡을 공부하고 기타를 함께 맡고 있는 조성윤, 그리고 저는 아쟁을 전공했습니다. 성장과정 중에 오랜 시간 전통예술을 공부했는데, 요새는 낯선 시선으로 전통예술을 재구축하는 예술가들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을 보는 시선이 그들에겐 있거든요.
조: 근래에는 음악그룹과의 협업보다는 시각(미술)이나 영상 등 다른 장르를 모색 중이에요. 상자루는 이미 여러 악기의 협업이거든요. 그리고 ‘의존’보다는 ‘대화’를 통해 다른 장르와의 협업을 풀어가고 싶고요.
고: 사실 이스트허그는 전통예술계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니라서 그로부터 상자루보단 자유로운 편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구현한 미디어아트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우와! 신기하다!” 등 작품 구현에 사용된 기술력에만 감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때는 좀 서운하더라고요.
권: 작가님의 경우는 오히려 굿의 본질을 미디어아트로 잘 풀어내고 있다고 보여요. 전통예술이나 미디어아트나 기술적인 부분에 치우치면 오히려 그 본질에 닿지 못하게 되죠. 선생님들이 거짓된 음악을 하지 말라는 말은 매번 맞는 말 같아요. 국악에서 장단과 장단의 연결쇠가 잘 맞지 않을 때 “이면이 잘 안 맞는다” 등의 말을 쓰곤 하는데요. 그런데 이처럼 음악의 틀에 포커싱하면서 접근하다 보면 오히려 음악을 즐기는, 본연의 존재 이유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고: 미디어아트에서 기술력은 중요하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굳이 나눈다면 상자루는 로우(low) 테크놀로지의 음악이고, 이스트허그는 하이(high) 테크놀로지에 입각한 예술이지만, 두 예술이 지향하는 바는 똑같다고 보거든요. 때로는 전통예술인들과 협업할 때마다 놀라곤 해요. 이스트허그는 첨단 기술력을 응용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면, 그들은 강도 높은 훈련과 연마 과정을 거쳐 다음 단계로 진화하고 나아가거든요. 관객들이 미디어아트 작품을 볼 때 그 기술력에 놀라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상자루 같은 그룹의 국악인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연마하는 육체적인 힘과 밀어붙임의 과정은 미디어아트로부터 받는 감정과는 분명 다른 매력을 갖고 있거든요.
고: 국악을 하는 음악가들이 새 음악을 만들 적에 기존 장단을 해체하고, 자신만의 기법을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상자루의 음악에는 어떤 이야기(스토리)가 흐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이 스토리를 느끼게끔 음악 작업을 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상자루의 음악을 들을 적에 기법이나 주법보다는 음악에 녹아 있을 법한 이야기에 주목하며 들었어요.
조: 우리의 음악 중 <푸너리>가 그래요. 저는 작곡 공부를 할 적에도 기법이나 주법보다는 이야기를 입히는 데 중점을 두었고, 교육도 그렇게 받았어요.
남: 음악이지만, 멤버 전원이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녹아 들어가길 바랐어요. 그룹의 음악적 정체성을 잡아야 하던 때라서 우리만의 이야기, 성격, 감각이 음악을 통해 묻어나야 했거든요.
서울남산국악당 ‘젊은국악 단장’에 오르는 공연은 권효창 씨가 연출을 맡았어요. 우리가 만든 음악과 공연은 우리의 경험으로 빚어진 것인데요. 현재 우리가 경험한 느낌을 음악에 어떻게 접목하고,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에요.
상자루는 서울남산국악당 ‘젊은국악 단장’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쇼케이스 형식으로 선보인다. 그들은 출사표와도 같은 기획안에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통이라는 상자 속에 우리가 경험한 다양한 것들을 녹여내는 활동을 해왔다. 이 ‘상자’에 대해, 누군가는 모순성을 비판하기도 하고, 상자루 또한 자체적으로 전통에 대한 모순성을 비판해왔다. 그래서 상자 즉 ‘전통음악’을 정의 내리고 규정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렇다면 ‘상자루’가 경험한 것들, 즉 자루는 무엇일까?
이 자루를 살펴보는 일은 곧 ‘상자루’ 각 연주자의 일상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입력된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자루가 경험해온 것들은 ‘상자음악(전통음악)’보다는 간접적인 것들, 즉 공연, 음악, 여행, 텍스트, 영상, 음식, 대화 등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일은 음악의 구조적 분석을 통한 창작의 과정이 아닌 개인의 삶을 공유하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되었다. 마치 일기를 공유하는 듯이. 그래서 ‘상자루’ 멤버들이 6년이라는 활동기간 동안 겪어온 자루 속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실제 멤버들의 일기에서 가져오거나 일기의 형식으로 에세이를 엮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 음악들이다.
권: 음악 공연이지만 ‘글’도 중요한 공연이에요. 글을 통해 전달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단장 쇼케이스를 준비하면서 미디어아트에 관심 갖게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한 기억과 공간의 이미지들을 관객에게 영상이나 시각물을 통해 보다 실감 나게 제공하여, 공감의 형성대를 넓히고 싶었거든요. 공유의 지점들이 많을 때, 공감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고: 저도 그게 미디어아트가 지닌 매력 중 하나라 생각해요. 제가 미디어아트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극장에서의 경험은 현실에서의 경험과 분명 다르죠. 극장은 비현실적인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그 비현실적 공간을 떠나 다시 현실로 돌아갑니다. 현실 세계를 가장 비현실적인 세계로 바꾸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미디어아트라 생각해요. 한 예로 미디어아트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빛이란 것도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전원을 끄면 현실의 공간이 드러나고요.
권: 사실 음악과 텍스트, 즉 이야기의 공존은 예전부터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앨범 속 해설지에는 곡 설명 즉, 음악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고, 공연장에 가면 음악에 대한 해설지(프로그램북)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러한 텍스트물들이 제한된 지면에 함축된 요약본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을 만들다 보면 분명 그 안에 더 담고 싶은 말, 세세하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제가 위인이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찾아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남: 그래서 우리의 음악에 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닌, 상자루가 왜 이러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영상 같은 이미지는 단번에 그 느낌을 전달할 수도 있고요.
조: 무엇을 조명하는가에 따라 음악과 공연 형태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작년에는 ‘하나의 곡’에 세 멤버의 성격을 녹여 넣기보다 ‘개인’을 드러내자는 전제하에 공연을 구상했어요. 우리는 원래 좌식으로 연주하는 때가 많은데요, 그때는 전 멤버가 서서 연주했어요. 서서 연주할 때, 뭔가 개인의 제스처나 움직임을 통해 그만의 개성과 그간 드러내지 못했던 음악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고: 예술가 개개인의 경험을 관객과 공유할 때, 시각적으로 그것을 구현할 방법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네요. 음악가들은 청각적인 작업에 주력했기 때문에 시각적인 구현에 약한 게 사실이에요. 다만 음악의 느낌과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구현 작업이 시작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만나는 것도 좋을 거예요. 저 역시 혼자서 작업을 했다면 지금 같은 길을 걷지 못할 거예요. 많은 사람에게 받은 영감이 지금의 이스트허그를 만든 것 같아요.
권: 상자루는 각 예술가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멤버들의 내부적인 협업을 통해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함께 거주하는 ‘집’이 있고, 그곳으로 각자가 모아오는 ‘경험’과 기억이 있어요. 앞으로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나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