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가을

리뷰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이지예
발행일2024.11.20


판소리와 굿, 가족 이야기가 사는 집으로 

6월치고는 더운 날씨였다. 저녁이라 바람이 조금 선선해지기는 했지만, 낮 동안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은 아직 뜨거웠고, 공기는 수증기를 잔뜩 머금어 몇 걸음만 걸어도 이마에 땀이 맺혔다. 빌딩에서 차에서 틀어대는 에어컨으로 안 그래도 때가 일러 당혹스러운 더위가 더욱 반갑지 않았다.
소리꾼 박인혜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

놀애박스를 열어보고자, 서울남산국악당으로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남산골한옥마을로 들어서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공기가 가벼워졌다. 충무로역에서 도보로 2분, 도로로부터 고작 몇백 미터 거리일 텐데 이렇게나 공기가 다르다니. 빌딩 실외기 열기도 없고, 달궈진 차체의 더운 바람도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빨리 냉방이 되는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남산골한옥마을에 들어서자 조금 걸을까 싶다.
때 이른 더위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달래는 흙 마당과 나무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남산골한옥마을 내 서울남산국악당 주변을 잠시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보게 될 공연에 대해 생각했다. 그룹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이하 놀애박스)의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팀의 이름도 극의 이름도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애박스(대표 박인혜)라는 팀 이름도, ‘오버더떼창’ 이라는 공연 수식어도,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는데 희한하게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낯설게 섞여 있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내가 한국어나 영어라고 추측한 것이 실은 아주 다른 의미의 다른 언어였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아시리라 믿어요”와 “모르셔도 괜찮아요” 사이 어디쯤에서 극장을 찾은 이들에게 퀴즈를 내고 있는 것 같은 이 팀의 소통방식이 재치 있고 익살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게다가 ‘판소리 합창’이라니. 보통은 나란히 놓이지 않는 두 단어가 가지런히 기대 있는 모습에 한층 더 호기심이 일었다.

독특한 연출로 무대를 채우며

공연 시작 시각. 무대는 이미 한참 전에 준비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객석은 조용해졌다. 소리는 등 뒤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절반은 왼편 문으로 절반은 오른편 문으로 객석 뒤편에 있는 문을 통해 배우들이 노래하며 들어섰다. 그대로 무대까지 가겠거니 했는데 배우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객석의 경사로에 아예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 노래를 부른다. 어깨로, 손끝으로 바람을 그리면서, 손에 쥔 부채로 파도를 그리면서.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목소리는 하나인 듯 여럿이었고, 여럿인 듯 하나였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소리꾼들에게 둘러싸여 오른편에서 노래가 들리면 오른편을, 왼편에서 노래가 들리면 왼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곡 하나를 통째로 듣는 동안 이상하게 극장의 시공간이 새로워졌다. 통일감은 있으되 약간씩 서로 다른 복식과 머리 모양. 한 몸처럼 움직이고 노래하지만, 그 안에서 분명히 들리는 소리꾼 개개인의 음색과 습관. 이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분위기로 이야기의 세계가 활짝 열렸다.
무대에 이른 소리꾼들은 관객들에 정식으로 인사를 하더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대 중앙에는 너덧 사람이 여유 있게 오를 수 있을 듯 보이는 평상이 하나 있었고, 그보다 조금 뒤편에는 좌우로 하나씩 벤치 모양의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장면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소리꾼은 평상 앞에 서거나 평상 위에 올라 소리를 했고, 함께 장면을 만들어 내는 다른 소리꾼들은 이 소리꾼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대형으로 모이거나, 흩어져서 이야기와 소리를 보탰다.

내력을, 선하고, 나게 풀다

문전본풀이는 ‘제주도 굿에서 제주도의 문신(門神)인 문전신(門前神)과 집 안 곳곳에 자리한 그 가족신들의 내력을 풀이하는 서사무가’이다. 살림을 일으켜 보고자 오동국으로 떠난 남편과 연락이 되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선 여산부인. 남편을 꾀어낸 노일제대의 농간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지만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눈치 빠른 막내아들 녹디생이와 함께 노일제대로부터 가족을 구하고, 정겹게 오순도순 속 나누며 살다가 죽어서는 이들 모두 집안 곳곳의 신이 되었다는 조금 섬뜩하고 오싹하지만, 흥미롭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놀애박스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한 사람의 소리꾼이 전 배역은 물론 해설자의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이 보통인 전통 판소리와 다르게 이 작품 속 소리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와 노래를 나누어 전달했다. 가끔은 혼자 부르고 또 때로는 함께 부르고. 어떤 때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서로의 메아리가 되기도 하고.
인물들의 자기소개 방식도 재미있었다. 등장인물보다 적은 수의 공연자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한 배우가 여러 역을 연기하거나 해설자와 인물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놀애박스의 그것에는 어딘가 독특한 유머가 있었다. 스스로를 남선비로, 여산부인으로, 전상아재로, 노일제대로 소개할 때 각각의 인물이 보인 태도가 그랬다. 관객에게 이 인물을 분명 처음 소개하는 것인데도, ‘아니 내가 누구인 줄 아직 모르셨단 말이오,’ 하는 능청스러움. 그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박인혜만의 남다른 판소리 활용법

복잡하지 않은 무대는 남선 고을이 되었다가 오동국이 되었고, 노일 제대가 남선비를 꾀어 살림을 차린 집도 되었다가 여산부인이 익사할 뻔한 못도 되었다. 소리꾼들은 남선비와 여산부인의 아들들이었다가 오동국의 아이들이었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움직임으로 별다른 장치 없이 이야기의 장면들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중간에 삽입된 제주도 심방의 무가는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온 이야기인지를 다시 한번 훌륭하게 환기했고 그래서 이야기는 더욱 특별해졌다.
놀애박스의 대표인 소리꾼 박인혜는 “‘전승‘되고 ’보존’되는 판소리보다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는 판소리에 더 관심이 많은 창작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 이 작품의 시작에 창작자의 어떤 고민이 있었을지, 어떤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기를 바랐을지 상상해 보았다. 공연을 보기 전, 전통음악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게 ‘판소리 합창’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나서는 무엇을 기대하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는 판소리’ 라는 말 역시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판소리를 활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본래 판소리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판소리의 방식으로 전하는 창작공연들을 보면서 이미 몇 차례나 감동을 받았었다. 그 때마다 판소리에 관한 나의 제한적 상상력을 되돌아 반성했었다. 그리고, 오늘 공연을 보고 나오며 또 같은 반성을 했다. 판소리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들은 이미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왜 판소리를 고정된 장르로만 여기는 낡은 생각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하는 걸까. 앞으로 이런 발랄한 시도들을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판소리를 활용한 어떤 시도도 당혹감 없이 그저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이지예
이지예 (연극학 연구자, 연극 놀이사) 창작 과정에 자전적 서사를 활용하는 여성 공연 예술인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회 변혁을 위한 연극, 장르 로서의 1인극과 그 창작 과정을 연구한다. 극장 밖에서의 연극의 다양한 기능에 관심을 두고 극장 공간으로부터 종종 배제되는 이들과의 함께할 수 있는 놀이 형태의 연극을 고민하고 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