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지 않은 무대는 남선 고을이 되었다가 오동국이 되었고, 노일 제대가 남선비를 꾀어 살림을 차린 집도 되었다가 여산부인이 익사할 뻔한 못도 되었다. 소리꾼들은 남선비와 여산부인의 아들들이었다가 오동국의 아이들이었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움직임으로 별다른 장치 없이 이야기의 장면들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중간에 삽입된 제주도 심방의 무가는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온 이야기인지를 다시 한번 훌륭하게 환기했고 그래서 이야기는 더욱 특별해졌다.
놀애박스의 대표인 소리꾼 박인혜는 “‘전승‘되고 ’보존’되는 판소리보다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는 판소리에 더 관심이 많은 창작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 이 작품의 시작에 창작자의 어떤 고민이 있었을지, 어떤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기를 바랐을지 상상해 보았다. 공연을 보기 전, 전통음악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게 ‘판소리 합창’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나서는 무엇을 기대하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는 판소리’ 라는 말 역시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판소리를 활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본래 판소리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판소리의 방식으로 전하는 창작공연들을 보면서 이미 몇 차례나 감동을 받았었다. 그 때마다 판소리에 관한 나의 제한적 상상력을 되돌아 반성했었다. 그리고, 오늘 공연을 보고 나오며 또 같은 반성을 했다. 판소리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들은 이미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왜 판소리를 고정된 장르로만 여기는 낡은 생각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하는 걸까. 앞으로 이런 발랄한 시도들을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판소리를 활용한 어떤 시도도 당혹감 없이 그저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