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배우는 멀티맨의 기능을 한다. 여자 씨와 남자 씨가 되기도 하고 낚시꾼이 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로도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여자 씨와 남자 씨가 배우의 실제 성별과는 다르게 역할을 맡기도 하고, 장면에 따라 한 인물의 배우가 바뀌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젠더리스 캐스팅이다. 우리가 가진 고정적인 성역할이나 상황들이 연기하는 배우의 실제 성과 대비되면 그것 자체로 유머가 되기도 한다. 이런 설정은 관객이 극을 주의 깊게 쫓으며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여기에서는 장면마다 친절하게 짚어주었기 때문에 따라가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어른의 시선과 아이의 시선 사이에서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관객의 반인 아이들은 좀처럼 극에 집중하지 못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옆의 어른에게 자꾸 물었다. “칠삭둥이는 왜 이렇게 무섭게 생겼어?”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양육자와의 애착 관계가 탄탄하지 못한 아이들은 대부분 유기불안을 가지고 있다. 애착은 아이의 생존과도 직접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 생명체가 귀여운 외모를 가진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배냇짓을 하며 미소를 짓는 것도 바로 생존을 위한 진화론적 방편이다. 방과 후 돌봄교실에서 아이들끼리의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엄마가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이다. 바리데기 또한 유기불안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부모로부터의 위험한 부탁도 들어줄 만큼 험한 길을 택하지 않았나.
그런데 칠삭둥이는 다르다. 칠삭둥이는 ‘엄마’‘아빠’라 부르지 않고 ‘여자 씨’와 ‘남자 씨’라 부른다. 자신의 부모를 객관화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황은 아이 입장에서 의아하다. 고난을 극복하고 불안을 이겨내는 성장형 주인공과는 다르게 칠삭둥이는 처음부터 본능적이지 않다. 금기와 갈등 구조가 없고 사건에 관망하는 태도를 가진 것이, 태어날 때부터 칠삭둥이는 신격이 아닌가!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 성장형 인물은 여자 씨다. 칠삭둥이는 여자 씨의 각성을 인도하고 용서한다. 어른들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과연 어디까지 이해했을까? 그래서 어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극의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그나마 칠삭둥이에게 이입했던 아이들의 감정선을 무너트렸다. 소설로 치면 시점이 바뀌고, 드라마라면 주인공이 바뀌는 셈이다. 어린이가 극에 몰입할만한 인물은 없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모든 아이는 엄마가 사라지면 당장 울음부터 터트린다. 그런데 칠삭둥이는 도대체 엄마가 없어졌는데 애타게 부르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심지어 애어른처럼 “엄마가 불쌍하다”라며 이해하려 애쓴다. 첫 단추부터 끼워지지 않으니 계속 질문투성이다. 단 한 꼭지라도 “엄마!”라고 크게 소리치며 못 말릴 만큼 엉엉 울어버렸다면 달랐을까?
누구나 어린이의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에 다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지나온 어른은 어른의 눈으로 그 시절을 다시 본다. 퇴색된 기억을 지금의 회상으로 덮어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미숙함과 천진함이 전부는 아니다. 10세 어린이와 7세 어린이의 세계는 다르다. 어린이도 어린이만의 마음이 있고 미학적 감각이 있다. 색깔도 아이들의 심리를 반영한다. 아이들은 생존적이다. 그렇게 여러 요소의 총합체가 어린이극의 결을 정한다. 아이를 설득시키기 위한 장치는 조금만 예리하게 분석하면 다정히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광대의 몫은 충분했다
음악극인 <줄 타는 아이와 아프리카도마뱀>의 음악은 어땠을까. 잘 훈련된 배우들은 타악기 연주나 노래의 전달력도 좋았다. 노래와 연주의 배분은 극을 해치지 않는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도마뱀의 목소리는 소박한 멋이 있었다. 줄을 타는 가야금, 해금,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아프리칸 느낌의 여러 타악기가 영리하게 선택되었다. 그런데 줄이 가진 상징성이 음악적 내용에서도 발휘되고 있었는가는 의문이 든다. 그야말로 연주법 자체가 줄타기인 해금이 허튼타령 한 가락 뽑았으면 어떨까 싶다. 대부분의 음악이 4박 계열로 단조롭고 각인될만한 선율은 딱히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