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 전승사를 보면 두 가지 방향이 나타난다. 탈춤 보존회 중심의 전형 전승이 그 한 방향이고, 대학 탈춤반 동아리를 중심으로 문화운동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창조 전승이 또 다른 방향이다. 이번 공연의 위치를 정해본다면, 보존회 중심의 전형 전승과는 다른 창조 전승의 계통에 자리한다. 전통과 혁신, 전형과 창조 사이에서 후자에 그 방향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이번 공연이다.
이매가 전환된 ‘MC이노마야’가 노래하는 “내가 쓰고 있는 하회탈/옛날옛적사람 쓰고 놀던 탈 (···) 세월가다 뒤쳐졌지 뭐/고리타분한 트래디셔널/ (···) 트래디셔널을 트랜디하게”라는 랩 가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변화와 새로움을 상상하고 구체화하여 <추는 사람, 남산>이 만들어낸 것은 ‘트레이너취발’이 주도하는 탈춤의 대중화 혹은 생활 탈춤화가 이루어진 세계이다. ‘인싸BARI’같은 신명이 넘치는 놀이꾼이 판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MC이노마야’와 같이 자신을 성찰하기도 하면서 짐짓 진지해지다가 거침없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탈꾼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민감한 촉수를 들이대고 이를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앵커말뚝이’와 ‘일하는둥마는둥’도 함께 사는 곳이 천하제일탈공작소가 만들어낸 세상의 탈춤이다.
하지만 그 세상은 아직은 거칠고 아쉬운 점이 많다. 전자악기 반주와 전통탈춤의 부조화, 전통 춤사위와 새로운 춤동작의 질적 편차, 전통 재담 방식과 일상 언어 구사 사이의 거리 등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차용한 당대의 여러 장르나 공연 요소가 전통탈춤과 곳곳에서 충돌한다.
탈춤의 가면을 그대로 사용한 것 역시 지적될 만하다. 전통 가면을 쓰고 당대의 인물을 표현하는 것은 모순적이고 조화롭지 못하다. 그런데 전통 가면의 사용은 의도적일 수 있다. 천하제일탈공작소 젊은 탈꾼들의 이중적 정체성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추는 사람, 남산’의 연희자 대부분은 전통탈춤의 전승자와 개성적인 예술가로서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전통탈춤 전승자로서의 책무와 개성적인 예술가로서의 욕망이 공존한다.
사실, 전통 가면의 착용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은 없다. 전통 가면을 쓰고 표현하는 당대 탈꾼들의 본심은 그들이 처한 어중간한 위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추는 사람, 남산>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혁신을 선언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성거린다. 그리고 아직은 멈칫거리기도 한다. 새로운 변화를 선언하는 불림을 하고 있지만, 서 있는 곳은 아직 경계선이다. 전통과 창조의 경계선에서 그들은 서성거리고 있다. 그 서성거림이 곧 당대 탈꾼들의 탈춤일 수도 있다. 그 서성거림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했으면 어땠을까?
이 공연을 ‘경계선에서의 불림’이라 필자가 명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향과 선언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그 실체가 모호한 경계선에서의 불림에서 멈춰있다. 이제 불림이 걸맞은 당대 탈춤을 보여주어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