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겨울   山:門 REVIEW

리뷰 │ 남산골밤마실 이머시브 투어 공연 [기담야행]

박돈규
발행일2022.12.06

이라는 콘텐츠가 국악과 전통에 더해질 때

 

누가 작명했는지 모르지만 <기담야행>(2022.10.20~30)은 사람을 잡아 끈다. 말 자체에 자석 같은 힘이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소리를 내어 읽어 보라. 기담(奇談)은 기이하거나 으스스한 이야기, 야행(夜行)은 밤에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담야행’이란 밤길을 걸으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뜻 아닌가. 어릴 적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던 귀신 이야기부터 떠오른다. 2022년에 그것이 ‘이머시브 투어(immersive tour)’라는 몰입형 공연의 형태로 등장한 셈이다.


 

나이트 라이프

‘밤’이라도 발음할 때 두려움과 불안이 담기던 시대가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도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500년 전 밤은 난공불락의 시간이었다. 마을은 참나무 숲처럼 캄캄했고 사람들은 램프나 양초로 밥그릇이나 책을 비추었다. 한숨을 내쉬면 불꽃과 더불어 그림자도 떨리다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약한 불빛도 아껴 써야 했고 어스름에 저녁을 먹으면 곧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 조상이 화로에 숯불을 담아 난방을 하면서 불씨를 보존했듯이 일단 불을 지피면 지키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다 19세기 유럽에 가로등이 등장했다. 마침내 ‘나이트 라이프(night life)’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서울 남산골한옥마을 입구에서 <기담야행>의 포스터를 본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제목 옆에 ‘남산골에 깃든 귀신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밤에 등불을 앞세우고 산을 넘어가는 이들의 행렬을 그린 삽화도 보였다. 10월 20~30일 남산골한옥마을 일대에서 펼쳐지는 밤마실이라고? 러닝타임 70분에 표는 1만원. 코로나의 긴 터널 끄트머리에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나이트 라이프’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음이 동했다. 그래, 한번 가보자!

 

빨랑 귀신 나오라 그래!

ⓒ조현우
지난 10월 22일 토요일 밤 7시를 10분쯤 앞둔 서울남산국악당. <기담야행> 안내문을 따라 서울남산국악당 앞마당에 도착했다. 번쩍이는 삿갓을 쓴 도우미들이 보였다. 캠핑용 의자들에는 벌써 체험객들이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남산골 밤마실에 몸을 밀어 넣은 이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아이 손을 잡고 온 가족이거나 젊은 연인이거나. 너나없이 야광 팔찌를 착용하며 곧 펼쳐질 나이트 라이프를 기대하는 표정들이었다. 한 커플 관객이 하는 말이 들렸다.
“빨랑 귀신 나오라 그래!”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밤하늘에 인공위성이 더 또렷이 보였다. 우주정거장이나 달까지 인간을 보내는 시대에 귀신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등장할까. 여느 테마파크에 있는 귀신의 집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사람들을 놀래키고 달아날까? 만약 그런다면 저 대여섯 살 꼬마들은 기함하거나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별의별 상상을 하는데 드디어 7시가 됐다.
“문 여시오! 문 여시오!”
갓을 쓴 야광귀들이 뛰어 들어온다. 모두 4명이다. 미리 읽은 줄거리에 따르면 야광귀는 인간 세상으로 도주했다가 염라대왕에게 붙잡혀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몸이 빛나게 된 귀신이다. 관객은 그들의 안내에 따라 종이 가면을 쓰고 <기담야행>에 참여하게 된다. 이 몰입형 밤마실 투어의 길잡이들인 셈이다. 한 야광귀가 소개를 한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저승에서 남산골에 놀러 온 야광 귀신이다. 발에 딱 맞는 신발 있으면 바꿔 신고 가자! 그런데 너희들, ‘나례’ 알지?”

 

500년 된 귀신도 함께 하다

여기서 잠깐. 체험객은 십중팔구 ‘나례’가 뭐였더라, 할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인터넷을 검색해본다.
‘나례(儺禮)’는 우리 조상들이 섣달그믐날 밤 궁중과 민간에서 묵은해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던 의식이다. 역병이나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처용가에서도 처용이 역신에게서 아내를 되찾는 장면에 나례가 등장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탈을 쓰고 음주가무를 하며 즐기는 습속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특히 궁중 나례는 궁중의 예인을 비롯해 최고의 민간 예인이 함께한 축제였다.
<남산골밤마실>은 2017년부터 남산골한옥마을 일대를 이동하며 관람하는 투어형 공연이었다. 올해는 나례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와 연출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구성했으니 야광귀들이 “너희들, ‘나례’ 알지?”라고 물어본 것이다.
체험객들이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야광귀는 스스로 답한다. “나례도 몰라? 가면 쓴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잡귀 몰아내는 거여. 신난다 신나! 일어나 일어나! 그런데 왜 반말질이냐고?” 서울남산국악당 앞마당을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이 또한 야광귀가 답한다. “죽은 지 오백 년이다, 이눔아! 오늘 하루 말 놓자 다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우리는 대화가 통하는 귀신이야. 떠날 준비 되었는가?” 준비는 일찌감치 되어 있었다. 웃음 소리, 박수 소리와 함께 <기담야행>의 이야기 보따리가 이제 풀릴 참이다.

 

울음과 귀기가 서린 국악으로 오싹함을

먼저 민씨가옥에 도착했다. 청사초롱 불을 밝힌 한옥이다. 음악을 하다 죽은 여자 귀신 셋이 가야금 등 국악기를 연주한다. 연주를 무섭게 잘하는데 예쁘고 창백하다. 표정이 없어 더 무섭다.
피금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올레길을 닮아 있다. “빨리 오라”며 야광귀들이 느티나무 아래로 잡아 끈다. 고려 말 내기바둑 이야기와 함께 거문고 귀신이 등장한다. 과거 시험 전에 정인에게 선물하고 간 것인데 돌아오지 않아 마음에 병이 들고 거문고를 끌어안고 죽었다. 구슬픈 거문고 소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한 여인의 울음이 맺힌 연주다.
기담야행은 이렇게 기이한 일들이 국악과 함께 펼쳐진다. 한 꼬마가 “귀신이 너무 귀여운 거 아녜요?” 하자 야광귀는 “잡설은 그만하고 다음 스팟으로 이동하세”로 받는다. 하늘을 보니 불을 환하게 밝힌 남산타워가 보인다.
‘서울천년타임캡슐’ 앞에서는 제성대곡(齊聲大哭)을 들려준다. 귀신들이 떼로 몰려 다니는데, 아쟁처럼 슬픈 음악 소리를 들으면 엉엉 곡을 했다고 한다. 거대하게 움푹 패인 공간이라 더 음산하다. 귀신의 울음소리가 “가지 마, 가지 마”처럼 들린다.
다음 장소로 가는 길에 야광귀와 포토타임이 있다. “달걀귀신은 왜 없어요?” 누가 묻자 “냉장고에서 찾아보게” 한다. 순발력도 좋구나. 천우각으로 가야 하는데 이날은 사정상 원점으로 돌아와 흥겨운 퓨전 국악 밴드 연주로 마무리한다. 단소와 태평소 등에 춤도 어우러진다. 야광귀들이 손을 흔든다. “이것으로 <기담여행>은 끝이네. 조심히들 가시게~”

 

새로운 관객을 찾으려는 모색의 시대 속에서

<기담야행>에 눈길이 간 까닭은 그 무렵 페이스북에 올라온 어떤 사진 때문이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이라는데 청년 수백 명이 보였다. 공포 연극 ‘야간괴담회’를 보러 온 관객들이라는데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MZ 세대를 겨냥한 <대박쌈박! 국중박> 프로젝트의 하나로 수요일 야간 개장(오후 6~9시) 때마다 이 무료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린이나 노인이 대다수인 박물관 관람객을 어떻게 젊은 층으로 확대할 것인가 하는 고민의 산물인데, 회당 300~400명이 오고 약 90%는 20~30대라고 했다.
<야간괴담회>는 가야 시대 순장 유물 옆에서 상전과 함께 묻혀야 했던 이들의 억울한 심정, 조선 시대 유물 <자녀명문>을 통해 자신과 자녀를 노비로 팔아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는 등 박물관 유물에 얽힌 괴담을 들려주었다. 연출가 정안나는 “강자들의 공간인 박물관에서 약자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 평소 공연장에 오지 않는 분들도 예술을 수도나 전기처럼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남산골에서도 으스스한 이야기가 상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기담야행>의 특징은 투어 장소마다 연주자와 배우들이 옴니버스 형식의 기담과 국악 공연을 함께 펼친다는 점. <기담야행>과 <야간괴담회> 모두 정규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펼쳐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새로운 관객을 찾아 더 대중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실험과도 같았다.

 

앞으로는, 기담도 입맛별로!

<기담야행>을 경험하고 든 생각은 크게 세 가지다. ‘매운맛’ ‘순한 맛’ 등 관객 취향이나 구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두세 갈래 코스가 있으면 더 좋겠다. 아이가 울면 안 되니까 공포의 수위가 낮아야 하는 가족 관객이 있는가 하면 좀 더 무서운 이야기를 바라는 커플 관객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림자극 형태의 기담이 추가되면 좋을 것 같다. 그림자극은 연극의 원형에 가깝고 밤의 어둠과 빛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팥을 이용한 음식을 맛보게 하면 어떨까. 팥죽이나 팥이 든 호빵, 붕어빵도 좋다. 체험객들에게 소금을 조금씩 나눠주고 <기담야행> 중 야광귀들에게 뿌리는 순서를 넣을 수도 있다. 참여를 이끌어 낼 흥미로운 방법 아닐까?
 
 
박돈규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2006년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기자상을 받았다. 2008~10년 한국뮤지컬대상 심사위원을 지냈다. 저서 <여기쯤에서 나를 만난다> <뮤지컬 블라블라블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