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봄   山:門 REVIEW

리뷰│서울남산국악당 [코리아그라피]

윤대성
사진혜강신귀만
발행일2023.02.09

본질에 가까이 가니, 오히려 새로운 춤이 보인 순간

시야가 짧은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미(美)에 대한 안무적 탐색’을 표방하는 무용역사기록학회(회장 최해리)의 ‘코리아그라피(Korea+Choreography)’는 익숙한 레퍼토리의 관성을 벗어던진다. 전통을 째려보면서 기어이 결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과 재료를 더 잘 보존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본질에 가까운 새것을 만들었다. 특히 악(樂)‧가(歌)‧무(舞) 일체-연주와 노래와 춤이 하나의 종합예술이라는 개념-를 지향하는 10명의 춤꾼은 음악과의 긴밀한 협연을 모두 신작으로 보여준다.
협연의 카테고리는 다섯 종류이다. 소리꾼의 구음에 맞춰 입춤을 선보이는 ‘구음심무’, 거문고 산조를 춤으로 해석하는 ‘겹겹산조’, 판소리 발림을 춤으로 확대하는 ‘춤춤발림’, 근대민요에 신민요춤을 맞추는 ‘음풍농짓’, 타악기 춤을 신명나게 풀어내는 ‘박동’ 등이다.
이런 세분화를 통해 무용역사기록학회 임원인 춤꾼들은 한국무용과 음악의 일체성을 가히 학구적으로 탐색한다. ‘움직임 특징’, ‘음악 구성’ 등을 적어낸 ‘안무자 리서치 계획서’를 프로그램북 뒤편에 상세하게 소개한 점이 춤의 현장과 연구를 아우르는 이 집단의 특성을 보여준다.
최해리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정혜정 연출, 김홍기 협력연출, 유인상 음악감독이 힘을 보탰다. 반주는 전통음악그룹 판이 맡았다.
<음유재인(音遊才人)> 문진수·김보라

민요와 판소리를 통한 해학성 탐색

경쾌하게 포문을 연 작품 ‘춤의 향기가 만리를 넘다’는 민요에 춤을 얹은 최준명의 댄스드라마이다. 1950년대 명동거리의 분위기를 익살스럽게 재현하면서 20세기 초반 대표적 춤꾼 배구자(1995~2003)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창부타령’, ‘양산도’, ‘노들강변’ 등을 편곡해 엮으며 재즈풍을 넘나드는 고현경의 보컬과 이성순의 타악, 강희수의 아코디언이 큰 역할을 한다. 김향과 손미정이 젊은 날의 배구자 역을 맡아 찬조 출연했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날아간 최준명이 과거의 시간 속 배구자를 만나 함께 춤을 춘다. 춤사위는 황무봉류, 대본은 한정원이다.

이어지는 김수현의 ‘박씨전, 추어지다’ 역시 한국춤이 극장예술로서 예술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흔히 배제해온 해학성을 크게 수용한다. 지금은 맥이 끊긴 판소리 ‘박씨전’을 최교익의 대본, 서정금의 소리로 복원했다. 막간극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갖춘 완성도를 갖추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형식은 소극(笑劇), 즉 웃음거리극이다. 안무자 김수현은 박씨부인 역을 춤으로 소화하고, 국립창극단 단원 서정금은 시아버지, 남편, 해설자 역할을 소리와 아니리로 넘나든다. 천하박색으로 독수공방하던 박씨부인이 신묘한 도술로 집안을 일으키면서 금슬이 좋아지는데, 이 과정에서 재치 있는 소품 활용과 노골적인 과장으로 골계미를 극대화한다.
<그 너머의 봄> 유정숙·이선희

한국적 정서의 흥과 정중동 탐색

거문고산조에 맞춘 독무는 차수정과 유정숙이 소화한다. 먼저, 차수정의 산조춤은 김홍도의 ‘단원도’를 바탕에 둔다. 초여름의 푸르름 아래 거문고를 타고 있는 김홍도와 그 앞을 노니는 학. 차수정은 이 학이 되어 거문고 가락에 몸을 맡긴다. 그는 정재만류의 춤사위를 기품 있게 소화하는 춤꾼인데, 이번 ‘내 마음의 사유’에선 중후한 거문고의 경쾌하면서 둔탁한 퉁김을 풋풋한 오동나무 가지 같이 소화했다. 어깨와 팔사위를 과장하여 산뜻하게 맺고 끊는 상체, 아울러 풍성한 치맛자락 아래의 가뿐한 디딤새가 두드러진다. 이 개성 있는 춤을 떠받치는 연주는 이진우가 맡았다. 한편, 유정숙은 이선희의 거문고 가락에 몸을 맡긴다. 무게감 있는 낮은 음과는 반대로 춤꾼은 ‘그 너머의 봄’을 바라본다. 빠른 장단에서 느려지는 역순의 음악 구성 속에 내면에서 우러나는 잔잔한 생명력을 표현해냈다.
남수정의 ‘섬섬(閃閃)’ 그리고 서정숙의 ‘흰 그늘’은 보다 진중하게 우리의 삶을 파고든다. 묵직한 정서는 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춤의 색깔은 대조적이다. 남수정은 ‘수궁가’ 중 별주부가 육지의 풍광에 감탄하는 대목에서 인생무상의 주제를 끌어낸다. 동작이 크고 유려한 신무용의 사위를 대범하게 사용하는데, 그 시원시원한 춤선으로 번쩍번쩍(閃閃)한 풍광과 허무함의 정서를 백현호의 소리와 함께 양가적으로 표현한다. 반면 서정숙의 담백한 움직임은 정중동의 극치이다. 단전으로부터 뿌리내린 단단함과 어슷하게 고정한 몸체, 바닥을 향한 시선만으로 그가 내면으로 깊이 침잠했음을 알 수 있다. 살풀이의 절제된 정서를 수건 없이 풀어낸다. 작은 몸짓이 강한 울림을 만드는 그야말로 내공이 흘러나오는 춤이다. 황민왕의 구음과 소리가 크게 기여한다.
<적벽화전> 이주희·김영길

저절로 추어지는 신명 탐색

설장고춤과 진도북춤의 협연인 ‘지음 지음 지음’은 마음이 통하는 두 친구(知音)의 합동 무대이다. 장고를 맨 성윤선의 화려한 솔로에 이어 염현주의 진도북춤이 무대를 휘젓고, 두 사람이 장단을 주고받으며 절정을 만든다. 성윤선의 설장고는 다른 여류 장고춤과 차별화되는 호방함과 능청스러움을 갖추었는데, 타악기 춤의 공통성 안에서 두 사람의 대비되는 이미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한편 문진수의 ‘음유재인’은 연희적 특징이 강한 소고입춤이다. 소고의 화려한 기예 뒤에 김보라의 구음에 맞춘 정적인 사위로 마무리한다. 유일한 남성춤으로 다양성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피날레를 장식한 이주희의 ‘적벽화전’은 대군을 격파하는 전쟁의 역동성을 무려 독무로 소화해야 하는 어려운 춤이다.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등장한 그의 뒤로 휘장이 걷히며 13개의 북이 위용을 드러낸다. 일반북과 대고를 조합한 2열 횡대를 이주희는 적진인 양 염탐하고 가죽을 뚫을 듯 두드리며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고무, 사고무 등으로 전열을 달리하며 적장(북)과 겨루는 용맹한 장수를 김영길의 아쟁이 뒷받침했다.
 
윤대성
심리학과에서 뇌를 들여다보다가 운명의 장난인지 무용계 한가운데 착지했다. 외부자로, 때론 내부자의 시선으로 공연예술계를 바라본다. 한국춤평론가회 최연소 회원이자 월간 ‘댄스포럼’ 편집장이다.
사진 혜강신귀만
사진제공_무용역사기록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