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시론에 이 근본기분의 구체적 함의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이를 존재적 차원에서는 ‘인지하거나 감각되지 못했던 실재와의 조우’라고 명명하며, 이를 휴머니즘(humanism)의 철저한 해체와 지구적 관점의 도래라고 풀어쓰고 싶다. 이 풀이를 좁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인간중심적 관점과 서구적 현대성·세계관의 전면적 몰락이 들어 있는 것은 뚜렷하다. 이 해체와 몰락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이며, 예술작품은 이 계기에서 철저하게 체험되는 ‘진리’의 장이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지구가 멈추는 날> 같은 SF영화에서 나타나는 낯선 관점을 ‘이후의 예술작품’에서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다룬 SF영화다. 이 영화에는 외계인 클라투가 지구를 대표하는 미국국방장관과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왜 우리 행성에 왔습니까?”(미국국방장관)
“당신네 행성?”(클라투)
“예. 여기는 우리 행성입니다.”(미국국방장관)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클라투)
“당신은 우리의 친구인가요?”(미국국방장관)
“나는 지구의 친구입니다.”(클라투)
해리베이트(Harry Bates)의 단편소설 <Farewell to the Master>(1940)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인간의 친구’와 ‘지구의 친구’가 같은 뜻이 아니며, 지구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인간문명에 의해 위기에 처한 지구의 구원을 위한 외계인의 침공은 ‘인간침공’이지 ‘지구침공’이 아니다. 이는 사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팬데믹이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고 지구에서 뭇생명과의 공존을 파괴한 결과라는 자성을 미리 보여주는 인식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히말라야의 풍경을 도시에서도 처음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깨끗해지고, 인간의 이동을 제한하자 도시의 하천에서조차 사라졌던 물고기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세계 곳곳의 보고들도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종래에는 하나의 장르문학적 ‘상상력’으로 치부되었을 뿐 ‘사실-진리’로서 인식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휴머니즘적 태도,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근본기본’ 때문에 ‘진리’가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은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예술현상,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본기분을 뚫고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의 드러남은 인간문명사회에서 대중의 일반적 인식이 되기 어려웠다. 즉 예술가적 각성과 대중의 인식 사이에는 늘 괴리와 낙차가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영성적 각성 속에 사는 그루와 상투화된 사회제도로서 종교에 참여하는 ‘세속적 종교인’ 사이에 있는 존재 체험의 괴리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적 관점에서 인간문명의 비도덕성을 전면적으로 각성하게 됨에 따라 현존재(인간)의 근본기분에 대각성이 초래될 것이며, 이 각성은 특정 예술영역의 장르적 상상력을 넘어서 ‘이후 예술’의 기본적 무의식을 이루게 될 것이다.
종래에 ‘그로테스크 예술’이라고 치부된 것들의 불가해성도 이제는 마찬가지 차원에서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그로테스크(grotesque)의 핵을 이루는 ‘낯섦’은 대체로 작품의 핵을 이루는 실체, 즉 존재적 실재에 관한 예술향유자 관점에서의 해석적 수수께끼를 뜻한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실은 세계의 실재, 즉 ‘진리’에 관한 인간의 미망(迷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편혜영의 소설 <사육장 쪽으로>(2007)에는 신혼부부의 평화로운 일상을 난데없이 깨뜨리는 ‘개의 습격’이라는 ‘그로테스크’가 스토리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새>(1963)에서 끝까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난데없는 새의 습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인간중심주의를 지구적 관점으로, 즉 뭇 생명의 관점을 포괄한다면 더 이상 해석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다. 편혜영의 소설에서 이 습격은 스토리가 아닌 제목 ‘사육장 쪽으로’를 통해 암시된다. 개의 습격은 인간이 잡아먹기 위해 개를 가둬 둔 ‘사육장’ 때문에 일어난 개의 ‘정당한’ 분노를 ‘소설적으로(예술적으로)’ 드러낸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새의 습격’은 마찬가지로 자연을 침탈하는 인간에 대한 새의 ‘정당한’ 공격을 암시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정신분석의 개념을 이용하여 예술작품이나 대중문화에서 드러나는 이런 그로테스크를 ‘실재(the real)’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문명의 근본기분, 특히 지구적 보편주의가 되어버린 서구적 현대성의 기본적 태도를 의심해 보게 되는 순간, 작품의 그로테스크는 세계의 실재를 드러내는 ‘진리의 장’이 된다. 이것은 서구문화의 기원이자 끊임없는 예술적 영감의 대상이 되었고, 서구적 현대성의 기원이자 반성의 영감이 되기도 한 그리스비극의 탐구주제인 ‘죄-하마르티아(hamartia)’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지도 모른다. 영웅도 인식하지 못한, 그리하여 대부분의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에 대해 지구적 관점을 포괄하는 예술적 통찰의 등장 말이다.
팬데믹 이후 시와 소설과 영화 등 특정 장르적 양상으로 드러난 예술적 그로테스크는 이제 대중 전반에게 뚜렷한 각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그로테스크의 바탕에 있는 실재-존재 체험은 예술작품의 구심점이 되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문명 일반의 근본기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제 그로테스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함의한 특정한 예술 장르의 표현 양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아포칼립스(apochalypsis, Απōκάλυψις)’는 미래사회를 상상하는 SF문학 장르의 지위에서 벗어나, 본래 그 그리스 어원이 지닌 종교적 함의인 ‘은폐를 열기’ ‘가려졌던 것을 드러내기’라는 ‘진리’ 체험을 예술행위와 작품의 근본기분으로 삼는 예술 일반의 모델이 될 것이며, 아포칼립스화된 예술작품은 이 진리를 문명에 고지하는 중요한 임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떠맡게 될 것이다.
‘정서적’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예술적 각성은 작품뿐만 아니라 문명 일반에 ‘불안’이라는 정서가 전면적으로 침투하게 됨을 뜻한다. 바이러스처럼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존재,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갈 수 있으며,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막거나 통제할 수 없으며, 문명을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도 있으나, 분명히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이 전능한 존재는, 결국 고대 예술작품이 의지했던 ‘신적인’ 존재의 21세기 버전이다. 실제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남미 고대문명을 간단히 멸망시키고 그 인류를 멸종시켰던 유럽인들의 몸에 실려 온 바이러스를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은 ‘신의 손’이라고 불렀다. 신적인 존재, 비가시적인 거룩한 존재 체험에 대해 고대인들은 ‘경배’라는 형식의 실천을 통해 예술행위를 출현시켰으나, 이미 휴머니즘을 체득하고 과학·기술을 가진 이 시대의 인간들은 결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를 ‘경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대와 같이 부적으로 그 ‘신적인 존재’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팬데믹을 통해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해체를 경험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지구인’ 존재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를 잃어버린 채 강제로 초역사적 시야를 갖게 된 지구인으로서 인간의 근본기분은 그러므로 ‘불안’이 될 것이다. 무언가 확인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도처에 있다. 예술작품에는 그 존재 체험으로서 불안이 주된 무의식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야말로 어쩌면 휴머니즘에 국한된 협소한 인간윤리가 지구적 시야 또는 우주적 감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의 촉매제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