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악’은 신선한 이름이다. 국악을 둘러싼 실험은 실험을 넘어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추다혜차지스가 스스로를 부르는 ‘사이키델릭 샤머닉 펑크’는 평안도, 제주도, 황해도 굿에서 쓰이는 무가를 바탕으로 한다. 악단광칠, 잠비나이, 이날치밴드, 이희문 등은 한국의 과거라는 시공간적 지역성을 넘어서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스코어가 되고 있다.
연주가, 작곡가, 다방면의 아티스트들이 따로 또 같이 모여 만들어내는 국악의 새로운 현상은 음악인 동시에 공연이며 퍼포먼스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한국 동시대 예술의 가장 산적한 숙제들을 풀어헤치는 메니페스토이며 돌연변이다. 음악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전통 악기들의 소리와 된소리, 거센소리를 활용하는 목소리, 뮤직비디오에서 튀어나오는 호랑이 그림과 어두운 숲속 쭈뼛 솟은 나무 등은 전통 국악을 눈 씻고 새로 보게 한다. 과거에서 튀어나와 이제야 미래의 시간까지 포함하게 된, 국악의 변신은 오늘날 신생아다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것들이 방대한 아카이브에 뒤지고, 움직이는 것들이 비대면의 시스템 안에서 갇혀있는 상황 속에서, 국악을 둘러싼 실험성의 출현은 어떤 장면들을 우리에게 생경하게 가져다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날치, 추다혜, 씽씽 등의 작업을 보며 ‘전통’이라는 거대한 이름 바깥에서 파도처럼 밀려나오는 특정한 이유들을 추측해보고 질문해보기로 하자.
2020년 현재, 국악을 둘러싼 무대는 그 어디보다 새롭게 운동한다. 이 역동하는 운동성의 몇 장면들로 우리는 몇 가지 가장 당대적인 태도들을 살필 수 있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국악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폭 넓은 사운드의 세계를 가진 주체로서 국악이 누구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수행적 예술로 돌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서 말이다.
첫째 협업 방식의 다변화다. 이날치의 네이버 온 스페이스 <범 내려온다> 영상은 현재(9월 말) 유튜브 조회수 320만명을 기록한다. “미쳤다” “짱이다” 같은 감격 사이로 댓글 창에는 여러 구체적인 목소리들도 들린다. “창, 현대무용, 베이스, 드럼이 어디 하나를 몰아주는게 아니라 각자 역활을 동등하게 다 한다. 정말 대단하다! 2020년 잘 된 협업의 상징이다”. 둘째 여성 싱어, 여성적 목소리의 전면적인 등장도 중요하다. 추다혜를 비롯해 시각적인 형상화의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한국어 가사를 읊어내는 이 국악의 수행성은 음악가를 행위예술의 차원으로 적극 둔갑시킨다. 이들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춤추고, 이동한다. 여러 시간대의 중첩으로 가능한 일이다. 셋째 레퍼런스의 무궁무진하며 적극적인 활용이다. 악단광칠의 <영정거리>를 듣다보면 등장하는 삶과 죽음, 묘한 소리들과 장단은 갖은 레퍼런스들에 새로운 ‘속도’를 입힌다. 이날치의 영상은 전통 국악을 실험하면서도 소리, 공연 자체를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흥미롭다’는 말로는 불충분한 긴 시간 사이에 튀어나오는 수궁가, 호랑이, 물고기, 박자와 목소리 등은 모국어의 가장 낯선 시점까지 달려간다. 이 흥겨운 마약은 조선의 클럽 공간을 환기시키는 것을 넘어 협업과 ‘스스로의 것’을 흥미롭게 여기는 시점을 상징하게 되었다.
전통은 동시대 한국 예술에서 어떻게 우리를 가끔씩 놀래키며, 주변을 돌아보게 했을까. 미술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가까운 곳(것)’을 새롭게 보는 눈의 출현과 같이 했다. 최정화, 이불, 정서영, 박이소 등 1990년대 조각과 설치를 둘러싼 재료들 즉 한국의 대량생산된 산업화 시대의 널부러진 재료들(시멘트, 각목, 플라스틱) 등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안목을 개발해내고자 했다. 현재의 질문들을 미학적, 형식적으로 한국의 문제로 동시대화하는 과정에서 예술의 수행성은 다른 장르들과 겹쳐졌다.
한편 1990년대 중후반 홍대 앞의 길거리들에도 ‘서울’에서만 들을 수 있는 리얼한 소리들이 넘쳤다. 1993년 당시 도마뱀 밴드로 활동하던 장영규는 <아릴랄 알라리요>(1993)에서 안은미와 처음 협업했다. 이때 그가 만든 소리에는 바그너의 레퀴엠, 이박사, 팝송, 기계음 등 다방면의 출처를 가진 소리들에서 사이키델릭함과 신명이 동시에 느껴졌다. 장영규의 사운드는 1993년 이래 안무가 안은미의 모든 공연에 함께 했다. 또 2003년 <신춘향>을 공연한 안무가 안은미는 서구 중심의 현대무용에 빠지직 구멍을 냈다. 머리카락 없는 미친년이라는 낡은 비유를 온몸으로 열어젖히는 안은미는 안무 안에서 용, 호랑이, 설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용맹한 몸짓들을 군무와 독무로 구성해내면서 현란한 색채가 넘치는 아시아식 ‘포스트 드라마틱 씨어터’를 선보여 왔다.
1990년대의 동시대 예술에서의 전통은 한국/서울의 매우 ‘구체적인 미감’이었다. 1990년대 한 거리를 조명하는 비디오 푸티지에서 한 여성이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라고 말하는 눈빛과 같이 민족, 민중의 거대한 담론을 떠나 개인의 몸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2008년 출발한 페스티벌 봄에서 2011년 이후 아시아 모더니티를 중심에 두고 한국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과 담론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박민희의 정가 공연, 서현석의 서울을 도보하며 점집 등을 찾아가게 하는 다원적 작업들에 깃든 아시아의 다층적 모더니티(<영혼매춘>, <헤테로토피아>), 리얼리즘적 사운드, 무속 혹은 국악을 전공한 젊은 목소리의 등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통을 예술의 방법론적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넓은 의미의 ‘퍼포머티비티(performativity)’ 즉 수행성은 극장, 미술관, 전시, 공연, 음악회 등의 기존 전제들을 뒤집게 하면서 다양한 방식의 활동성을 자아내는 한 측면이었다. 깨진 도자기 파편을 이어붙이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미술가 이수경이 정마리와 함께 협업 공연을 화이트큐브 전시장에서 벌였던 것(2010년, 아르코미술관)도 상기할 만하다. 가까운 곳에 숨어있던 깜짝 놀래킬 귀신, 도깨비, 수풀 속 새로운 장면들을 찾아내는 힘 속에 가장 당대적인 협업, 여성, 발현의 자세가 함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