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돈화문국악당의 <산조대전>은 ‘어제의 산조’와 ‘오늘의 산조’가 공존하는 시간이다. 어제의 음악을 오늘, 재연(再演)하고 재현(再現)한다. 오늘날 ‘전승’과 ‘창작’으로 양분된 국악계에서 ‘재연’은 전승 계통의 주를 이루는 방법이다. 한편, 음악가들은 이러한 재연을 통해 음악의 유산을 답습하고 배운다. 하지만 머리가 크면 어느 순간 이것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새로운 음악이 몰려 있는 창작의 진영이다. 재연과 재현이, 곧 고리타분한 답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20세기의 국악은 이러한 답습과 창작의 남북 전진기지에서 일궈온 역사다. 이러한 답습의 역사로만 산조 연주를 본다면 <산조대전>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재연(再演)과 재현(再現)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재(再), ‘다시’라는 말이다. 예술의 발전사를 보면, 영감은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의 동사가 되어 있을 때에야 찾아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들추고 읽는다, 놓쳤던 문장이 다시 보인다, 다시 읽는다, 그 문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생각이 오른다, 하여 다시 쓰게 된다, 다시 쓴다. 그리고 ‘다시(再)’ 보여주되, 그것은 예전과 같은 게 아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를 수 있다는 말. 즉 ‘다시’ 나온 색이 원본보다 더 진하다는 뜻이다. 창작음악의 바다에서 오디세이적 여정을 마친 이가, ‘다시’ 산조로 귀향하여, 이 음악을 ‘다시’ 읽고, ‘다시’ 연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산조대전>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면 열전(列傳)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책에는 유파의 갈래들을 만든 예인들의 삶과 음악적 표정이 담겨 있다. 산조가 “명인들의 애환 어린 삶이 투영된 흔적”이라 말한 김해숙의 글을 인용해본다.
“산조는 (…) 생생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리는 인간 중심의 음악이다. 산조에는 경경한 삶의 자세를 바탕으로 해서 화평스럽고 정겨운 생활의 여유나 풍류적 기질, 꿋꿋함, 생활의 응어리, 체념, 비애, 격정 같은 인간 내면의 여러 모습이 선율과 리듬의 역동적 관계에서 “성음의 변화”로 잘 묘사되어 있는데, (…) 명인들은 그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여러 체험들을 예술음악으로 승화시켜 왔으며 일생에 걸쳐 성음을 갈고 닦았다.(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선집 해설지)”
그것을 ‘다시’ 들춰보고, ‘다시’ 읽고, ‘다시’ 더듬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이번 <산조대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