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을

프리뷰 │ 서울남산국악당 [기담야행2: 망혼일 축제]

이단비
발행일2023.08.10

열린 귀문 아래의 망혼 위한 잔치

남산골 밤마실 투어형 공연의 대본을 쓴 정은영 작가와의 대화


서울남산국악당 ‘기담야행2: 망혼일 축제’ │8월 17~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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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이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여름이다. 폭염이 푹푹 사람을 늘어지게 해도 어느 건물이든 들어서는 순간, 오싹하게 차가운 에어컨 공기가 피부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나 오래된 물건들 속에, 동네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만들어지는 전설이 모습을 감추고, 신화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납량특집의 단골손님이었던 귀신들은 빌딩 숲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에어컨 바람 속에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기담야행’이라는 등골 쭈뼛한 단어가 반가웠다. 뒤따라 붙은 ‘망혼일 축제’라는 말속에는 이미 노래하고 춤추는 망자의 모습이 서려 있어서 대체 어떤 공연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다리 돌려줘’라고 절뚝거리며 달려오는 사람이 알고 보면 산삼이었다는 이야기나 한을 품고 죽은 처녀 귀신을 달래준 원님의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것일까. 그런데 뜻밖에도 서울남산국악당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2 :망혼일 축제’의 대본을 쓴 정은영 작가에게서 서늘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정은영 작가
서울남산국악당이 선보일 ‘기담야행2 :망혼일 축제’는 ‘남산골 밤마실 투어형 공연’이라 이름 붙은 콘텐츠다. 이러한 공연의 대본 작업은 처음이지만 정 작가는 이미 뮤지컬과 연희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6년째 종횡무진하고 있다. 그의 이름값을 높인 작품은 재공연을 거듭하며 흥행작으로 자리 잡은 창작뮤지컬 ‘판’이다. 뮤지컬과 전통예술의 연희, 모두에 강점을 갖고 있는 터라 그동안 뮤지컬뿐 아니라 ‘황해도 방앗간’, ‘단골포차’, ‘실험탈춤’, ‘행복한 주택’ 등 꽤 많은 공연의 대본을 써왔다. 무엇보다도 전통예술의 호흡과 즐거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기담야행2: 망혼일 축제’에서도 그 맛을 살렸다. 이번 공연은 관객이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일방적으로 보는 게 형태가 아니고, 어떻게 마음을 열고 참여하느냐 따라 달라지는 공연이라 정 작가는 요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공연일을 기다리고 있다.
 

망혼을 위한 산 자들의 따뜻한 잔치 한 상

“최근 몇 년 동안 좋아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어요. 그게 이 공연의 대본을 쓰는 계기가 됐어요. 공연을 하면 그분들이 오실 것 같았거든요.” 오싹해지는 게 아니라 뜨거워지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게 아니라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귀신, 도깨비, 혼령, 저승이란 단어 안에 어둠과 악의 이미지를 씌우고, 나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존재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령은 우리와 함께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2022년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 공연
2022년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 공연
정은영 작가는 그 혼령들이 이승에서 자신과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 추억을 더듬고, 즐거운 시간을 누리고 갔으면 하는 바람을 이 공연 안에 담았다. 잘 웃고, 잘 놀고, 다시 한번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가야 하는 그곳으로 잘 가기를 바라는 마음. ‘가벼운 마음으로 쓰지는 않았다’는 정은영 작가의 말 안에서 진심의 무게를 느꼈다.
1년에 한 번 귀문이 열리고 구천을 헤매던 혼들이 쏟아져 내려온다는 날, 음력 칠월 보름. 신라시대 때는 망혼일(亡魂日) 혹은 백중날이라고 부르는 이 날에 귀신들을 무사히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망혼일 축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축제는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한 ‘남산골 밤마실’의 모티브가 됐고, ‘기담야행2: 망혼일 축제’ 공연으로 탄생했다.
2022년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 공연
2022년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 공연
2022년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 공연
정은영 작가는 이 공연에 함께 하는 관객들이 잃어버렸던 누군가의 기억을 꺼내고, 그분들을 다시 만나서 즐거운 한판 잔치를 벌이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렇다면 ‘남산골 밤마실 투어형 공연’이라 이름 붙은 이번 공연을 위해 어떤 장치들을 이 안에 숨겨놓았을까.
 

이승과 저승이 혼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체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고 투어하는 형태의 공연이란 점이다. 귀신들과 망혼들을 대접하고 잘 놀게 만드는 주체는 바로 관객 자신이라는 점이다. 각각 구음과 사물, 탈춤을 배우고 직접 공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객석이 아니라 서울남산국악당의 무대 위에서 이 공연을 함께 한다. 객석은 망자들의 자리이다. 체험과 투어, 그리고 공연의 절묘한 조합이다. 물론 함께 하는 배우들이 있다. 각각 망혼일 축제기획팀의 직원들이 되고, 악사와 연희자가 되어 재치 있는 입담과 연기로 관객들을 이끈다.


2022년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 하이라이트 영상 바로가기(YouTube)

‘남산골 밤마실 투어형 공연’이기 때문에 각각의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은영 작가는 이번 공연이 진행되는 서울남산국악당의 구조에 흡족해했다. 서울남산국악당의 바깥마당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앞마당으로 나와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구도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들과 배우들이 어우러져 공연을 올리는 극장 무대 외에 분장실과 연습실, 무대 뒤까지 평소 관객들이 볼 수 없었던 극장의 곳곳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정은영 작가는 ‘공간에 대한 경험’을 이 공연이 갖는 차별점으로 짚었다. 특히 경복궁 교태전의 느낌을 살린 계단식 정원인 ‘침상원’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관객들이 공연장에 온다는 기분보다 한옥이 주는 정취나 매력에 빠지실 거예요.” 작가 자신이 이미 이 공연장에 매료돼서 선뜻 이 공연의 대본을 맡았다는 걸 이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완성되는
여름의 야행

누군가를 놓고 떠나는 자의 망설임과 아쉬움 못지않게 누군가를 잃어본 자들이 슬픔도 이 땅 위에는 남아있다. 이 공연은 정 작가의 손끝에서 그 모든 자가 웃음으로 그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대본으로 탄생했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크게 미치기 때문에 협업은 결국 책임이에요. 작가는 문을 열고 문을 닫아야 하는 사람이죠.” 작가는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과 끝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 압박감이 상당하다고 토로한다. 정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작가는 협업의 제일 첫 문을 여는 열쇠와 마지막 문을 닫는 자물쇠를 들고 있는 문지기’라고 메모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귀문이 열리고 다시 닫힐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자로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관객들은 잃어버린 추억을 찾고, 신화와 전설을 찾고, 떠난 자와 떠나보낸 자는 다시 웃음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공연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이머시브 공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문지기를 맡은 정 작가는 대본으로, 공연으로, 산 자와 망자가 뜨거운 재회 안에 미처 못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꺼내놓은 뒤 시원하게 돌아가는 자리로 만들어내고, 의미 깊은 ‘기담야행’의 서늘함을 그려낼 것이다.
이단비
KBS, SBS, YTN, MBC 등에서 시사교양과 문화예술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공연예술 다큐멘터리 제작, 공연 대본, 무용 칼럼 등의 집필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발레, 무도에의 권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