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겨울

프리뷰|서울돈화문국악당 [서울소리:잡가雜歌]

김혜정
발행일2023.11.21

잡가(雜歌). 개방성과 다양성,
포용을 노래하다

 
잡가(雜歌)라는 말을 ‘양반음악’이라 불리는 정가(正歌)의 대칭어로 설명하자면 기분이 나쁘다. 21세기에 웬 신분 문제란 말인가?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잡가를 ‘신분 해방’시키면 새로운 국면이 보인다. 오롯이 잡가에 대해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잡가는 잡다한 노래들이다. 다양한 노래를 모두 끌어 포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느리게 부르면 긴잡가, 빠르게 휘몰아치면 휘모리잡가, 이 두 가지에도 들지 못한 더 잡다한 잡잡가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잡가에 든다. 한때 신분의 문제 운운하며 정가에 들지 못했고, 심지어 긴잡가 안에서도 8잡가와 잡잡가를 구분하는 경계 세우기, 무리 짓기, 나누기에 급급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상이 되었고, 잡가는 그것을 대표하는 갈래인 셈이다. 잡다한 다양성을 특징으로 삼은 잡가를 새롭게 바라볼 때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이 기획한 양일간의 <서울소리:잡가雜歌>(예술감독 강효주)는 이러한 잡가의 역사와 매력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다.
 

서민의 꿈과
삶의 감각이 스며든 옛날 노래

한반도에 공연예술음악이 꽃피기 시작한 시점은 17-18세기 무렵으로 본다. 공연예술의 하나인 음악은 공연을 팔아 먹고사는 음악가가 있고 이것을 사서 즐기는 향유자가 있어야 성립 가능한 갈래다. 그래서 음악은 아무 곳에서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자유가 있는 곳에서 문화적 향유의 욕구가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큰 도시, 큰 시장, 인구가 많고 돈이 많은 지역에서 공연예술이 활발히 꽃을 피웠다. 서울은 조선 시대부터 가장 많은 인구와 돈이 있던 수도이다. 조선 후기 음악이 꽃피었을 때 서울 사람들은 어떤 음악을 즐겼고, 공연을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내놓았을까?
신분 사회였던 조선 시대 사람들은 상류층이 즐기던 음악을 지향하는 태도와 좀 더 자극적이고 대중성이 강한 음악을 즐기는 두 가지 양면성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전자의 방향성이 가사와 가곡, 시조 같은 정가(正歌)로 향했다면, 후자의 끝 언저리에 사당패소리가 자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잡가에는 위의 두 가지 양면성이 함께 담겨 있다. 잡가는 19세기 말 사계축 소리꾼들에 의해 크게 유행했다. 사계축이란 현재의 용산구 청파동 주변을 이른다. 이 지역은 세곡 운송의 중심지였고, 도시에 공급하는 농작물인 채소를 집중적으로 가꾸거나 수공업을 담당했던 지역이었다. 유명한 잡가 소리꾼 조기준은 갓을 만드는 이었고, 박춘경은 밭을 가는 농부였다. 채소 공급이 없는 겨울 한 철 채소 보관용 움집에서 소리를 부르고 놀았던 전통이 잡가의 시작이었다. 보통의 서울 사람들이 이 음악을 만들고 이끌던 것이었다. 그리고 잡가는 그들이 꿈꾸었던 상층 지향과 대중예술적 취향이 녹아 있는 서울의 소리이다.
 

양일에 걸쳐 선보일 잡가의 세계

‘긴잡가’는 한배가 길어서 긴잡가이다. 앉아 부르므로 좌창, 12곡이 있어 12잡가로 부르기도 한다. 긴잡가를 앉아서 부른다는 것은 앉아 부르는 양반음악을 벤치마킹한 결과이기도 하고, 겨울철 움집에서 듣고 즐기던 공간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양반음악의 가사와 유사하지만, 판소리의 가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는 점에서 보다 대중적이기도 하다. 음악에 있어서는 정적이고 긴 호흡에 고른 발성을 추구하여 듣는 이도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지식인들의 정서적 지향이 남아 있다. 11월 25일 공연에 오르는 소춘향가(최수안), 제비가(최주연), 적벽가(최주연·성슬기·최수안), 26일 공연에 불릴 선유가(견두리), 유산가(김민지), 출인가(최정아), 이렇게 여섯 곡이 ‘긴잡가’에 속한다.
최주연(소리)
성슬기(소리)
최수안(소리)
‘휘모리잡가’는 한배가 휘몰아치므로 휘모리잡가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듣는 대중음악의 빠르기와 비교하면 한참 느리다. 휘모리잡가의 휘모리는 음악의 빠르기보다는 노랫말이 붙여진 모양새에 대한 표현이다. 그래서 노랫말이 촘촘히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해학적인 가사가 운율에 맞게 노래된다. 노랫말이 주는 해학성과 가락에 얹혀 불리는 ‘말맛’이 좋은 갈래이다. 25일 공연의 바위타령(최주연·성슬기·최주안), 26일 공연의 만학천봉·육칠월 흐린 날(최정아·견두리·김민지)이 ‘휘모리잡가’에 든다.
‘잡잡가’는 긴잡가와 휘모리잡가에 들지 않지만, 민요보다는 더 긴 형식을 갖는 노래다. 반복적인 선율은 민요와 유사하나, 악곡의 길이가 정해져 있는 닫힌 구조이며, 장가(長歌_길이가 긴 노래)에 속하므로 잡가로 구분한다. 긴잡가에 비해 음악적으로 단순한 경우가 많다. 25일 공연의 풍등가와 금강산타령(최주연·성슬기·최수안), 26일에 선보일 국문뒤풀이와 장기타령(최정아·견두리·김민지), 이렇게 네 곡이 ‘잡잡가’로 분류되는 곡이다.
최정아(소리)
견두리(소리)
김민지(소리)

음악사의 뒤안길에서 만날
잡가의 또 다른 세계

이번 공연에는 서울 잡가 외 세 곡이 더 노래된다. ‘푸른산중하에’(성슬기)는 엮음지름시조 또는 수잡가라 부르는데, 시조와 잡가가 섞인 형태이다. ‘제전’(최정아·견두리·김민지)은 잡가이지만 서도 좌창으로 분류되며, 노랫가락은 민요로 본다. 노랫가락에 붙은 ‘노래’는 시조를 뜻한다. 과거에는 ‘노래’의 의미가 고정된 형식의 악곡을 뜻했으므로 민요는 ‘소리’라 지칭됐고, 시조나 가곡을 ‘노래’라 했다. 그래서 시조를 노래하는 민요인 이 곡을 ‘노랫가락’이라 부른 것이다. 특히 경기 잡가에는 노랫가락 선율로 종지 하는 것들이 더러 있어 잡가와의 연이 깊다. 이번 공연에 서울 잡가 외 세 곡이 더 불리지만 결국은 다 연결되는 악곡들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 잡가의 확장과 포용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번 공연은 과거의 서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발성과 음색을 기반으로 긴잡가에서는 고운 목과 정제된 소리를, 휘모리잡가에서 노랫말의 해학과 말맛을, 그리고 잡잡가는 친숙한 선율과 호흡으로 만날 수 있다. 한 겨울 움집에서 열렸을 잡가 소리판의 낭만을 떠올리고, 서울 사람들의 미적 취향을 음미해 보자.
김혜정
경인교육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로, 민요·잡가·판소리·무가 등 민속음악 전반과 국악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 「민요의 채보와 해석」, 논문 「경기민요의 장르적 구분과 음악적 특성」 등이 있으며, 서울시문화재위원, 한국민요학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