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르네상스, 요즘 상황을 보면 이 말로는 부족할 정도입니다. 2019년 한 종편의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성공 이후 새로 뽑힌 신인 트로트 스타들은 종편을 넘어 지상파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광고까지 휩쓸고 있으니까요.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트로트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양식입니다. 1910년대 일본 엔카가 번안되어 불렸고, 1930년 전후에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트로트가 등장합니다. 한국대중가요사의 어느 양식도, 트로트만큼 길고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한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은 100세를 살기 힘들고 트로트의 100년 역사도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과연 100년 동안 이어온 트로트는 원래 어땠으며 얼마나 변한 걸까요? 누구나 쉽고 편하게 즐기는 양식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편하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대상일수록, 마치 ‘허당’처럼 모르는 구석 투성이인 경우가 많죠. 이 자리에서 몇 가지를 짚어볼까요?
너무도 당연히 그럴 것 같죠? 1930년대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도 당연히 40대 이상의 중·노년층이 좋아했으리라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1930년대의 트로트는 10대 청소년들의 노래였습니다. 놀랍죠?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런 노래들을 10대 청소년들이 좋아했다는 게 마음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느낌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따져보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에요.
트로트는 1930년대에 아주 낯설고 새로운 음악이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죠. 대중가요사에서 새로운 양식의 유행을 대도시의 15세 전후한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기성세대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따라 하기 힘들었고 술자리에서도 민요나 시조를 부르면서 노는 세대였거든요. 그러니 국악과 이질적인 트로트는 아주 낯설고 불편했을 겁니다. 당시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트로트에 대해, 기성세대는 ‘저것도 노래냐?’라고 비난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역시 틀린 생각입니다. 1930년대에 청소년들에게 어필한 새로운 양식이었던 트로트는, 당시로서는 아주 세련된 대도시의 고학력 청소년이었으니까요.
트로트는 일본 유행가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노래였고,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 일본은 ‘세련된 선진국’이었습니다. 선진국의 대중문화는 늘 대도시의 고학력자들이 가장 먼저 받아들이지요. 유학 경험이 있고 일본어가 유창한 사람들이 주도했습니다. 당연히 트로트는 대도시 중산층 고학력 청소년이 유행을 주도했죠.
트로트가 ‘촌스러운’ 음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였습니다. 이미 30년 동안 많이 대중화되어 대도시 청소년이 아닌 시골의 중년들까지도 트로트를 즐길 수 있게 됐거든요. 게다가 대도시 청소년들은, 트로트가 아닌 새로운 유행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광복 후에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노래들이 새로운 최첨단으로 부상했죠. 1960년대가 되면 스탠더드팝이라 통칭되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맨발의 청춘> 같은 미국 분위기의 새로운 노래들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런 ‘양풍(洋風)’의 노래들에 비해 트로트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노래였고, 시골의 저학력의 사람들도 다 즐기는 노래가 됐습니다. 트로트가 ‘촌’스럽다는 인식은 1960년대부터였고, 이후 점점 심해졌습니다.
좀 설명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합니다만, 저는 트로트의 깊은 비애감은 판소리나 민요 등이 지니고 있던 비애감과는 다소 다르다고 보는 편입니다. 트로트의 비애는 신파적인 비애감이며, 오로지 슬픔으로 끝장을 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판소리나 민요 속의 비애와 정한은, 슬픔에서 신명으로 절묘하게 오가는 맛이 있죠.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들이 정처 없는 길을 가며 구슬프게 <진도아리랑>을 부르다가, 신명 난 가락으로 바뀌는 것처럼요. 트로트의 신파적 비애감에는 이렇게 슬픔과 신명이 뒤섞인 감정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즐기는 트로트는 정한과 신명이 뒤섞여 있고 오히려 슬픔보다는 신나고 해학적인 트로트가 더 많지요. 1960년대까지 트로트가 그저 축축 처지는 청승스러운 노래였던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트로트가, 애초에 뿌리를 둔 일본 엔카에서 벗어나, 이제 감수성까지도 완전히 토착화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트로트는 90년 동안 많이 변해왔습니다. 1930년대에는 여자가수만 조금 꺾음목을 쓰고 남자가수는 전혀 쓰지 않습니다. 1960년대에는 스탠더드팝의 영향을 받아 이미자부터 남진에 이르기까지 모두 꺾는소리는 사용하지 않지요. 오로지 1970년대의 나훈아가 꺾음목을 쓰는데, 오랫동안 이런 창법은 주류가 아니었어요. 1970년대 후반에 최헌과 윤수일 등, 록과 트로트를 결합한 노래들이 유행하는데, 나훈아 스타일의 꺾음목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주현미에 이르러 꺾음목이 다시 유행합니다. 1930년대에는 꺾는소리가 애절함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주현미에 이르면서 애절함은 사라지고 교태스러움과 기교적 화려함이 두드러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도 특성입니다.
이 영향이 워낙 강력해서 오랫동안 꺾음목을 다소 과하게 사용하는 가수들이 트로트를 주도하기는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다시 창법이 다양해지는 양상입니다. 여전히 꺾음목을 많이 쓰는 가수도 있지만, 송가인처럼 판소리 창법을 바탕으로 꺾음목은 자제하는 창법도 있고, 임영웅처럼 스탠더드팝 영향을 많이 받은 1960년대 남진 스타일의 창법을 이어받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트로트는 계속 변해왔습니다. 도쿄·오사카 젊은이들과 어깨를 겨루던 ‘모던 경성’의 세련되고 젊은 유행가에서, 이제 중노년이 ‘망가짐’을 불사하고 신명 나게 놀 때 부르는 노래로 바뀌었으니까요. 앞으로 트로트는 또 어떻게 바뀔지 자못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