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선 충무로역에서 기다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올라오면 ‘충무로 영화의 길’이란 글씨와 함께 여러 영화인들의 그림과 사진, 포스터 그리고 대종상에 대한 조형물과 사진들이 장식되어 있다. ‘영화=충무로, 충무로=영화’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을 증명하듯 다양한 영화적 상징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영화를 대표하는 상인 ‘대종상’을 상징하는 각종 조형물들이 충무로역에 꾸며진 까닭은 무엇이며, 또한 그 의미는 뭘까? 그것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6.25전쟁이 휴전되고 한국의 영화산업은 명동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사실 명동은 영화뿐 아니라 문학, 미술 등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 자신의 예술 세계를 뽐내고 토론하고 뜨거운 예술혼을 불사르는 곳이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다방에 모여 예술을 논하고, 때론 의견이 상충하며 불같이 대립하기도 했고,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어깨를 함께 했던 곳이다. 갈채, 엠블레스, 청동, 나일구, 연, 코지코너 등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다방들이 즐비했고, 20여 개의 영화제작사 사무실이 명동에 자리했다. 현재 로얄호텔 부근과 내무부가 있었던 외환은행 본점 자리, 국립극장이 있었던 명도예술극장 인근이 그곳이다. 한국영화사에 빛나는 흥행을 기록했던 1955년의 영화 <춘향전>(감독 이규환)이 명동에서 탄생했고, 수많은 연기자와 영화인들이 명동에 모여 각자의 몫을 해내며 영화산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젊은이들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고 서울의 멋쟁이들이 명동에 모이며 보다 차분하게 영화제작에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찾기 힘들게 된다. 최근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서울 시민과 서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거리가 그득한 서울의 최고 번화가인 명동이 그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번잡해진 거리를 피해 조금씩 영화 제작사들이 인근의 충무로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1961년에서 1963년 사이 많은 영화사들이 충무로로 옮겨간다. 또한 충무로 3가에는 스타다방이 생겨 여러 배우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고, 촬영 일정을 조정하거나 촬영이 없는 연기자들은 청맥다방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명동의 다방’과 ‘충무로의 다방’에는 차이가 있었다. 명동은 예술을 논쟁하고 자신의 작품을 얘기하며 문화의 꽃을 피운 것과 달리 당시 충무로의 그곳은 인력을 공급하고 수요를 충족시키는 이른바 ‘(영화산업)인력시장’의 몫을 했고 다방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영화인들이 모여 추억하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많은 영화인들은 충무로에 모여 자신의 영화세계를 꿈꿨고 여럿이 함께 그들의 영화작품들을 만들었다. 필자도 90년대 후반까지 이곳에서 여러 원로 영화인들에게 귀동냥을 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크고 작은 다양한 작품의 산실이었던 다방이 다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방과 함께 영화인들의 먹거리와 숙박을 책임지던 곳도 있다. ‘동신여관에 투숙하지 않은 사람은 영화인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여러 일화를 남긴 곳이 ‘동신여관’이다. 이곳에서 밤새 시나리오를 쓰고, 다음 날 아침 ‘청맥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나리오를 검토했다고 한다. 특히 밥이 맛있었다는 이곳은 충무로 119안전센터 뒷골목으로 현재 해봉빌딩이 들어서 있다. 지금 충무로2길의 ‘황소집’과 ‘보은집’은 촬영을 떠나는 영화인들에게 새벽에 맛난 식사를 제공해주는 식당으로 유명했다. 영화인들이 찾던 조금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나 고깃집으로 ‘진고개’와 ‘대림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옛날 ‘스카라극장’이 있었던 아시아미디어타워 인근의 진고개는 지금도 여전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으며, 대한극장 맞은편의 50년 전통의 ‘대림정’은 ‘오발탄’으로 바뀌고 2,3층의 임대표지가 붙어 있어 보고 있자니 안타까움이 인다. 이곳 이외에도 영화인들이 이용하던 백반집으로 부산복집, 서울뚝배기, 뚱보식당(돼지갈비) 등이 남아있다.
1960년대부터 영화제작의 중심을 이뤘던 충무로는 1986년 영화사법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며 큰 변화를 일으킨다. 당시 20여 개였던 제작사가 130여 개로 늘었고, 그 중 100여 개가 충무로에 집중해 설립된다. 이들은 제작과 흥행에 성공하며 강남 등지로 이사하기도 하거나 흥행해 실패해 야반도주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2000년을 전후에 많은 영화사들이 충무로를 떠나게 되지만 그래도 굵직한 영화사들이 2000년대에 충무로에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춘연 대표의 씨네 2000, 강우석 감독이 이끌던 시네마서비스, 실미도를 제작한 김형준 대표의 한맥영화사를 비롯해 좋은 영화사, 감독의 집, 필름 매니아 등이 흥국빌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에 ‘코끼리볼링장’이 있어 영화인들에겐 ‘코끼리빌딩’이라 불리며 젊은 영화인들이 제작사로 입주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영화 <왕의 남자>를 연출해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이준익 감독의 영화사 ‘씨네월드’는 중부경찰서 맞은편 영한빌딩에 있었다. 이곳에는 영화홍보사 ‘영화인’ 등 영화 관련 업체가 다수 입주해 있었다. 충무로뿐 아니라 필동으로 남산 인근에 여러 영화 관련 사무실이 입주하기도 했는데, 영화 <신과 함께>를 제작한 ‘리얼라이즈픽쳐스’가 얼마 전 11년간의 필동 생활을 마치고 강남으로 이주한다며 원동연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마지막 기념 촬영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영화사가 많았던 만큼 충무로 인근에는 필름대리점과 현상소, 인쇄소, 장비 대여점 등 영화 관련 사무실들이 많이 있었고. 요즘은 카메라나 영상장비 가게들이 또다시 들어서고 있다.
극동빌딩 옆길은 김지미, 문희, 남정임, 윤정희, 전계현 등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여배우를 기념해 ‘은막길’로 명명해 은막의 여왕을 기리고 있으나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워 찾는 이에게 쓸쓸함을 전한다. 하지만 명보극장 오거리에는 “전통에 빛나는 그 얼이 이 거리에 영원하리...”라고 새겨진 2004년 제41회 대종상을 개최하며 한국영화인협회에서 제작한 조형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높이 4.5미터, 무게 4.4톤의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 조형물은 대종상과 더불어 충무로 영화의 거리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됐다.
충무로에 대한 많은 흔적들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영화의 내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충무로역이다. 지하 1층에 꾸며진 대종상 관련 시설과 독립영화인과 영화에 관심 많은 관객들을 위한 아카이브를 겸한 시설인 충무로영상센터 ‘오! 재미동’이 있다. 이곳을 찾아 영화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 또한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이 있었던 곳은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충무로영상센터’로 활용하고 있어 영화에 대한 꿈을 꾸는 많은 영화학도들에게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해주고 있다.
지난해부터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인해 크게 위축돼 있다. 특히 영화산업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크고 다양하다. 코로나 공포로 극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OTT의 출현은 더욱 관객들을 스크린으로부터 거리 두게 했고, 흥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개봉 연기 또는 OTT로의 매각 등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철저한 방역수칙 이행과 함께 <모가디슈> 등의 흥행작이 개봉하며 관객들은 조금씩 영화관을 찾게 됐고 영화산업계도 활기를 되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사라져 얼마 남지 않은 영화산업의 흔적이지만 충무로의 곳곳을 누비고, 인근의 극장에서 안전하게 영화 한 편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코로나 펜데믹 시대의 새로운 추억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21세기를 즐기는 우리들의 알찬 순간들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