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충무로역 8번 출구로 나와 영화거리와 인쇄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건물 사이 시장 입구에 작게 설치된 인현시장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입구를 지나 직선으로 길게 뻗어진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한 건물 외벽에 ‘인연이 있는 인현시장’이라는 글귀의 네온사인이 걸려 있다. 기존에 인현시장은 충무로 방향에서 들어가는 입구와 을지로 방향에서 들어가는 입구 각각 두 곳에 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6년 인현시장 내 빈 점포를 활용한 시장 활성화와 청년 창업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으로 ‘인현시장 청년상인 모집’을 시작했고, 이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인현시장을 더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오래된 간판을 변경한 것이다.
시장이라고 하기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인현시장은 그동안 저렴하고 맛있는 안주로 주변 주민들과 도심 직장인들이 퇴근 후 즐겨 찾는 곳으로 자리 잡았고, 오랜 단골손님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골목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2016년 무렵부터 인현시장에 젊은 청년상인들이 들어온 이후로 인현시장은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고, 현재는 SNS에서 ‘충무로 맛집’, ‘7080 뉴트로’로 떠오르며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까지 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그리 저렴하지 않은 임대료와 주변 상권의 열악함으로 인해 2016년에 들어왔던 기존 청년상인 중 일부는 문을 닫은 상태이다.
그간 남산골한옥마을에서는 여러 형태의 야외 행사를 진행하면서 주변 상인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한옥마을이 위치한 퇴계로와 서애로 주변의 상인들은 짧게는 1회에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분들이 있다. 주로 참여하는 분야는 음식이 많다. 하지만 시장은 연결 짓기 어려운 공간 중 하나로, 도소매 업종이 많아 직접 제작한 상품 혹은 조리한 음식을 파는 행사의 취지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인현시장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발길을 이끌지 않을 수 없었다.
직진으로 쭉 이어진 좁은 골목길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청년상인’ 사업 모집으로 인현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년가게 4호 ‘서울 털보’다. 이곳에 들어선 청년가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사 공간이라 그런지 새삼 특별하게 느껴졌다. 재활용품을 활용한 인테리어 소품을 비롯하여 낡은 테이블과 의자도 제각기여서 뉴트로(New-tro)한 분위기를 내는 이곳은 낮에는 밥집, 저녁에는 술집이 된다.
‘서울-털보’의 트레이드 마크는 바로 털보 사장님이다. 그는 힙한 벙거지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간판에서부터 냅킨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하고 있는데, 신기할 정도로 실제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간판과 캐릭터 등 모든 디자인과 인테리어를 직접 도맡아 했다고 하니, 공대생 출신인 그의 센스가 새삼 돋보인다.
오픈하고서 초반에는 자리 잡기에 참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인현시장이 잘 알려진 곳도 아니었고, 위치상 접근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지금까지 서울-털보는 스스로 멋지게 자생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시장이라는 공간 특성상 서울-털보의 개성과 스타일을 고려하지 않고 대하는 어려운 손님도 많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공간을 꾸려간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지금까지 운영해왔기에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임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SNS 홍보를 통해 자생력을 키워온 서울-털보는 크림 카레나 옛날 통닭 느낌의 치킨 등을 메뉴에 올리면서 인현시장 인근 식당 중 2-30대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는 식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인근의 을지로에서 ‘깊은 못’이라는 와인바도 함께 운영하는 그는 이곳 간판에 ‘문화공간’이라고 명시했듯이, 전시, 공연, 플리마켓 등을 그의 공간들에서(서울-털보&깊은 못)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seoul_tulbo/)
평소 남산골한옥마을에 알고 있거나 들은 적이 있는지도 조심스레 물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알고 있다고 답했다. ‘야시장’이나 ‘변신술’에 참여할 의향도 있다는 감사한 답변도 받았다. 특히 저녁에 판매하는 타파스를 판매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타파스는 스페인에서 식사 전에 술과 곁들여 간단히 먹는 소량의 음식을 이르는 말이다. 한 조각으로 판매가 가능한 타파스와 베이커리류는 포장하기가 간편해 판매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주인 부부의 앞으로의 바람이라면, 인현시장 초입에 위치해 주변 상권이 그리 좋지는 않아 걱정이 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자리를 잡은 이상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 시기가 시기인지라 모임을 최소화하는 분위기이지만, 소규모 대관도 가능하니 작은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방문해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https://www.instagram.com/317b_bakery/)
가게를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건 주인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터를 잡게 됐을지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인현시장과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가게를 내기 위해 을지로 쪽 이곳저곳을 다녀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별다르게 간판을 노출할 것도 아니어서, 고민하던 두 곳 중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공간이 주는 특색과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크게 홍보에 애를 쓰지 않았는데도 SNS를 통해 손님들이 예약하고 찾아온다고 한다.
이곳을 각인시켜주는 반전의 역할을 하는 샹들리에의 경우, 함께 운영하는 친구와 조립한 DIY의 결과물이라고 하니 놀라웠다. 입구의 교통표지판 이미지 역시 실제 교통표지판에 대한 말 그대로의 ‘페이크’ 아닌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게 이름은 이곳의 메뉴들과도 연관이 깊다. 말하자면 이곳의 음식들이 실제 외국에서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수준 높은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만의 ‘fake’를 만들고 싶어요.”라는 주인의 말처럼, 단순히 따라 하는 요리가 아닌 독창적인 요리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담겨있다.
서로 하는 일이 달랐지만,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시작한 지 1주년이 된 페이크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제 인현시장의 몇몇 상인 분들과는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있는 만큼 서로에게 더욱 더 익숙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원래 홍대 상수역 인근에서 13년간 LP바 ‘동감상련’을 운영하던 주인은 이곳 인현시장으로 옮겨온 지 7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여기에 좀 더 빨리 자리 잡았어도 좋았을 것 같다고 웃으며 얘기했는데, 언젠가 한 번쯤은 서울의 중심에서 바를 운영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현재 이곳 ‘롱굿바’에는 기존 ‘동감상련’을 찾던 단골손님들이 여전히 찾아오고, 충무로 인근의 직장인들이 우연히 찾아 들어오며 꾸준히 손님들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롱굿바’라는 이름은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Looking For Mr. Goodbar)>(1977)라는 영화 제목에서 따왔으며, 간판에는 “몽상가씨의 이상한 술집”이라는 글귀가 함께 붙어 있다. 이는 바를 운영하지만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주인의 몽상가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견습 DJ로 활동했다는 주인은 ‘음악다방 DJ’의 끝 세대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과 할 줄 아는 일이 이것뿐이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충분히 느껴졌다. 신청곡에 응해 LP든 유튜브든 최고의 음원을 들려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남자 주인공이 낯선 동네에서 길을 헤매다 시공간을 넘어 ‘애정하는’ 작가 헤밍웨이를 만난 것처럼, 인현시장 속 코너를 돌아 마주하는 조그마한 공간에서 살아본 적 없는 1980년대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https://www.instagram.com/long_good_b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