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 6호   山:門 HISTORY

역병의 시대, 근대를 다시 보다

전우용_역사학자
발행일2021.05.11

역사적으로 인류는 역병에 어떻게 대처해왔을까. 물론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제의나 굿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보인다. 신라 설화에서 비롯된 처용무는 역병 퇴치를 기원하기 위한 춤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예술의 영역이 주로 그것을 다뤄왔다면, 근대에 들어서 의학 기술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의료 혜택이 도입되는 한편, 역병이 창궐할수록 식민시대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차별과 혐오는 뿌리 깊어진다. 그때를 돌아볼수록 지금처럼 ‘코로나19’와 1년 넘게 싸우고 있는 상황을 더욱 떠올려보게 된다.

인류를 위협하는 인수공통 감염병

생명체 탄생과 진화의 긴 역사에서 보자면, 바이러스, 박테리아, 세균, 기생충 등은 인류보다 먼저 출현했다. 어떤 경위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일부 미생물과 기생충은 인류 탄생과 거의 동시에 인간의 몸 안팎에 서식하면서 인간과 함께 진화했다. 수십만 년에 걸쳐 인간과 공존하면서, 이것들 중 일부는 인간의 면역 체계에 동화(同化)했고 다른 일부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식물의 기원이라고 불리는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eria). 단세포지만 35억년이 넘는 가장 오래된 화석에서도 발견되며, 지구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번성한 주요 세균이다. 출처: KBS 특선다큐 <지구의 어머니> 제1편 도전 (BBC 원제 How to grow a Planet, 2012년)
예컨대 유산균이나 대장균은 인간의 몸에서 일정 밀도 이상으로 증식하기 전에는 소화 기능에 도움을 준다. 무균(無菌) 상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적당량의 박테리아와 세균이 몸 안에 있어야 건강하다. 감기 바이러스조차도 인간에게 ‘쉴 때’를 알려주어 과로를 방지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반면 피부에 기생하는 진드기, 이, 벼룩 등과 내장에 기생하는 각종 기생충은 계속해서 인간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하는 생명체도 죽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생명체가 면역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존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제임스 길레이, <우두(Cow Pock)> ⓒ 위키피디아. 1802년 에드워드 제너의 종두법을 둘러싼 논란을 보여주는 만화로, 우두를 이용한 종두 백신 때문에 환자들이 소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류가 치명적인 미생물들에게 공격받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 가축을 기르면서부터였다. 현생인류가 20만 년 전에 출현했으니, 인류 역사 전체로 보자면 아주 가까운 과거에 해당한다. 인류가 소, 말, 개, 돼지 등과 동거함에 따라 이들 동물에 기생하던 미생물들이 인간의 몸을 공격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인수공통(人獸共通) 감염병’들이 생겨난 것이다. 가축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는 병원체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본식 용어 천연두(天然痘)로 알려진 두창(痘瘡, smallpox)이다. 두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살해한 ‘살인마’였다. 소는 두창균에 감염되어도 가볍게 앓고 말았지만, 인간은 2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병을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 반 정도의 얼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다. 치사율 20% 이상은 그나마 수천 년 간 소와 사람이 동거했던 지역에만 해당했다. 소가 살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유럽에서 소가 들어간 지 수십 년 사이에 원주민 인구의 90% 가까이가 두창으로 사망했다.

종두기계, 케이스 12×8×3cm, 종두침 길이 9.5cm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 시술에 쓰였던 도구이다. 종두기계는 종두침과 종두액, 두장판 등이 한 세트로 구성된다. 시술할 때는 두장판에 종두액을 떨어뜨리고 두장판 위의 종두액을 종두침에 묻힌 다음 종두침으로 피부에 상처를 내어 종두액을 묻히는 방법으로 접종하였다. 이 소장품은 우리나라 종두법 보급에 앞장섰던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이다.

호랑이 발톱에 찢기듯 아픈

인간 집단 사이의 교류는 병원체의 교류이기도 했다. 11-13세기에 걸친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서남아시아의 풍토병이었던 한센병이 유럽에 퍼졌다. 14세기에는 몽골군의 유럽 침공으로 인해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대신 매독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대항해시대’ 병원체 교류의 여파는 우리나라에도 미쳤다. 우리나라에 매독이 처음 들어온 것은 1500년대 초로 추정된다. 1614년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이 병이 명나라 정덕(正德, 1505-1521) 연간에 들어왔다고 기록했다. 조선인 대다수가 유럽인이나 아메리카인과 접촉하기는커녕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에 질병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흑사병에 감염돼 참화를 겪는 십자군을 표현한 판화. 프랑스 출신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나일강의 십자군> ⓒ Wikimedia Commons

대항해시대 이후 지구 전역에서 인간의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감염병도 세계 도처로 확산했다. 매독 이후 세계인을 공포에 떨게 했던 질병은 콜레라였다. 인도 북부 펀자브 일대의 풍토병이었던 콜레라는 18세기부터 동인도회사의 영국인 직원들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했다. 이 감염병은 1820년 경 우리나라에도 도달했다. 중국인들은 이 질병을 ‘호열자(虎列刺)’로 번역했는데, 중국어 발음이 콜레라와 비슷했던 데다가 증상도 ‘호랑이 발톱에 찢기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콜레라는 1820년대 초 처음 발병한 이래 대체로 10년마다 한 차례씩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콜레라가 한 번 창궐할 때마다 전국적으로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911년 콜레라 대유행 때에는 서울에서만 1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5만 명이었다. 서울 인구의 4%가 콜레라에 희생된 셈이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우리 속담이 생긴 것도 19세기로 추정된다. 마마와 함께 거론되는 호환은 ‘호랑이에게 물린다’는 본래 뜻이 아니라 ‘호열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1886년 5월 20일, 조선정부는 ‘불허온역진항장정(不許瘟疫進港章程)’을 제정, 공포했다. ‘역병 환자가 승선한 선박은 항구에 진입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항만 검역 법규였다. 2013년 한국 정부는 이를 기념해 5월 20일을 ‘검역의 날’로 정했다. 조선 정부는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시행한 검역 제도를 본떠 온역장정을 제정했지만, 뜻대로 시행하지는 못했다. 우선 외국인들이 인정할 정도의 근대 의학 지식을 갖춘 의사가 없었다. 게다가 불평등조약 체제하에서 외국 국적 선박 승선원들은 조선의 법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하지만 역병이 ‘세계화’하는 이상, 역병 대처도 ‘세계화’할 수밖에 없었다. 

1880년대 말 인천해관에서 제작한 인천항 지도. 출처: “조선해관의 검역체계 구축과 감염병 해외유입에 대한 대응(1886~1893)”, <의사학> 제29권 제3호(통권 제66호) 2020년 12월호, 대한의사학회
1894년 내무아문 산하에 위생국이 설치되었고, 1899년에는 ‘전염병 예방규칙’과 ‘검역정선규칙(檢疫停船規則)’ 등이 제정되었다. 두창,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 디프테리아의 6종 전염병이 ‘법정 전염병’으로 규정되었고, 이들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탑승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은 검역이 완료될 때까지 항만에서 대기해야 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조선 항구에서 일본 선박에 대한 항만 검역은 중단되었다. 반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선박들은 검역 대상이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원주민인 조선인들을 병균과 비슷한 존재로 취급했다.
군산항에서의 선박 검역 광경, 1920, 출처: 프레시안

스페인 독감 유행 중 일어난 3.1운동

1918년 겨울,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럽에서 귀환하는 각국 군대를 따라 전 세계로 확산한 독감은 1920년 중반까지 2년 간 엄청난 피해를 냈다. 인류의 3분의 1 이상이 감염됐고, 감염자의 10% 이상이 사망했다.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려우나, 학자들은 최소 3천만, 최대 1억 명 정도가 이 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피해 규모가 14세기 유럽에 창궐했던 페스트보다 커서 이를 ‘의학적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이 질병이 확산하기 시작했을 때 참전 각국의 언론은 ‘전시 보도통제’ 하에 있었다. 그 때문에 질병 확산에 관한 소식은 비(非) 참전국이었던 스페인 신문에 주로 보도되었다. 이 질병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에드바르 뭉크, <스페인 독감 후의 자화상(Self-portrait after the Spanish Flu)>, 1919 ⓒ Nasjonalmuseet/Høstland, Børre.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폭발한 세계적인 대유행병 스페인 독감은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허무주의와 묵시적인 세계관을 강화하게 된다. 뭉크는 1919년 스페인 독감을 앓고 있던 중 자화상을 여러 점 그렸다.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뭉크는 생존했다. 살아남은 자로서 뭉크는 질병과 고통, 절망과 고독에 싸우는 공포와 고독감을 화폭에 담았다.
1918년 초겨울에는 우리나라에도 일본을 통해 이 독감 바이러스가 전파되었다. 당시 가톨릭 교단에서 발행하던 잡지 <경향>은 이를 ‘인플루엔자’라고 소개했다. 한국인 절대다수가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모르던 때였다. 당연히 조선총독부도 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 통계를 내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예에 비추어 보면 조선 내 감염자 700만 명 이상, 사망자 2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외부, 특히 일본에서 유입된 질병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조선총독부는 항만 검역을 특별히 강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일본인의 이익이 조선인의 생명보다 중요했다. 인플루엔자가 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질병이 당시 사람들의 심리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검역소 ⓒ국립중앙도서관

감염병의 새로운 단계가 도래하다

한국인들은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 검역 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바이러스와 세균이 바닷길로만 전파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1950년의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전염병의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콜레라,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디프테리아, 말라리아, 이질, 유행성 출혈열 등이 번갈아 또는 동시에 병영과 피난민 수용소를 덮쳤다. 전쟁 중에 한탄강 변에서 한탄바이러스가, 서울에서 서울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되기도 했다. 정부와 군 의무당국은 이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군인들과 피난민들에게 예방 주사를 놓았는데, 주사기를 소독하지 않고 여러 차례씩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들 사이에 감염을 확산시켰다. 전쟁 중에는 ‘세균전’에 관한 소문도 무성했다.

전쟁 중 한반도에 들어온 감염병들은 대개 토착화하여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한국인들이 콜레라, 장티푸스, 뇌염 등의 전염병에 대한 공포에서 그럭저럭 해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매년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명을 넘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본격적인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감염병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 조류독감,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 특정 지역에만 존재했던 바이러스 또는 변종 바이러스들이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뱅크시의 <Game Changer>, 2020 ⓒ instagram.com/banksy. 뱅크시가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Southampton) 종합병원에 기증한 그림으로,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아이들이 슈퍼히어로로 생각하는 인물이 ‘의료인’으로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페스트는 유럽에서 마녀사냥을 촉발했다. 이탈리아인들은 매독을 ‘프랑스병’이라고 부른 반면, 프랑스인들은 나폴리병이라고 불렀다.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은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자극했다. 지금도 코로나19를 굳이 ‘우한폐렴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감염병에 대한 혐오는 흔히 특정한 지역 또는 인간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질병의 고통에 더해 차별과 혐오의 고통이 인류를 괴롭혔다. 그리고 무지에 기초한 혐오에 편승할 것인가 무지와 혐오에 맞서 싸울 것인가는, 역병의 시대에 공통된 지적, 문화적 과제였다.
<장군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100×58㎝ ⓒ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의술의 기회마저 접하지 못한 백성들은 저마다 질병의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주술의 힘에 의존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 전염병이 창궐할 때면, 병마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그림들이 그려졌다. 질병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인 성격의 민화들이다. 이 그림들은 의술의 혜택이 미치지 못한 평민들에게 심신의 위로와 평안을 주었다. <장군도>는 검이나 지휘봉 등을 들고서 질병의 잡귀를 위협하여 백성들을 평안히 지켜준다는 의미로 읽히며 인간적인 면모와 질병 퇴치의 힘을 지닌 능력자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된다. 구한말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그림으로 질병에 맞서고자 했던 평민들의 했던 절박한 노력이며 최선이었다.
전우용_역사학자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경제사, 도시사, 의료사, 생활문화사를 연구했다. 주요 저서로,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를 다룬 <현대인의 탄생>을 비롯하여, <오늘 역사가 말하다>, <우리 역사는 깊다1,2>, <내 안의 역사>, <서울은 깊다>, <한양도성>, <한국 회사의 탄생>, <망월폐견>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