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 2호   山:門 HISTORY

여성국극, ‘변칙의 기술’

정은영_미술작가
발행일2020.08.11
 

 우연치 않게 남산의 공연장들에 오른 작업들 가운데는 전통과 근대가 공모하면서 소외시킨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띈다. 특히  '여성국극 프로젝트'로 알려진 정은영 작가의 작업은 배제된 것을 다시 소환하고 새롭게 권리를 부여한다. 지금의 전통과 공연예술을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 여성국극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면, 이제 그것을 동시대적으로 살아있게 하기 위해 그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제시한다. 

역사적 굴곡과 재조명의 시도들

한국전쟁 전후 대중적 인기를 모은 공연양식인 ‘여성국극(女性國劇)’은 전통국악 연희의 서구화된 양상이자 판소리를 분창화(分唱化)・장면화(場面化)하여 연극적으로 무대화한 ‘창극(唱劇)’의 한 종류다. 오직 여성배우들만 무대에 서는 여성국극은 1950년대 한국 공연예술의 어떤 장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주목을 받으며 독자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인기는 1960년대 말부터 서서히 사그라든다. 흥행가가 등을 돌렸고, 평단의 혹평이 쏟아졌다. 여성국극은 ‘진정한’ 창극/국극을 파괴함으로써 “창극 부재”를 초래한 요인이라고 공격받았다.1) 여성국극의 예술적 성장과 그 가치는 폄훼되었으며, 이는 장르 자체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현재 여성국극의 명맥은 아주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데, 후속세대에 대한 교육과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사실상 이 장르는 사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여성국극을 재조명하려는 몇 차례의 노력이 있었으나, ‘여성국극’이라는 공연장르의 부활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시공관에서 바우와 진주목거리 공연 후, 1953, 조영숙 제공(좌)
대구극장 분장실서 배우 및 스태프들과 담소중인 임춘앵, 1950년대 추정, 조영숙 제공(우)
하지만 그간 여성국극에 기울여진 다양한 분야의 관심 덕에, 이제 매번 그 영락의 역사를 세세히 구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성국극이 비교적 ‘알려진 역사’의 범주에 진입하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학계로부터 공연사나 성별정치의 문제를 다루는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이 부단히 이어졌고, 필자의 ‘여성국극 프로젝트’(2008~) 또한 미미하게나마 미술계에 흔적을 남겼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여성주의 미디어, 소규모 공동체와 문화운동 분야에서도 여성국극에 대한 의미 있는 관점들이 꾸준히 생산되었다.
정은영, <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 설치, 가변크기, 2015 ⓒ 김익현, 작가 제공

<춘앵전>(2010)으로 대표되던 만화시장에서의 관심이 긴 소강상태에 머무는 듯했으나, 근래 혜성처럼 등장한 웹툰 <정년이>(2019~)는 10~20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여성국극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촉발했다. ‘기입되지 않은 역사’로 남겨질 뻔한 여성국극에 대해 다양한 현재적 분석과 의미화의 시도가 이어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정년이>는 소리에 재능을 타고난 목포 소녀 윤정년을 중심으로
1950년대를 풍미한 여성 국극단을 다룬다. ⓒ 네이버웹툰

전통이라는 이름의 근대적 폭력

그러나 이런 접근들이 여성국극의 짧지만 강렬한 역사를 본격적으로 문제화한 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성국극의 ‘기구한’ 역사는 무엇보다도 ‘전통’이라는 일견 자명해 보이는 관념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당대에 형성된 ‘근대적’ 감각과 취향을 적극적으로 쫓아 발현된 예술양식인 여성국극은 처음부터 ‘전통문화 존립’이라는 목표를 지닌 채 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성국극은 공연예술에 대한 ‘근대적 혁신’을 내세우기보다는 기존 전통예술의 의미망에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그 권위에 편승하기를 열망했다. 그다지 유구한 역사를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성(기생)들의 단체’라는 점에서 비롯된 세간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여성국극은 스스로를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근거를 가진’ 양식이자, 단지 대중공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국악’, 즉 국가의 기획에 준거하는 예술활동임을 강조하고 정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당대 여성국극 공연의 일부 홍보문구들은 “민족 오페라” 같은 수식어에 기댔고, 가장 유명했던 여성국극단인 ‘여성국악단 임춘앵’의 단가(團歌)는 자신들의 활동이 ‘민족’과 ‘국가’의 기획에 동참하는 것이며, 자신들이 ‘전통문화 존립’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편집증적으로 강조했다.2) 

잘 알려졌듯, ‘근대’를 화두로 삼는 연구자들은 ‘근대’가 전통과의 결별을 통해 시작됐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오히려 ‘전통’을 포함하거나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왔다.3)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통’이 근대 국민국가의 기획 하에 발명된 국가통치 전략의 일환임을 밝힌 바 있다.4) ‘전통’을 수호한다는 것은 기실 ‘원본 없는’ 개념을 도구로 활용해 얻어내야만 하는 패권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출범한 군부독재 치하의 근대국가 기획 또한 1970년대에 들어 남성 중심적인 ‘전통문화 제정사업’에 돌입했고, 여성국극의 주변에서 일하던 수많은 남성국악인들은 정부 사업으로 대거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여성국극은 의도적으로 누락되었고, 공식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나 서서히 잊혔다.5)
정은영, <유예극장>, 비디오 설치, 35분 05초, 2018 ⓒ홍철기, 작가 제공

살아 있는 전통을 위한 해체적 재개념화


동시대적 역동성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전통예술은 존폐의 기로에서 가장 시대친화적인 전략을 취하는 역설을 보인다. 이는 물론 형식 면에서 행해지는 실험과 고민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통’ 공연이 관례를 벗어나는 시도를 행했을 때 으레 “청바지 입고 판소리한다”라는 식의 배타적인 평가가 부여되어온 사례들을 보건대, ‘전통’에 대한 혁신이나 도전마저 소위 ‘퓨전(fusion)’이라는 또 다른 ‘전형화된’ 의미화가 가능할 때에만 용인되는 듯하다. 그러나 ‘전통이 새로운 옷을 입고’ 변용 혹은 현대화되었다는 식의 분석은 꽤 진부할 뿐 아니라, 대체로 불충분하다. 그런 지적들은 ‘전통’이라는 관념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나 수호되어야만 하는’ ‘원형’으로서 전통의 위치를 절대화하고 공고히 하는 데 너무 많은 자원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오히려 전통에 대한 그 ‘당연한’ 인식이 ‘전통’을 확장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은 채, 전통을 ‘낡은 것’ 혹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2020 남산초이스 <남창가곡> ⓒ 정선영
최근 몇몇 전통예술 공연자들과 단체/기관들의 도발적인 기획들은 전통예술을 스스로 숨쉬고 역동하게 만들려는, 즉 전통을 해체적으로 다시 개념화하려는 괄목할 만한 제안이었다.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2016)과 서울남산국악당의 <남창가곡>(2020)이 내게 매우 인상적인 ‘전통공연’ 관극 경험으로 남은 것은 그 때문이다.
 

거부와 저항이 아닌, 배우고 달아나기


2019년 11월, ‘교토 익스페리먼트(Kyoto Experiment)’(2019)에 필자의 공연 <변칙 판타지_한국판>이 초대되었을 때, 나는 서울에서의 초연 버전을 그대로 공연하되 교토의 정취와 공연사적 맥락을 반영하고자 했다. <변칙 판타지>는 2016년 서울 남산아트센터에서 처음 선보인 이래, 2017년 타이페이에서의 대만판, 2018년 요코하마에서의 일본판과 고아에서의 인도판으로 공연된 바 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것’으로도 ‘현대적인 것’으로도 온전히 분류되지 못한 채 사라진 여성국극의 배제된 역사와 그 주변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하지만 새로운 도시에서 공연될 때마다 각 도시의 성별정치와 소수자성의 맥락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 공연의 기조와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다. 극중, 무대를 잃어버린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의 삶의 무게가 갈등과 위기를 반복적으로 불러낼 때, 그와 마찬가지로 배제되고 타자화된 자신들의 삶과 그 고통을 무대 위에서의 환희로 승화시키는 게이(남성 동성애자) 합창단 ‘지보이스’가 등장한다. 이로써 <변칙 판타지>는 타자들 간의 연대감과 상호 전승을 통해 ‘전통’이란 얼마든지 다시 쓰일 수 있음을 상상해보고자 한다. <변칙 판타지>의 ‘코러스극’은 여성국극 공연의 백미인 창무(唱舞)의 스펙터클과 연극의 시원으로 알려진 ‘그리스 비극’을 참조해 ‘퀴어문화(queer culture)’의 이종적이고 캠피한(Camp) 미학적 실험을 전유한 장치다. 각 도시의 퀴어 합창단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에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을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정은영, <변칙 판타지>, 퍼포먼스, 1시간 20분, 교토익스페리먼트 2019, 춘추좌 공연장면, 2019
ⓒ 교토익스페리먼트
<변칙 판타지>는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존중하고 따르는 듯하다가도 이내 다른 경로를 상상하고 전회한다. 이는 여성국극으로부터 배운 ‘변칙술’을 전승한 것이다. 나는 지금 ‘전통’을 살아 숨쉬고 역동하는 것으로 재사유하기 위해 바로 이 변칙술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내가 십여 년에 걸친 여성국극 연구를 통해 배운 가장 값진 앎이다. 변칙술은 ‘거부’와 ‘저항’을 통해 관습과 규칙을 무효화하는 방식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변칙술은 끊임없이 변조하고, 변신하고, 모르는 척하고, 숨겨진 틈에 관심 갖고, 배우고 달아나는(Unlearn) 전략이자 태도다. 이 변칙의 기술은 마침내 규범을 낙후시키고, 각 범주들 간의 ‘경계’를 더욱 사려 깊게 탐문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정은영, <변칙 판타지>, 퍼포먼스, 1시간 20분, 교토익스페리먼트 2019, 춘추좌 공연장면, 2019
ⓒ 교토익스페리먼트

 


1) 박황, 『창극사 연구』, 백록출판사, 1976.
2) 여성국극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는 졸저 『전환극장』(정은영 외, 포럼에이, 2016) 참조.
3) 한석정,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체제의 기원』, 문학과지성사, 2016.
4) 에릭 홉스봄 외, 장문석・박지향 옮김,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
5)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의 단체활동과 쇠퇴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여성학』 27-2, 2011.
정은영_미술작가
정은영은 주로 비디오와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현대미술작가이다. 이름 모를 개개인들의 들끓는 열망이 어떻게 세계의 사건들과 만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저항이 되거나 역사가 되고 정치가 되는지에 관심이 있다. 페미니스트-퀴어 방법론을 부단히 재점검함으로써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예술 실천이 가능하다 믿는다. 대표작으로 ‘동두천 프로젝트’(2007~2009), ‘여성 국극 프로젝트’(2008~현재) 등이 있다. 2013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2015년 신도리코 미술상, 2018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