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민(이하 안): 작가님들과 만날 생각을 하니 웹툰을 다시 정주행 했어요. 영화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라마로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서이레(이하 서): 저희도 연출가님 공연 영상 재미있게 봤어요. 재공연하시면 꼭 보고 싶어요. 드라마화는 지금 초기 단계라 아직 구체적으로 잡힌 건 없는 상태예요. 캐스팅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이 많은데 흥미롭게 보고 있어요.
나몬(이하 나): 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드리는 말씀인데,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여자이다 보니 여성들의 이야기에 좀 더 이입되기 쉽다는 거죠. 작품 안에서 여성 캐릭터가 나오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주시해서 보게 돼요. 그래서 언젠가 여자가 주된 캐릭터로 나오는 작품을 하게 되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성취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여성 서사, 여성 캐릭터를 찾다 보면, 너무 불행한 여자들이 많은 거예요. 그게 현실이기도 하니까 그렇겠죠. 그런데 현실과 작품은 서로 영향을 받잖아요. 작품 안에서 성취하는 여자, 행복한 여자가 나오면 현실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작업을 하는 나도 좀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그런 점이 좋았어요.
서: 제가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때 봤던 <한국문학통사>의 근대 파트에 창극과 극문학을 다루면서 딱 한 줄이 나와요. 거기에 제 친구가 완전히 꽂힌 거예요. 여자들만 모여서 했다는 국극을 그 친구가 찾아보다가 논문 하나를 제게 추천해줬어요. 여자들끼리 이런 걸 했다는데 재미있다, 봐라, 정말 재미있었던 거죠.
나: 저는 전혀 몰랐어요. 이레님이랑 작업을 해보려고 처음 만나 기획서를 보고는, 어 이거 해야 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했고, 여성국극은 무대뿐 아니라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인물을 구상해내다니, 마치 1950년대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거든요.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림이나 대사를 보면 디테일에 대한 고증이 잘 되어 있다고 할까요. 어느 정도의 치밀한 리서치를 거쳤는지, 그걸 이미지화하기 위해 두 분이서 소통하는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구체적으로 상상하기가 작가로서 부담되고 어렵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나: 1950년대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7,80년대부터는 자료가 많은데 50년대는 찾기 쉽지 않더라고요. 주로 50년대에 찍었던 영화들을 찾아보고 스크린샷 열심히 찍어가면서 이렇게 보이겠구나 하며 감각을 익히고,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서울 사진 아카이브 등 닥치는 대로 구글링해서 이레님께도 보내드리고... 글 쓰실 때도 이미지 자료가 필요하니 초반에는 그런 식으로 리서치해서 자료를 주고받았죠.
서: 나몬님이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글을 쓰면 되는데 이미지로 그려야 하잖아요. 어렸을 때 보면 KBS 아침드라마에서 50년대 배경의 드라마가 많았어요. 전후에 식당을 열고 가난하지만 야무지게 사는 여주인공 같은 걸 많이 떠올렸고, 당시에 나왔던 영화들, <하녀>도 여러 번 봤고, <야인시대>도 도움이 되었어요. 대사를 쓸 때 힘들었던 건, 정년이가 다방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이 메뉴가 얼마라고 해야 하는데 감이 안 잡히는 거죠. 몇 환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 당시 나왔던 신문을 열심히 찾아봤어요. 쌀 몇 가마에 얼마인지, 그런 걸 찾아내서 결국 쌍화차가 몇백 환이구나, 알아내서 썼던 기억이 나네요.
안: 작품을 쓰고 그 시대를 촉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 작품 한 컷마다 그만큼 성실함이 배어있는 거죠. 그에 비하면 연극은 참 쉬운 거구나 싶어요. 장면 그대로 올리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고 추상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서: 저는 그게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각자의 영역이 있는 거죠.
안: 대사나 캐릭터를 어떻게 끌어냈는지도 궁금해요. 남자 됨과 여자 됨이 가소롭다는 대사를 한동안 제 카톡 프로필 문구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그런 걸 어떻게 끌어내셨나요? 또 만화 <유리가면>과 비슷하게 연기에 대한 부분이 많이 나오잖아요. 어떻게 하면 국극을 잘할 수 있는지 상세하게 나오는데, 연기에 대해 공부하셨나요?
서: 연기에 대해 정말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했고, 정은영 작가의 작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마스터클래스>를 보면 젠더 연기하는 걸 코칭해주잖아요. 거기서 뻥튀기를 한 면이 있고요. 고사장 캐릭터의 경우, 드랙킹 아티스트인 아장맨 인터뷰를 많이 참고했어요. 그분이 아장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해방감을 느꼈다고 해요. 그런 점을 고사장에게 투영해보고 싶었어요. 국극을 하는 다른 인물들도 해방감이든 안정감이든 무대를 통해 각자 얻는 게 있을 수 있잖아요. 리서치를 통해 그런 다양한 목표를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안: 그 부분이 굉장히 성실한 거죠. 사실 연극을 소재로 영화를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연기라는 장르에 대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장면을 그려내야 하잖아요. 가령, 구슬아기(<호동왕자>의 조연 캐릭터)라고 하면 구슬아기의 장면을 그려내야 하고, 그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야 하는 거니까요. 위화감 없이 마치 내가 그것을 무대에서 보는 것처럼 그려졌더라고요. 국극을 실제로 보거나 텍스트도 읽기도 하셨나요? <호동왕자> 같은 작품이 나오잖아요.
안: <당곰이야기>의 경우, 국극이 수준 높은 예술장르였지만 지금 그대로 하기는 어려우니 할 수 있는 것으로 해볼까 하면서 출발했어요. 국극이 생성되고 부흥했다가 갑자기 한순간에 사라졌던 일련의 과정이 그 이후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봤을 때 안타깝고 분하기도 한데,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으면 우리의 문화지형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 마음으로 <당곰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작가님들은 그 지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서: 일단 우리가 자료를 리서치하기 힘들지 않았겠죠. 대본이 정말 궁금하거든요. 당시에 엄청나게 히트를 쳤다는 작품들이 있는데, 어떤 이야기와 대사로 꾸며졌는지 정말 궁금하거든요. 그런 점들이 해결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 지금까지 국극이 남아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50년대 국극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였잖아요. 지금 와서도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여성이 남성을 연기한다는 특이점을 활용해서 퀴어에 관한 이야기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사랑극 말고도 다른 장르극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약간 뮤지컬에 가까운 장르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안: 저는 1990년대에 10대를 보냈는데, 그때 갑자기 걸크러시 여성들이 등장했어요. 예를 들면, 가수 박지윤의 경우 노래 제목이 <난 남자야>였는데, 기억나시나요? 그때 남성의 역할을 하려는 여성들, 남성의 역할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1990년대에 잠깐 있었다가 사라졌잖아요. 저도 고사장을 보면서 따라 해보고 싶다, 남자처럼 되어 세상을 속여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든단 말이에요. 젠더를 이분해서 이게 남성이야, 이런 게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영역을 가지고 논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세상에 뭔가 화두를 던지는 느낌이 있어요. 국극에 남역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흥미롭고, 만약 국극이 계속 있었다면, 그걸 계속 실천해왔다는 거잖아요. 말씀하셨듯이, 가끔은 예술이 현실을 만들기도 하는데, 다른 성 지형도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거든요.
안: 두 분의 인연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어떻게 작업을 같이 시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정년이>를 하게 되셨나요? 글과 그림이 너무 탄탄해서 이런 글에 이런 그림이 있어야 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잘 만나신 것 같아요.
서: 저희 사이에 다른 친구가 있어서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2014년도 말에 첫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처음 만났고, 같이 해보면 좋겠다고 얘기를 나눴어요. 이후로 나몬님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계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웹툰을 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신 거죠. 제가 갖고 있는 이야기 중에서 나몬님이랑 어울리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찾다가 <정년이>를 제안해드렸어요.
안: 처음부터 이런 작업자 만나기 쉽지 않거든요. 저는 창작집단 푸른수염에서 연출을 하고 있고, 계속 여성 서사 작업과 한국 신화를 패러디하며 갖고 노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신화에서의 성 역할은 젠더 이분법 안에 고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생각하는 신화는 놀이 같은 거예요. 사람들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건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사는 삶의 꼴을 정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신화를 놀이처럼 짓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남성성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것도 놀이가 되지 않을까, 신화의 거대함이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런 작업을 계속하려고 해요. 작가님들의 다음 작업도 궁금해요. 아직 <정년이>가 끝나지 않았지만, 속편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서: 저희의 목표는 <정년이>를 완결 짓는 거죠. 어쨌든 끝이 나야죠. 3부 마지막까지 가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음 이야기까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외전이나 다른 이야기 보고 싶으신 것 있나요?
나: 사실 지금의 이야기에 빠져 있으니 생각할 겨를이 많지는 않은데, 지난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채공선씨(정년이 어머니) 젊었을 때 이야기도 궁금하고 또 국극단을 열정적으로 쫓아다니는 팬클럽 이야기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된 플롯을 따라가야 하니 쳐낼 수밖에 없었던 사소한 그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도 그려보고 싶어요.
안: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보고 싶어요. 또 연구생들이 합숙하는 여성 공동체가 그려지는데, 그 안에서 여러 감정을 느끼잖아요. 질투하고 화해하고 성장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 처음에 들어왔을 때 놀려준다거나, 밤에 만나 연습하기도 하고... 아, 정년이 친구 주란이가 너무 완벽할 때가 있어요. 흠결이 없는 사람이랄까. 실존하지 않는 인물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품어주는 친구도 있고, 여성공동체 안의 소소한 일상이 굳이 플롯이라는 거대 서사가 아니라 작은 서사라도 힘이 되는 거죠.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생생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나중에 드라마가 끝나면 연극으로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나: 저희는 드라마보다 창극, 음악극을 먼저 상상했어요.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무대로 만들면 좋겠다고 했죠. 사실 무대에 서는 이야기니까, <정년이> 무대를 보러 가는 기분은 어떤 걸까, 가끔 떠올려보기도 했어요.
안: <당곰이야기> 전에 <달걀의 일>이라는 자전적 희곡을 썼어요. 어떤 여자가 고고학자인데 자기 고향에 있는 무덤을 하나 발굴해야 했던 거죠. 그 무덤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신화를 다 믿고 있어요. 그런데 고고학자로서 알게 된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인 거예요. 거기서 그 여자는 힘을 얻고 인생에서 잊어버렸던 기억을 찾아요. 그런 이야기를 쓰고 나니, 이 여자가 하는 일을 내가 해도 되겠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덤에 갇힌 이야기를 나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로 새로 써도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우연히 신화 책에서 삼신에 관한 당곰 이야기를 읽었는데 한 글자도 맘에 안 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쓰게 된 거죠. 그러니까 <달걀의 일>을 썼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당곰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 판소리 중간에 랩을 넣는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해요. 설리 노래도 나오던데, 상황에 어울리게 들어가서, 랩도 그렇고 원래 있는 곡인가 했어요. 아니면 창작 랩인지 궁금하더라고요.
안: 실질적으로 판소리는 아니리를 위주로 풀었고, 판소리 하는 게 쉽지 않아 연습하는 콘셉트로 풀었어요. 제게는 연습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데, 신화나 국극도 연습하는 과정에서 문화가 바뀐다고 생각하거든요.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게 젠더가 아니라 어떤 목소리, 에너지잖아요. 그게 너무 시원했어요. 마치 고사장 보는 느낌이랄까요. 한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연습했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설리는 사실 이미 그때 많이 미움을 받고 있었고, 그런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러면서 <당곰이야기> 초고가 나왔는데 연습을 하는 와중에 설리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 사람을 살리는 서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설리의 춤이나 노래를 연습하는 것으로 추모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 가버린 K-팝을 다른 방식으로 연습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짜깁기가 된 것 같아요. 만약 국극이 계속 이어졌다면, K-팝도 다른 지형도를 갖췄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국극도 힙합에 열정을 가지고 했을 거라고 상상했고, 가사도 배우들이 적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성적 욕망, 남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 모든 하고 싶은 것을 다 넣어보자 했더니, 신나서 적어왔더라고요.
서: 힙합이라는 게 원래 억압받는 계층의 사람들이 시작한 거잖아요. 본인들이 갖고 있는 울분을 터트리는 에너지가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또 가야금 연주하시는 분도 너무 좋았어요. 가야금은 고상하고 우아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자기는 섹시하게 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그런 고정관념을 깨려는 시도를 하신 거잖아요.
안: 전해드려야겠네요. 연기를 하신 건 아닌데 제가 대사를 드렸더니 그렇게 읽으셔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어요. 목포 분이신데 <정년이>를 좋아하세요. 저희 같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서: 요즘은 시대가 워낙 빠르게 바뀌기도 하고, 제가 하는 말이 다음 세대의 작가를 꿈꾸는 분들께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젠가는 하게 되더라고요. 본인에게 강렬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지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나: 오늘 큰 힘을 얻어가네요. 이렇게 대면해서 감상을 듣는 건 흔치 않은 기회잖아요.
안: 저는 그래서 연극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어떻든 바로 실시간으로 반응을 느끼게 되잖아요. 또 이레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이야기를 찾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이렇게 연극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어쨌든 국극을 매개로 오늘 작가님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