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하 김): 호흡은 이번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이죠. 한국춤에서 호흡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일상적인 호흡이나 다른 무용 장르에서의 호흡과 어떻게 다른가요?
박(이하 박): 모든 춤을 출 때 호흡은 늘 중요해요. 한국춤에서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하면 단전이 중요하다는 것. 단전은 에너지, 즉 기가 모이는 곳인데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에너지와 흐름이 중요한 거예요. 하단전(배꼽 밑), 중단전(명치), 상단전(이마)의 흐름, 그리고 호흡을 맺고 풀어내는 호흡이 다르다고 볼 수 있어요. 한국춤에서는 6합이 중요하다고 해요. 상하 좌우 내외. 호흡을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몸이 위아래로 움직여지는데 이 때문에 곡선적인 움직임이 나올 수 있어요.
김: 한국춤 안에 호흡을 이용한 움직임에 관한 이론이 있는 거네요. 그런데 이번에 박현미 안무가가 제시하는 호흡 스코어는 기존에 있던 게 아니라 직접 창작한 거죠? 한국의 전통 무보에서는 움직임의 형태나 장단이나 방향성 정도만 기록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박: 네. 무용의 무보 중에 가장 대표적인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에서도 호흡보다는 팔과 다리의 움직임, 방향 등을 기록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춤으로 표현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춤은 동작의 정확도보다 호흡과 그루브가 중요하거든요. 제가 이번 작업에서 ‘호흡무보’라 하지 않고 ‘호흡악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에요. 호흡과 리듬만으로 다양한 움직임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든 열린 개념의 스코어입니다. 한국춤의 근원이 논이나 밭을 매는 노동, 자연에서의 영감, 신에게 비는 것과 같은 삶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춤의 호흡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호흡을 통해 생성된 움직임에 중점을 두었어요. 일상에서의 호흡들을 채록해서 만든 스코어로 춤과 연기, 음악에 접목해보고 있습니다.
김: 호흡의 개념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때, 일상적인 호흡이라면 숨이 차는 순간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순간에 호흡을 의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다가 소진되는 순간에 의식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무대 위의 배우들의 호흡은 그와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호흡을 조절해서 감정을 표현하는데, 감정과 분리해서 호흡 자체를 의식하거나 관객이 그렇게 의식하게 만들지 않죠. 결국에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시각적 효과를 위해 호흡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박: 제 이번 작업에서 무대 디자인도 그렇고 호흡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만, 결국 우리의 일상적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춤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호흡에서 나오는 다양한 움직임들. 예를 들면 달리기를 하면서 호흡이 격해질 수 있고, 뭔가 기대하거나 두려워하면서 달릴 수도 있어요. 또한 현재 상태에 따라 호흡, 마음, 움직임이 달라지죠. 평소에 호흡을 의식하지 않지만, 의식하는 순간 호흡에 따라 자신의 몸이 들썩이는 게 느껴질 거예요. 그게 핵심이에요. 워크숍을 거치며 호흡만으로 이야기와 캐릭터가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자연스럽게 서사를 구성하게 됐고요.
김: 감정의 영역과 관련되는 것 같네요. 연극과 접점이 생기고요.
박: 초기에는 감정을 배제한 호흡 자체만의 표현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배우들, 연출님과 함께 스토리 기반의 작업을 하며 감정의 베이스가 생겼어요. 작품이 더 풍성해졌죠. 동일한 스코어로 연기와 춤 각각 해석하고 표현하는 게 다른데 이 과정이 참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원래 이 작업은 한국춤의 기본 시리즈 프로젝트로 시작했어요. 호흡, 디딤, 팔사위에서 나아가 춤사위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고, 다스름과 같은 기본 장단을 바탕으로 기본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려 했어요. 하지만 리서치 과정을 겪으면서 몇 달 만에 만들어질 수 있는 양이 아니더라고요. 선택과 집중, 그리고 조금 더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기존에 만들었던 호흡 악보를 창작의 도구로 활용해 호흡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박현미 안무가의 경우, 이전부터 장소특정형 공연, 일상의 움직임에 주목한 공연 등 다양한 동시대적 작업을 해오다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기존의 작업에서 뭔가 충분한 답을 찾지 못했다면서 작년 말부터 한국춤 기본 시리즈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대 바깥에서 경험한 것이 전통의 역사적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과 맞닿아 있는 셈인데, 이전의 퍼포먼스 작업을 거쳐 한국춤의 기원을 다시 발견한 이후 작업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박: 장르, 장소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장소특정형 공연을 많이 해왔어요. 2014년에 도서관 사서, 직원(청소, 경비원)분들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관객 참여형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이러한 시도들은 춤추는 이와 관객의 경계가 없는 춤판이 벌어지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음악과 리듬에 따라 덩실덩실 춤을 췄던 한국춤의 근원에 좀 더 다가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한 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참여형 퍼포먼스를 했는데, 우연히 관객으로부터 작품에 직접 참여해 움직임을 따라 하는 게 폭력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아예 춤판을 깔아주자는 마음에 일탈과 휴식이 가능한 공연을 만들어 봤죠. 그런데 관객을 모으고 참여를 유도하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이번 공연에서는 호흡악보로 자연스럽게 관객과 호흡을 맞추며 위로를 주고받고 호흡에 의해 몸과 마음이 릴랙스 될 수 있도록 다가가려 합니다.
박: 이번 작업은 30분 길이에 1막과 2막으로 구성돼요. 1막은 렉처 퍼포먼스 형식으로 호흡 악보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2막에서는 호흡 악보를 기반으로 연기와 춤이 같이 어우러지게 구성하려고요. 일상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호흡을 만들어 연기와 춤에 반영한 거죠. 이번에 스코어, 스토리, 연기, 전자음악, 춤이 결합된 새로운 시도를 하다 보니 이전의 작업과는 조금 다르게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 일상의 어떤 스토리를 수집했나요?
박: 고민이 많았어요. 설화 혹은 시나 신화에서 가져올까. 결국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슈나 사건에서 가져오자, 그렇지만 구체적인 걸 밝히지는 말자고 결정했어요. 이야기의 흐름과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 저희끼리는 세부적인 내용을 공유했어요. 호흡이 잘 드러난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한 사건들의 인터뷰를 찾아 그 호흡을 채록하여 악보화했어요.
김: 어떤 사건이고 어떤 감정 상태의 호흡이냐에 따라 많이 다를 것 같아요. 불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호흡과, 여가 활동을 하면서 들뜬 사람의 호흡은 굉장히 다를 테고요. 호흡을 수집해서 재현한다고 할 때, 그 코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신체적 감응 능력이 뛰어난 관객이라 호흡의 느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해가 생길 수 있잖아요. 누군가 비극적 경험을 한 사람의 호흡을 보고 릴랙스를 하게 된다면 나중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고요.
박: 네,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작품에서 설정한 특정 이슈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개개인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실 수 있을 거예요. 연습을 거듭하며 호흡만으로도 위로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작품을 보며 관객마다 각자가 마주한 경험에 따라 다양한 해석으로 다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 작품의 2막 1장에서 4장으로 갈수록 사건이나 감정이 점차 해소되어 가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미술 작품도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보는 이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처럼, 상상과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 생각해요.
이쯤에서 추상과 구상의 차이를 떠올려보게 된다. 회화에서 정치적 사건을 다룰 때는 구상적 형식을 취하면서 명확하게 사건을 거론하고, 추상은 좀 더 형식적이거나 개념적인 접근을 한다. 호흡이라는 것도, 연극에서의 호흡이 스토리나 감정에 실어서 구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때, 무용에서는 다소 추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박현미 안무가의 작업에서는 사건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호흡을 수집한다는 접근 방법이 아주 흥미롭지만, 무용수의 신체적 움직임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호흡이 맥락 없이 추상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박: 춤, 호흡은 추상에 가까워요. 그렇다 보니 구상에 가까운 호흡악보를 매개로 하려 했어요. 그럼에도 전달하는 데 어려운 측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연극 연출가와 배우를 섭외했어요. 배우와 호흡악보가 구상이라면, 춤은 추상이 될 수 있어요. 이 내용과는 별개로 연출님이 첫 미팅에서 제 접근이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하셨어요. 뭔가 추상을 구체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거든요.
김: 같은 스코어를 안무가 본인과 배우들이 수행하면서 대비시키는 거군요. 얼마나 추상화되고 재현적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요.
박: 계속 실험하는 중이에요. 우리가 내쉬면서 말하지 마시면서 말할 수 없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이고요. 같은 스코어의 호흡 악보여도 춤과 연기, 또 배우마다 표현하는 게 다르더라고요. 호흡을 하면서 캐릭터가 생성되는 것 같다는 배우도 있고 호흡만으로도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신기했어요. 어떤 때에는 간결한 호흡과 단순한 동작만으로 전달이 되고, 반대로 좀 더 역동적인 춤이 더 전달될 때도 있고요.
또한 전통춤 중에서 살풀이춤을 작품에 담았어요. 1막에서는 한영숙류 살출이춤을 제가 알고 있는 순서로 호흡을 채록했어요. 순서는 같을 수 있지만 사람마다 호흡이 다를 수 있어요. 호흡악보로 춤의 순서나 정답을 기록하려는 게 아닌 춤의 가이드 역할이 될 수 있어요. 2막에서는 이야기의 사건들을 풀어내는 하나의 요소로 살풀이춤의 양식을 빌려 창작하려고 해요.
김: 오랫동안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뉴욕 레지던시를 거치면서 창작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죠. 창작이라고 하면 대금 연주곡을 만드는 작곡가가 되려는 건가요, 퍼포먼스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건가요?
백다솜(이하 백): 전부 다인 것 같아요. 음악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작곡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활동 자체가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둘 다인 것 같아요. 저는 솔리스트이기 때문에 루프 스테이션이라는 장비를 사용해서 음악에 좀 더 층을 만드는 거죠. 대금은 관악기이기 때문에 현악기나 서양 악기보다 화음에 한계가 있어요. 그동안 대금 연주만 했다면 이제는 제 목소리를 사용해서 음악의 층을 넓히려고 하고 있어요.
제가 곡을 만들 때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림을 바라보면서 무슨 느낌인지 적어놓고, 그 느낌에 맞는 소리를 찾아요. 숨소리라고 하면 그것도 종류가 많고. 그런 것을 찾으면서 음악을 만들어요.
김: 악보로서의 그림인가요?
백: 아니요. 진짜 그림이에요. 제가 만든 음악에는 제 이야기가 담기는 거잖아요. 예전에 만든 음악을 들으면 어떤 상황이고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왔는지가 떠올라요. 일기장 보는 것처럼. 제 곡 중에 <한여름 밤>이라는 곡이 있어요. 작년에 레지던시 갔을 때 만든 건데요. 그곳이 굉장히 자연친화적이라, 밤에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새소리 동물 소리가 들렸어요. 음악의 층 하나하나가 그런 소리를 표현한 거예요. 그림은 여름밤이고, 새, 동물, 제가 있어요. 하늘을 바라보면 공기가 맑아서 별이 잘 보이더라고요. 그런 걸 생각하면서 연주를 하고 다듬어서 공연을 올리는 거죠.
김: 일종의 그림일기 같은 거네요. 경험했던 소리들을 기억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음악으로 들려주고요. 음악에 가사가 있다면 스토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전달되겠지만 연주곡에서는 그게 감성적이거나 감각적으로 전해지잖아요. 그렇지만 백다솜 연주자가 일기를 쓰니 본인 안에는 명확하게 스토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백: 음악은 텍스트가 있다거나 시각적으로 명확한 게 아니잖아요. 사람마다 같은 작품을 봐도 보고 느끼는 게 다르고요. 관객들이 제 곡을 들었을 때는 본인들만의 그림을 다시 그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생각하는 건 이런 건데, 네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거죠.
백다솜 음악가가 관악기 솔리스트로서 장치를 이용해서 홀로 화음을 만든다고 할 때, 연주자의 자의식이 어느 정도 발휘될까. 작곡이나 연주의 과정에서 자기 반영성이 강하기에 드는 생각이다. 전문 연주자로서 소리를 다양하게 들려주기 위한 퍼포먼스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먼저 녹음한 소리를 들으면서 다른 소리를 입힐 때, 연주의 과정에서 ‘듣는 나’를 어떻게 의식할까. 녹음된 소리를 자기 자신으로 보면서,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듯이 듣는 걸까. 그는 거기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김: 이번 작업 주제가 도시잖아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어떤 감각을 상기하는 건가요?
백: 도시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복잡한 건물을 바라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도시가 편안할 수도 있고, 어떤 일이 있어서 힘들 수도 있잖아요. 그런 감정을 많이 적었어요. 사람들 만나면 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물어봤어요. 그런 메모들을 정리해서 구체화했어요.
김: 그 도시는 서울인가요? 실제로 어느 장소에 가서 경험하고 감각했다고 한다면 서울의 어디를 산책했는지 궁금해지네요.
백: 아무래도 제가 서울에 살기 때문에. 딱히 어디라고 하기보다는 두서없이 돌아다녔어요. 돌아다니면서 보고. 어떤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제 감정을 많이 적었던 것 같아요. 도시에는 다양성이 있잖아요. 그런 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도시가 바쁘고 화려하지만 그 안에 외로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에게 표면적인 모습과 내면적인 모습이 다 있잖아요.
이번에 발표하는 두 번째 곡 <외줄타기>는 내면적인 모습을 표현한 건데, 도시에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버티고, 소리 지르며 울지는 않지만, 속으로 그렇게 하니까, 울부짖으면서 속삭이는 듯한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마지막 곡은 제목이 <y=f(x)>라고 되어 있잖아요. 일부러 ‘함수’라고 안 하고 공식을 적었어요. y를 도시라고 하고 저를 x라고 했을 때, 우리가 도시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이 도시를 만든 것도 우리 자신이잖아요. 이 도시의 무언가를 제가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만든 도시는 무엇인지, 고민하며 만든 곡이에요.
김: 만약 음악에 지역성이라는 게 있다면 백다솜 연주자의 음악의 지역성은 어떤 것일까요. 가령 전통 음악은 한국의 국가 정체성과 연관되는 것으로 언급되는데, 대금 연주자로서 외국에서 연주할 때 음악의 지역성을 의식한 적이 있는지. 또 황해도 굿이라든가 지역적 기원을 의식하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번 작업이 ‘도시’를 언급하는데 음악의 지역적 이미지를 상상하는지요.
백: 도시와 도시에 대한 감정에 포커스를 맞췄기 때문에 지역성은 많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문화권의 차이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의식하지 않아도 베이스가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한국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저는 전통보다는 소리에 좀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도 대금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리허설을 보니 다양하면서도 낯설게 들렸다. 대금 소리를 쪼개서 반복시킨다든지, 트릴을 녹음해서 기계적인 효과음처럼 들리게 한다든지, 그런 파편적이고 반복적인 연주는 현대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또한 대금의 화음은 다른 화성 음악과 다른 어떤 미학이 있을까. 그는 그저 웃으며 다양한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표출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 전통 음악이라는 걸 얼마나 의식하면서 작업하나요? 대금을 연주하면서 전통을 해석하거나 현대화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여러 악기 중 하나를 택했다고 생각하는지요.
백: 곡마다 다르게 접근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음악을 만들지만, 제 베이스는 전통 음악 연주자이다 보니까, 어떻게든, 저도 모르게 전통 어법을 사용하더라고요. 어떤 곡은 전통 음악의 메인 요소를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어요. 제가 전통 음악 전문 연주자로서 전통 음악에 얼마나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는지 좀 더 잘 알잖아요. 그런 좋은 멜로디를 차용해서 제 곡에 넣기도 했는데요. 신기했던 경험이 제 음악 중에 <여민락>이라고 한 시간 반짜리 곡이 있어요. 무대 위에서 연주했을 때 잔잔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는데, 그것과 같은 선율을 메인으로 넣은 다른 곡을 듣고 좋았다고 물어보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김: 영감을 받은 다른 예술가의 작업이 있나요?
백: 예전에 제가 현대음악을 했는데, 그 전에는 음악을 하면서도 현대 음악에 편견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같이 활동하는 친구가 어떤 현대 음악을 들려줬어요. 피아노의 열 면의 줄 위에 종이를 긁어서 눈 밟는 소리를 표현한 거예요. 현대 음악이 입체적이구나. 저한테는 굉장히 시각적으로 다가왔어요. 음악이 시각적이라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눈>이라는 곡을 들으면 겨울에 눈 풍경 속에 있는 게 그려지는 거예요. 그렇게 현대 음악을 접하게 됐고, 현대 음악의 다양한 주법을 경험해보고, 그런 주법을 차용하거나 변형해서 대금을 불어보게 된 거죠.
김: 현대 음악에서 화성을 허무는 작곡의 시도보다, 사운드아트 퍼포먼스의 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네요. 악기가 아닌 것으로 소리를 내는 게 그 자체로 작품이나 작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영화의 폴리 사운드 디자인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요. 소리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다양한 상상력을 보여주죠.
백: 원래는 잘 몰랐는데 이런 작업을 하면서 알았어요. 나중에 도전을. (웃음) 기존에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만 하면 됐는데. 이번에는 감독님들과 같이 무대를 만들고 연출을 해야 했어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도전이 됐어요. 이번 작품을 좀 더 발전시키고 싶어요.
제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너무 우울한 거예요. 올해 상반기에는 특히 공연이 많이 취소됐고요. 그렇게 지내면서 중간 평가를 하고 나서 보니 제가 만든 곡이 너무 우울한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지금 현재의 시점 말고, 내가 그동안 살아온 도시 전체를 생각해보려 했어요. 가능성이 많잖아요.
김: 그동안의 경험을 보면 먼저 연극을 하다가 퍼포먼스 아트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고, 그다음에 탈춤을 배웠잖아요. 세 가지가 장르적으로 구분되는 것도 있지만, 태도나 제작 과정 등 정의의 초점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각각의 어떤 측면에 관심을 가졌나요?
밝몽키(이하 밝): 연극은 공동체성이 가장 강한 것 같아요. 십여 년 전에 저는 굉장한 개인주의자였어요. 연극하면서 환경보호 같은 이타적인 행동의 의미를 깨닫게 됐어요. 연극 영화과 출신이 아니지만 연극배우로 성장하고 싶어서 많이 노력했어요. 몸을 쓸 줄 모르는 상태였을 때 마임을 만났어요. 마임 작품을 보는데 배우가 무대 위에서 혼자 아무것도 없이 자기 세계를 구현하는 게 매력적인 거예요. 그러다 한 선생님을 만났는데 제게 퍼포먼스 아트를 알려주셨어요. 2012년에 선생님이 뉴욕에서 퍼포먼스 아트를 할 때 데려가주셔서 솔로로 데뷔할 수 있었어요.
밝: 퍼포먼스 아트에는 굉장한 자유로움이 있는 것 같아요. 연극은 정해진 대로 해야 하는 데 답답함이 있었다면, 퍼포먼스 아트는 규칙이나 제약 없이 개념 하나로 승부를 보니까 매력 있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 배웠을 때 제가 이해한 퍼포먼스 아트는 ‘즉흥’이었어요. 완성은 관객과 함께 하는 것이고요.
솔로 하면서 굉장히 짜릿했어요. 즉각적이고. 사람을 만난다는 게 느껴지니까. 그 생동감을 잘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려면 제 가장 소중한 걸 내보여야 하더라고요. 그때그때 달랐지만 약간 ‘불사한다’고 할까. 잘못된 방식의 퍼포먼스도 많이 했지만요.(웃음).
밝몽키 연출가가 전통에 관한 인식이 생겨난 것은 대학 때 뉴욕에서 한국춤을 처음 보면서였다. 해외에서 느낀 익숙하지만 생경한 감각. 이것이 다시 지펴진 것은 퍼포먼스를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이탈리아의 그로토프스키 워크 센터 레지던시에 참여해 연기 워크숍을 하던 중 각자 지역의 전통 노래를 가져와서 작품을 만들자는 제안 때문이었다.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모아서 3년 넘게 강령 탈춤을 배워오고 있다.
김: 전통이라고 할 때, 사실 자기 문화권이 아닌 지역의 전통에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타문화권의 전통, 그러니까 가령, 아프리카 전통 노래를 할 때와, 한국 전통 노래를 할 때 어떤 게 다르게 다가오나요?
밝: 신기한 것은 제가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세계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를 접할 때마다 비슷해 보여요. 뿌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번 작품에서 지역의 전통이라는 게 사실 하나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녹여내려고 했어요.
김: 이번 작업에 어떻게 어떤 것들이 섞여 있나요.
밝: 처음 기획과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요. 배우들 중에 외국인 친구가 있었을 때는 그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들, 인도, 이란, 중동, 아시아 문화를 섞어내려고 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할렐루야’나 원시 부족의 노래라든지, 클리셰를 가지고 와서 그 안의 조화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어요. 전통의 특색을 찾거나 구분 짓는 게 중요할 수도 있지만, 각기 다른 전통이 내 안에서 느껴지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김: 탈춤을 계승하면서 장르적으로 현대화하겠다는 관심보다는, 다양한 지역의 전통문화를 바라보고, 보편성을 발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인 거네요.
밝: 탈춤도 마찬가지예요. 저 아직도 탈춤은 잘 못 추거든요. 그런데 스승님에게 정신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탈춤은 결코 한의 정서나, 억압된 피지배층의 정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 작품에서도 탈춤의 그런 정신을, 다 같이 모여서 기원하는 마음을 녹여내보고 싶었어요.
이러한 탈춤의 정신이 지금의 사회에 반응하게 한 것일까. 이번 <손님네요>의 주제가 질병을 다루고 달랜다는 차원에서 최근의 사회적 상황과 공명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밝: 제가 이탈리아에서 작업하다 올해 4월에 귀국했는데 이탈리아에서도 격리됐었고, 한국에서도 2주 격리됐어요. 그때 읽은 신화 중에 이 이야기가 들어있어서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탈리아에서도 감각이 이상한 거예요. 갑자기 왕따처럼 작업에서 배제되었거든요. 주말에 베니스에 다녀왔는데 3일 후에 베니스가 폐쇄됐거든요. 병균 취급을 당하면서 격리되어 있으면서 <페스트>, <데카메론>을 읽었고, 한국에 와서 한국의 신화를 읽었어요.
전통적 관점이 재미있더라고요. 전염병 자체를 손님이라고 칭하고 대접해서 밥 한 공기를 따뜻하게 먹여서 있던 곳으로 잘 보낸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전염병에 대한 관점에서 작업을 시작하던 중이었는데, 전통적 관념에서 착상이 왔어요. 그래서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가 더더욱 전통을 바라보는 시선과 엮어진다고 믿은 것 같아요.
김: 리허설을 보니 질병을 쫓기 위해 객석에 모금을 하는 장면이 있더라고요.
밝: <손님네요> 하면서 인간의 가장 신성한 마음을 다루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신성한 마음을 갖고 있고 다만 잠들어 있거나 자각을 못할 뿐. 이걸 어떻게 건드릴까. 한끝 차이로 신성과 세속이라는 것이 동전의 양면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인간 마음이 가장 신성한 동시에 가장 세속적이라는 걸 화두로 삼아서 가장 유치하고 직접적으로 풀었어요.
김: 인간의 마음이 모순적으로 혼재되어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는데, 관객들이 각자의 신성함과 세속성의 비율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할 것 같네요. 그런데 퍼포먼스 아트에서 관객과의 인터랙션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탈춤에서도 마당놀이와 같은 형식에서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잖아요. 마을에서 다 같이 차린 잔치를 모두 즐긴다는 관념도 있고요. 현대 공연은 그렇지 않겠지만요. 전통적인 연희에서의 관객의 태도와 공연장에서의 관객의 태도가 많이 다를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밝: 그게 가장 큰 숙제였던 것 같아요. 굿이나 탈춤도 그렇고, 어떤 환경 속에서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미 맥락을 가진 상태에 있는데, 우리는 극장을 찾아온다는 맥락만 있으니까요. 안내방송을 이용하는 것도, 관객을 계몽하는 게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는 장치예요.
기존의 공연에서의 관객에 대한 생각과, 밝몽키 연출가의 공연에서의 관객 및 참여의 개념은 어떻게 다를까. 그가 말했던 “선한 마음과 굿전을 준비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가령 영화관에서는 관람자가 굳이 작품에 선한 마음을 투사하거나 보여줄 필요가 없는데, 연극이 선한 마음을 요구한다고 할 때 어떻게 그게 전달될 수 있을까.
밝: 제가 기대하더라도 그게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곡돼서 전달될 것 같아요. 제 작업에서 유니세프 모금 광고처럼 이미 많이 노출된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요. 공연 전후에 구세군 냄비를 배치하는 걸 꼭 해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가면서 관객이 공연에서 본 것과 비슷한 걸 볼 때, 예를 들어 한 달 뒤 크리스마스에 구세군 냄비를 보면 희미하게라도 어떤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요.
김: 선함을 얘기할 때, 실제 모금 활동이나 공연 장면의 모금 행위는 선함을 다루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익 광고와 공연은 달라야 한다는 직관적인 인식을 잘 따져보면 이런 질문이 떠올라요. 공연은 선함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선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공연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밝: 그래도 저는 희망해요. 어떠한 방식으로 건드려야 할지는 계속 시도해봐야 알겠지만 아직 과정에 있으니까. 그런 논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도 많고. 근데 누군가는 이런 생각도 해보면 어때, 그렇게 엉뚱하게 툭 치고 가면서 하고 싶어요. 제가 관객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김: 삶에 대한 영향이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의 윤리의 문제인 것 같아요. 예술작품이 지향하는 걸 정말 지향해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가, 혹은 지향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해버리고 말았는가. 이 작업이 어떻게 보여 질지는 모르겠지만 리허설을 볼 때 그렇게 냉소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유머러스하게 다가오는데, 원래 의도와 정반대로 되지 않게 연출하면서 잡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밝: 훨씬 더 냉소적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그러면 뭐가 남을까 하는 질문이 다시 생기더라고요. 말씀하신 걸 작업을 하다 보면 자꾸 간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제게는 정답은 없고 희망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