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탈공작소는 문학을 탈춤으로 만드는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첫 작업이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각색한 <오셀로와 이아고>(2018.1.12-14,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로 당시 탈춤과 그리스 신화가 만났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두 번째 작업은 <삼대의 판>(2019.12.12-22,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으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경성의 만석꾼 조씨 일가 삼대(三代)의 몰락과정을 시대사와 함께 그린 염상섭(1897-1963)의 <삼대>를 탈춤으로 만든 작품이다. 첫 번째 작업이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고 줄거리를 탈춤으로 옮겼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면, <삼대의 판>에서는 춤-음악-줄거리의 조각들이 세련되게 어우러졌다는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인 <열하일기>에서는 연암 박지원을 쉽지 않은 생각의 조각을 탈춤으로 각색하며 신재훈 연출은 마치 선문답을 하는 듯 “탈춤,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화두와 함께 철학적으로 풀어낸 역작이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세 명의 탈꾼 박인선, 이주원, 허창열은 탈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세 명의 박지원이 되어 탈을 쓰고 무대에 등장했다. 미래의 탈춤은 어떻게 개척해야 하는지 연암 박지원의 책 속에서 지혜와 해답을 얻어 보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문학을 탈춤으로 제작한 세 번의 작업 중에서 이번 작품이 음악적으로 가장 자유로웠다. <오셀로와 이아고>에서는 춤이 극을 이끌고 갔었기에 음악적인 부분을 부각되지 않았었고, <삼대의 판>에서는 타령장단과 자진모리장단이 집중적으로 사용되어 장단 쓰임이 다소 제한적이었다면, <열하일기>에서는 장단 사용이 폭넓게 활용되는 등 음악의 역할이 주도적으로 극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탈춤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극의 초반에 등장한 <배따라기>는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했던 그 시기에 유행하던 음악이기에 탁월한 선곡이다. 3박의 노래에 탈꾼들은 4박의 엇갈림으로 춤을 추는 것도 당시 자유분방한 사상을 갖고 있던 박지원과 맞는 지점이고, 극의 전반에 깔린 “사이에서 사유하자”라는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열하일기>의 흐름과 맥을 같이했다. 이주원이 부른 남창가곡 <편락>과 <처용무> 음악은 양반계층과 궁중의 분위기를 표현하였고, 조롱박으로 만든 중국 관악기 후루스(葫蘆絲)는 청나라 시절의 북경과 열하의 중국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일야구도하기(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부분에는 장삼을 벗어 자유롭게 박자를 넘나들며 추는 춤에 <거문도 뱃노래> 음악이 사용되었다.
“나는 춤을 춘다. 춤에도 고정불변의 원칙이나 정답은 없다. 지금의 상황 지금의 음악이 나와 만나 춤이 된다.”던 연암 박지원의 사유에 대한 춤과 음악의 표현으로 세련되게 맞물렸다. 어디까지가 춤의 경계인지, 누구나 출 수 있는 것이 춤인지, 혹은 아닌지의 철학적인 배경과 딱 맞아떨어진 음악은, 음악감독 이아람(대금)을 비롯하여 황민왕(타악), 최인환(베이스), 성시영(피리, 일렉기타), 김용하(해금)의 소수정예로 극대화된 효과를 만들어냈다.
박지원의 글에서 빌려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이에서 사유하라’는 지점일 것이다. 경계에 설 수 있어야 비로소 자유롭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궁극의 지점이다. 세 명의 박지원은 탈을 벗어 허공에 걸고, “그렇다, 내 몸이 세상의 통로가 되고, 그것이 춤이 된다.”는 박지원의 글이 자막과 수화로 관객에게 전달되고 ‘사이의 춤’은 결국 답이 없는 춤으로 자유로운 음악에 맞춰 긴 여운을 남기며 무대가 마무리된다.
소설가 이병주의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간결하게 딱 한 줄로 쓰여있다. 이 글을 보면서 어쩌면 천하제일탈공작소가 신작 <열하일기>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꼭 집어 대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햇빛에 바래 역사가 된 고전 문학을 다시 꺼내 거기에 음악과 탈춤을 입히고, 고민을 담은 시대성을 더해 숨을 불어 넣었더니, 달빛에 물든 신화가 되었다. 창작의 고통으로 탄생한 신작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신화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