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남산국악당·그림(the林) 공동기획 <김홍동 화첩기행-환상노정기>
창작국악의 역사와 국악그룹의 계보에서 그림(the林)(이하 그림)은 중요하다. 21세기 창작음악의 출발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그룹이다.
20세기 창작국악은 작곡가가 만든 관현악곡이나 협주곡을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형태로 성장했다. 다분히 서양의 오케스트라를 의식한 형태의 발전이었기에, 작곡과 연주가 엄격히 분리되었다. 국악관현악은 1960년대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에 서양음악을 전공한 작곡가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꽃을 피운다. 바야흐로 국악관현악의 전성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러나 그리 오래 영화를 누리진 못한다. 1990년대는 기성 작곡가의 작품은 새롭지 못했고, 신진작곡가의 역량은 기대할 만큼은 아니었다.
새천년을 앞두고 새로운 세대의 음악에 대한 기대감이 차올랐을 때, 그림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혜성(彗星)이란 말이 딱 맞다. 이전엔 전혀 존재감이 없었으나, 갑자기 나타나서 큰 영향력을 끼친 게 된다. 심지어 처음엔 'the林'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랐다. 한 때 '더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비유컨대, HOT의 결성 당시 기성세대가 '핫'이라고 불렀던 것과 다름없다.
그림은 국악방송의 개국(2001년)과 함께 급부상한다. 그들은 어떻게 단박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첫째, 실내악 편성(국악그룹)으로서 그간의 관현악과는 또 다른 사운드를 냈다. 둘째, 국악기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음악이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음악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그룹 그림, 바이날로그, 공명은 저마다 개성이 강했다. 이들에 의해서 창작국악의 중심이 관현악단에서 그룹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 중에서 그림이 가장 ‘국악기적 사운드’에 충실했다. 셋째, 이를 바탕으로 해서 그림은 ‘이야기’와 ‘판타지’가 듬뿍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어떤 곡은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다가왔다.
이러한 그림은 국악그룹 중 보기 드물게 최장수하고 있다. 그 근본에는 신창렬과 고(故) 신현정과 같은 좋은 작곡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음악을 잘 살려내는 출중한 연주자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작곡가의 노트를 기본으로 하지만, 각 악기의 파트는 연주가에 의해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림의 음악극 중 대표작이 <김홍도의 화첩기행-환상노정기>(이하 <환상노정기>)다. 그림은 2016년 의정부 국제음악극축제에서 음악극어워드 ‘대상’을 받았고, 2017년 KBS국악대상에서 ‘단체상’뿐만 아니라, 전체 ‘대상’을 수상했다. 그간 그림의 활동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상은 매우 뒤늦게 찾아온 응원의 선물과 같다.
그림의 음악에는 이미 ‘스토리’와 ‘판타지’가 내재되어 있었으나, 음악극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이것을 확실하게 드러냈을 때, 그림의 음악은 더욱 ‘동시대성’을 획득하면서 일반인들의 호응을 받게 된다.
그림의 음악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그대로 노정기(路程記)이다. 그들은 첫 음반을 낼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의 음악적 행보 자체가 환상노정기(fatastic road music)이다. 그림의 1집(2002년)에 실린 <은하수를 보던 날> <아침풍경> <날으는 밤나무>는 이미 국악기를 통해서 그려낸 이야기와 이미지였다. 이렇게 순수기악곡에서도 ‘이야기성(性)’을 충분히 살린 그림이기에, 그림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을 만든다는 것이 일종의 음악적인 수순(手順)처럼 느껴졌다.
4집 음반 <Acoustic Island>는 창작국악의 명반을 고를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오름의 시간>과 <바다의 나비>를 들어봤는가? 대중음악평론가 서정민갑은 <오름의 시간>의 ‘미니멀하지만 사이키텔릭한 강렬’함에 주목했다. 제주라는 현실적 공간을 바탕으로 해서, 그 공간의 역사성와 환상감을 매우 현명하게 공존시키면서 전개하고 있다.
작곡가 신창렬의 음악을 더욱 찬미한다면, 속도감과 색채감이다. <프리즘> <산책> <집으로 가는 길> <판 Project Ⅱ> 등에선 속도감과 색채감이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한다. 그림의 작곡가이자 리더인 신창렬은 일찍이 노래에 관심을 두었다. 그림 음반에선 전통성악의 재해석이 돋보인다. 스스로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그는 가객(歌客)을 비롯해 여러 곡에 보컬리스트로도 참여했다. 경기민요 보컬리스트 심현경이 참여한 <양류가–버들노래>, 판소리 보컬리스트 이자람이 참여한 <길>과 <제3의 시간>, 정가보컬리스트 하윤주와 신창렬이 함께 한 <바다와 나비> 등을 통해서 신창렬의 노래관(觀)도 알게 된다. 그림은 이렇게 음악극에 필요한 모든 요소는 창단 초기부터 찬찬하게 내공을 쌓았다.
그림의 대표적인 음악극 레퍼토리인 <환상노정기>(5.20~21/서울남산국악당)를 새롭게 만났다. 그간 다수의 공연 경험을 한 바 있는데, 조금씩 음악적인 내용을 달리하면서 성장, 발전한 작품이다. 수준급의 작품이나 평론가의 입장에선, 칭찬만을 할 순 없다. 그간 대본은 대본대로, 배우는 배우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쳤다지만, 부족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부분이 있다. 별점을 매긴다면, 김봉영(배우) ★★★★☆, 신창렬(음악감독·작곡) ★★★★, 경민선(대본)★★★.
먼저 대본의 취약함은 얘기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경민선 작가는 연희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써왔다. 이 분야의 작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경민선 작가에 대한 의존도는 높았고, 초기의 성과를 인정한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포함해서 앞으로 어떻게 재미와 의미를 현명하게 넘나들지 좀 더 고민해야 한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인가? 무대극을 위한 이야기인가? 어른을 대상으로 한 것인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 이런 것에 좀 더 고민해야 한다. 작가는 둘 다라고 얘기하겠지만, 그건 분명 무리한 욕심이다. 작가 자신은 이야기(동화)로서도 가치를 두고 있겠지만, 무대극(대본)으로서 볼 때는 뭔가 지나치게 설명을 오래 듣고 있는 것 같아 지루하다. 음악극은 동화책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김홍도’가 아니면 어떤가? 작품의 주요 이미지가 ‘호랑이’가 아니라면 어떠했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인물(김홍도)과 소재(호랑이) 덕분에 많은 수혜를 누리고 있음을 인식해주길 바란다.
관객들이 스스로 개연성을 부여하면서 지루하고 모호한 부분일지라도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그림이라는 브랜드, 국악이라는 장르적 호감을 바탕으로 해서 음악극의 앞으로서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선한 에너지’를 품은 ‘충성도 높은 관객’들을 바르게 바라봐야 한다.
작품을 살려내는 일등공신이 김봉영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이 작품을 김봉영이 공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판을 이끌어가는 노련미에 일단 박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판소리를 전공한 창자(唱者)가 갖는 ‘자기만족적 애드리브’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이 훌륭한 작품으로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 그도 이쯤에서 자기점검이 필요하다.
국악인 특유의 재담이 한두 번은 재밌지만, 나중에는 상투적이어서 재미가 없을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애드리브 등이 이야기의 급속하고 흥미진진한 진행에 때로는 걸림돌이 된다는 걸 전통소리꾼이 알았으면 좋겠다.
노련한 김봉영이라지만, 그 또한 예외는 아니다. 때론 ‘김봉영’이라는 존재감을 너무 드러낸다.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부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작품’이란 시각에서 보면, 그다지 유용하지 못한 ‘너스레’가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화자(話者)로서의 자신과 창자(唱者)로서의 자신이 극 속에서 어떻게 잘 어우러져야 할지 더욱 고민해야 한다.
서울남산국악당에서 펼쳐진 <환상노정기>(5.20~21)의 구원투수는 단연 장경희(타악)였다. 타악연주자로서의 충실했던 그가 무대에 배우처럼 등장했을 때, 무대에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되었다. 그의 어설픈 듯한 재미있는 연기는 일품이었다. 그림의 멤버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정진우(관악기)와 윤희연(거문고)과 김민정(가야금)도 좋았다. 그런데 무대 뒷면에 김홍도의 회화가 바탕이 된 영상이 펼쳐지는 상태에서, 연주가들의 잦거나 불필요한 움직임은 때론 극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다.
평론가의 눈에 비친 이 작품에는 분명 아쉬움이 있지만, 그림 특유의 판타지적인 느낌의 음악과 연주가들의 출중한 기량을 전제로 하고, 무엇보다도 판을 이끌어가는 김봉영의 역량을 기반으로 앞으로 이 작품은 계속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신창렬은 이 작품을 뛰어넘을 또 다른 음악극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