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평자의 입장에서는 공연이 진행될수록, 기획과 음악의 주체가 말하는 ‘환경’이 무엇이고 어떤 물음을 음악과 말을 통해 던지려는지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들렸다. 남는 것은 거대하면서도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계몽의 메시지였다. 실험적이라 여겨지는 악기들의 적극적인 사용과 그에 대한 언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앰비언스가 포함된 에스닉 팝, 아이리쉬 풍의 사운드로 ‘잘 마감되어 듣기 좋은’ 음악의 향연을 들을수록, ‘콘서트’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로부터 음악이 ‘겉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좋은 주제. 하지만 구체성은 미흡
테마의 구체성, 그리고 테마에 맞는 음악적 시도의 구체성에 대한 고민 둘 모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기획 의도 그리고 활동가들의 언설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에너지 남용 등의 환경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태도에 대한 논의와, 음악 자체를 비롯하여 작곡에 대한 코멘터리 및 음악 사이사이의 영상, 나아가 차를 함께 마시는 행사의 일부 꼭지들에서 표현·강조된 ‘자연 곁의 삶’ ‘자연 속의 인생’ ‘자연에서 길어온 음악’이라는 낭만적 태도는 사실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데도 계속 같은 주제인 것처럼 병치되어, 아쉽게도 설득력이 부족했다.
전자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환경 문제’들의 범위 자체도, 이 콘서트를 하나의 작품으로 본다는 ‘공연 예술’의 측면에서는 넓고 산만하다. 보다 단단한 구심점이 필요한 연극, 영화, 소리극과 같은 장르는 아니더라도 에너지 남용과, 온난화와, 해양 플라스틱과, 식물의 멸종과, 올림픽과, 고원과, 그 별빛의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내러티브적 설득 장치 없이 이야기한다면 ‘하나의 연행’으로서 미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구체적인 것들을 전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