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봄   山:門 REVIEW

리뷰 | 서울남산국악당 [마이 판소리]

박종현
사진이은숙
발행일2023.02.09

언어를 넘다, 소리로 삶을 곱씹는다

십수 년 전 영국의 한 오디션에서, 웨일스 출신의 휴대전화 판매원이 무대에 올라 이탈리아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눈대목’을 부르겠다고 했을 때 많은 관객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둠 속에서 새벽을, 승리를 기다리는 오페라 속 주인공의 내러티브와 삶의 굴곡 속에서 꿈을 미루다 불혹에 가까워진 때에야 마침내 무대를 쟁취하는 오디션 참가자의 인생 이야기가 겹쳐지며, 전세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이 되었다. 팝페라 테너 폴 포츠의 데뷔 이야기다.
2월 4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마이 판소리’라는 제목 아래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소리꾼 가향스 가샤르, 빅토린 블라보, 안나 예이츠가 스승 민혜성과 함께 올라 판소리를 펼쳤다. 고수는 최효동이 함께 했다. 
 
빅토린 블라보
자신이 나고 자라지 않은 곳의 음악을 공부하는 일이 이 시대에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특히 성악 분야에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일정 수준의 음악성을 성취해내는 일은 결코 쉬울 수 없다. ‘딕션’을 넘어 단어와 통사 구조 하나하나에 얽힌 소리의 뉘앙스를 표현하는 일은 모국어로 노래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운 일이고, 판소리의 언어가 오늘날의 한국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등장한 소리꾼이 “그때여” 하고 아니리를 시작하는 순간, 처음에 갖고 있던 의구심과 호기심은 일반적인 판소리 발표회에 왔을 때와 같은 감상과 향유의 의지로 전환되었다.
안나 예이츠

그들에겐 ‘외국어’인 판소리가 펼쳐지다

구현이 어려운 아니리(판소리 사설을 자유롭게 엮어나가는 것)가 음악과 언어적으로 잘 전달되면서, 본 연행이 “외국인의 우리 음악 도전”과 같이 (촌스럽고 종종 식민주의적인) 음악 외적인 의의에 기대는 공연이 아님을 귀명창 관객들이 충분히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 소리꾼이 프로급의 실력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내용과 음악적 해석을 통한 언어예술적 전달력이란 측면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는 기교가 더 뛰어난 판소리 유망주들의 연행보다 나은 부분이 있었다. 이는 소리꾼들이 각각 번역가(빅토린 블라보), 음악학자(안나 예이츠), 한국사 연구자(가향스 가샤르)로서 고급 한국어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어(古語)가 적은 대목들을 택한 선곡에 기반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스승 민혜성이 이끌어준 진지한 분석과 많은 연습량 덕분일 것이다.
가향스 가샤르
춘향가 중 ‘적성가’, 흥보가 중 ‘흥보 마누라 음식 차리는 대목’을 들려준 프랑스 출신의 번역가 빅토린 블라보는 훌륭한 설명력이 돋보이는 아니리와, 서툴지라도 다양한 소리목을 구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국 출신의 음악인류학자 안나 예이츠는 단가 ‘인생백년’과 춘향가 중 ‘이별가’를 들려주었다. 세 명 중 가장 자기 스타일의 톤 혹은 성음을 확립하는 과정에 있는 듯하였다. 가장 즐겁게 보았던 연행은 흥보가 중 ‘비단타령’과 춘향가 중 ‘그네 뛰는 대목’을 부른 가향스 가샤르의 공연이었다. 사설의 소리-언어적 재현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발림과 너름새로 무대를 장악하는 모습이 빛났다. 당연히도, 이러한 연기는 판소리 사설의 구석구석을 이해해야 가능한 것이다.
민혜성

판소리의 내용과 소리꾼의 삶이 겹쳐지며 

연습 과정에서 사설의 이해와 소리 구현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그들의 일화와 부를 사설의 내용을 연결 짓는 이야기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간(間) 텍스트적 해석’을 통하여 자신이 어떠한 정서와 태도로 부를 대목을 소화할 것인지를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순간들이 감상의 흥미와 몰입도를 더하였다. 더불어 기량 위주의 소리하기 및 듣기에 매이곤 하는 어린 소리꾼이나 평자들에게 ‘기실 소리연행의 본질은 기교 이전에 악곡의 해석’이라는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세 문하생의 출연 뒤에 무대에 올라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흥보가를 선보인 민혜성은 2007년부터 프랑스, 벨기에 등의 여러 나라에서 판소리를 가르쳤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문하생들이 본 무대에 섰다며, 다음 공연에는 더 많은 문하생을 한국 무대에 데려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다. 판소리 저변의 국제적 확대를 보여주는 그러한 공연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들이 이번 공연처럼 다양한 눈대목을 보여주기보다 각자의 성음과 스타일을 찾아 자기만의 소리를 보여주는, 질적인 측면에서 ‘다음 단계’의 공연이 보고 싶어졌다. 웨일스 출신의 폴 포츠가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그것이 곧 이탈리아의 판소리가 아니겠는가)를 공부하여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듯, 한국에 거주하지 않는 이들이 판소리를 공부하여 자연스럽게 무대에 서고, 어쩌면 그중 프로 수준의 소리꾼들이 나타나 감동을 주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기다리며 응원해 본다.
박종현
인류학 연구자이자 팝 음악가이다. 제11회 국립국악원 학술상 우수평론상을 수상하였다.
사진 이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