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남산골은 지금의 고시촌에 비유할 수 있다. 특히 ‘소과’인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과’ 시험을 준비하며 머무르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남산골 딸각발이 샌님”이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됐다. 생원시에 합격한 생원님(샌님)들이 짚신 살 돈이 부족해서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남산골한옥마을 안에 있는 서울남산국악당은 지난 8월 12~17일에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장소 특정형 공연을 진행했다. 연희창작집단 놀플러스의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3>(연출 소경진, 스토리 전건우, 음악감독 송영준)이 그것이다. 제목이 밤‘마실’인 이유는 관객들이 걸어 다니면서 관람하는 일종의 이머시브 씨어터이기 때문이다. 공연의 내용은 다름 아닌 남산골의 선비들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집단 살인 사건이다.
공연은 사자(使者) 역할을 맡은 연희자들의 해설과 연주로 시작된다. 해설을 들어 보면, 과거에 급제한 선비 ‘전종문’과 ‘오순녀’의 혼례식 날에 당사자들과 하객들이 모두 독살당했다. 여기에는 기생 ‘김정순’도 포함되어 있다. 주요 인물 중 전종문의 친구인 ‘박주동’만 과거 시험을 앞두고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공연은 이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을 들여다보면서 범인이 누구인지 추측해 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처럼 추리물로서의 재미를 느끼게 하지만, 사실 이 공연의 핵심은 범인을 맞추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의식에 있다. 그 과정에서 장면에 따라 여러 지역의 굿을 적절히 재해석하여 활용한 점이 신선하다.
첫 번째 장소는 열아홉 살 새색시 오순녀의 방. 문이 열리면 연지곤지가 찍힌 모습의 하얀 넋전이 관객을 맞이한다. 넋전은 망자의 혼백을 담는 종이 인형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혼인날을 기다렸을 그녀의 한이 얼마나 컸을까. 사자들은 진도 씻김굿 중 ‘손님굿’의 장단과 음악 형식을 사용하여 그 넋을 위로한다. 마지막에는 아이 모양의 넋전도 줄줄이 이어져서 저승으로 인도되는데, 이는 그녀가 임신 중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그녀가 품었던 미래의 꿈과 아쉬움을 달래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다음은 서울남산국악당의 넓은 마당. 혼인 잔칫상에 앉은 사자들이 몽환적으로 망자들의 기억을 재현한다. 이들은 또한 나무·도자기·놋 등의 식기들을 타악기처럼 활용하며 연주한다. 그러한 가운데 음식을 씹고 갉아먹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기괴하게 울려 퍼진다. 배고파서 잔치 음식 좀 먹어 보겠다고 왔던 “봉철이, 개똥이, 칠봉이, 순자, 말녀….” 해설자인 사자는 이들의 억울함을 읊고, 넋풀이 하듯 죽은 이들을 상징하는 옷을 겹겹이 입었다가 풀어놓는다.
이어서 잔칫상 뒤 별채의 문이 열리면, 기다렸다는 듯 전종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런데 웬일인지 사자는 전종문을 위로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한다. 알고 보니 그는 멋들어진 시로 기생 김정순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을 약속하고는 배신한 것. 사자는 저승에 가서는 “오래 같은 책 읽으며 공부하듯” 한 사람만 사랑하라는 이야기로 그를 위한 굿을 마무리한다. 이 장면은 동해안별신굿, 그중에서도 오귀굿의 지옥가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남은 상태에서, 관객들은 공연장의 실내로 안내된다. 앞의 장면들이 제의적인 엄숙함을 느끼게 했다면, 여기서부터는 연극적인 재미가 좀 더 강조된다. 테라스인 정원 공간에서는 박주동을 위한 부적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관객들은 유리문을 통해 이를 엿본다. 이 장면에서는 기존의 굿이 활용되지 않았다. 음악도 아코디언을 중심으로 연주된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과거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가장 억울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자들은 유리문에 그의 사연과 성격을 떠올리게 하는 사자성어를 쓴다. “금단주현(禁斷朱絃), 생기사귀(生奇死歸), 살신성인(殺身成仁)….”
이제 악귀가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장면은 공연장 안에서 객석과 무대를 모두 활용하며 화려하게 펼쳐진다. 기생 김정순은 연인 전종문을 급제시키기 위해 경쟁자인 박주동을 살해하고, 자신을 배신한 전종문에 대한 분노로 혼례 음식에도 독을 탔던 것. 그리고 죽을 때는 함께 하자며 자신도 그 음식을 먹었다. 그녀의 영혼은 커다란 뱀으로 형상화되었다. 사자들은 각 인물을 상징하는 등(燈)을 들고 뱀을 물리치는데, 이는 영혼들이 모여서 그녀가 완전히 악귀로 변하지 않고 저승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의미이다. 경기 도당굿의 리듬과 패턴, 상사뱀의 설화 등이 창의적으로 활용되었다.
공연을 진행하는 연희자들(김태정‧장수경‧최혜인‧유민영‧고혜지)은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들의 의상(의상디자인 이진희)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사뭇 다르다.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섬세하게 디자인된 것이다. 이 공연은 전통을 재구성하면서 동시대적인 감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여러 지역의 굿을 장면에 맞게 재해석했고, 국악 타악기와 함께 아코디언을 활용하여 독특한 감성을 자아냈다. 특유의 바람 소리가 섞인 아코디언의 선율은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가 시간의 흐름 속에 함께하는 느낌을 준다. 이는 놀플러스가 추구하는 ‘거리굿’과도 잘 맞물린다.
사자는 각 인물의 장면이 끝날 때마다 부적을 던지는데, 망자를 위로하고 떠난 자리를 편안히 잠재우기 위함이다. 이는 단지 이야기 속의 인물들뿐 아니라 관객들과 공동체를 위한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기이하고 슬프면서도 위로를 주는 공연으로, 가족들이 함께 관람하기에도 적절하다.
글 현수정
연극학 박사, 공연평론가,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겸임교수,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음악극위원장이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정회원으로서, 연극과 뮤지컬의 평론 및 드라마터지에 집중해왔으며, 최근엔 애도와 멜랑콜리 주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월간 <더뮤지컬>의 수석기자를 거쳐, <주간동아>, <세계일보>, <아시아투데이>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했으며,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