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대전>은 2021년부터 매해 열리고 있는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대표 기획 공연이다. 올해는 특별히 포럼 “산조의 경계를 그려보다”를 통해 지난 <산조대전>을 톺아보고, 연주자, 평론가들이 모여 ‘산조’의 음악적 특성, 위치, 앞으로의 방향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발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조-하기’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음악인류학자 크리스토퍼 스몰(Christopher Neville Charles Small)에 의하면, ‘음악하기(musicking)’는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음악에 관한 모든 ‘–하기’를 일컫는 말이다. 음악을 듣거나, 공부하거나, 연주하는, 음악에 관한 모든 능동적 행위가 ‘음악하기’에 포함된다. ‘산조-하기’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면 산조를 듣거나, 공부하거나, 연주하고, 산조에 대해 말하는, 산조에 관한 모든 능동적 행위가 산조-하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산조대전>은 연주자와 관객, 기획자와 평론가 모두가 ‘산조-하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은 공연과 연주에 대한 평을 하기보다, 산조-하기에서 ‘듣기’를 다룬다. ‘듣기’의 행위를 하는 주체인 ‘나’는 ‘평론가’와 ‘연주자’ 사이를 횡단하는 존재이다. ‘듣기’의 관점에서 산조를 들여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WHERE: 산조는 어디에서 들리는가?
관객은 산조를 어디에서 듣는가? 아니, 질문을 바꿔보자. 산조는 어디에서 들리는가? 주로 산조가 들리는 자리는 졸업 연주회나 독주회이다. 이유는 명징하다. ‘산조’는 독주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산조는 ‘듣는 자’를 위한 음악은 아니다. 졸업 연주회나 독주회가 관객을 위한 음악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연주자의 성장한 기량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연주자를 위한 공연이며 이때 관객은 그를 응원하는 가족이나 동료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관객 중에 ‘배움’에 목적을 둔 후배나 제자도 있을 것이다.
<산조대전> 또한 독주회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내가 공연을 본 3월 15일 공연 권새별 <한범수류 해금산조>(고수 장재영), 박종현 <서용석류 대금산조>(고수 김태영)의 객석도 가족과 동료, 선후배와 제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동료를 응원하기 위함에 목적을 두지 않고 공연장에 온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WHAT: 산조는 어떤 음악인가?
산조는 어떤 음악인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산조는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다. 연주자의, 연주자에 의한,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악-기악 전공자는 산조를 배우는 그 순간부터 국악 인생이 저무는 날까지 산조를 연마해야 한다. ‘해야 한다’의 당위가 붙는 것은, 그만큼 산조가 연주자 역량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산조는 단숨에 배울 수는 있어도, 완성할 수는 없다. 산조는 시간을 먹고 자란다. 시간에는 연습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의 삶, 그에 따른 사유까지 포함된다. 물론, 시간 외 다른 먹이들이 있을 수는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산조는 시간의 담보 없이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젊은 산조’라는 이름으로 산조가 ‘창작’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고, 그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산조를 연마하는 연주자에게 ‘시간’은 필수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3월 15일 공연의 연주자들은 그 조건을 열심히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자 이태백은 권새별의 연주를 리허설에서 듣고 “이전보다 더 성음이 좋아졌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산조에서 ‘성음(聲音)’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는 설명하기 입 아플 정도다. 성음 또한 위에 언급한 조건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리라.
HOW: 산조는 어떻게 듣는가?
산조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국악 전공자에게 이 질문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다. 진양부터 자진모리까지 향하는 산조의 스펙터클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을 보며 내가 바뀌는 장단에 맞추어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진양에서는 기-경-결-해에서 ‘해’에 도달했을 때 숨을 크게 내쉬었으며, 중모리-중중모리에서는 9박 강세에 맞추어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움직였다. 자진모리로 넘어가서는 장단 호흡을 따라 몸이 절로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저 산조가, 장단이 체화되어 나오는 습習과 같다.
이렇듯 산조는 장단을 모르면 즐기기 어려운 음악이다. 우조, 계면조와 같은 선법도 마찬가지다. 산조의 선법과 장단의 변화를 알아차릴 때, ‘듣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그렇다는 것은, 산조는 모르면 잘 들리지 않는 음악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산조 연주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전공자 혹은 관련 업계 종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을 납득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HOW TO DO: ‘박제’와 ‘흩음’ 사이를 횡단하기
권새별, 박종현 연주자는 한 음도 허투루 내지 않는 꼼꼼하고 세심한 산조 연주를 들려주었다. 연주자들의 나이에 맞는, 시간을 성실히 먹고 자란 연주였다. 한범수류 해금산조는 부끄럽게도 처음 들어 보았는데,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달리 편한 음역대와 단정한 선율이어서 신선했다. 권새별 연주자는 아주 잘게 쪼개진 박 안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박종현의 서용석류 대금산조는 내가 앉은 가장 뒷자리 객석까지 대금의 청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거칠고 힘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다만, 고수의 장구 연주가 대금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어 아쉬웠다. 두 연주자 모두 이 무대를 위해 얼마나 땀 흘리며 준비했을지 연주를 통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성 듬뿍 묻은 연주를 들으며 ‘산조-하기’에 ‘듣기’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산조대전>이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대표 기획 공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산조’라는 음악 양식이 품고 있는 켜켜이 쌓인 시간의 힘 덕분일 것이다. 시간을 먹고 자라는 산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허튼가락’이다. ‘박제’와 ‘흩음’ 사이를 비정형적인 선을 그리며 횡단한다. 언제나처럼 시간은 성실히 흐르고, 산조-하기에 동참하는 이들의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고 새롭게, 또 깊게, 형성될 산조를 기다린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산조대전> 또한 산조-하기의 현장으로 굳게 자리 잡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