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세월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나라 잃은 슬픔과 통곡의 장소요, 누군가에게는 공포와 폭력, 고통의 장소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휴식과 치유, 간직하고픈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곳. 그렇게 시민의 휴식처이자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 된 남산 몇 곳을 걸어보기로 했다.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나오니 남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좁은 오르막 도로 옆에 남산예장공원으로 가는 보행로가 보였다. 몇 걸음 떼자 바로 진입광장이 보여 우선 안내표지판 앞으로 갔다. 마침 데이트를 나온 젊은 시민 커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차례를 기다려 건물 구성부터 확인했다. 광장 안으로 들어가자 오른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왼쪽으로는 보행로가 놓여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상부 공원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으나, 우선 하부(지하)부터 둘러볼 생각이었기에 왼쪽 보행로를 따라 걸으며 뚫린 천장 사이로 보이는 멋진 하늘을 감상했다. 가을은 역시 산책과 사색을 위한 계절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천장의 조형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길고 짧은 스텐 파이프를 천장에 매달아 놓은 것 같았는데, 신흥무관학교 학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3,300개의 테라코타라고 한다.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니 바로 이회영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보였다. 전 재산을 들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기념관에서는 ‘난잎으로 칼을 얻다’라는 상설 전시와 체코 무기 특별전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이중 천장에 매달린 여러 대의 대형화면을 통해 상영되는 7분 영상과 2층에 있는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님이 쓴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전시가 특히 인상 깊었다.
고난의 시대에 자신의 영달을 꾀하기보다 오히려 가진 것을 전부 헌신해 조국 해방을 위해 살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셨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과연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이회영 선생과 그 가족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록 부와 권력, 명성이 없더라도 평범한 개인으로서 져야 할 사회적 책임에 대해 평소에 얼마나 고민하며 살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저런 의문을 품은 채 기념관을 빠져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남산의 자연경관을 가리고 있던 옛 ‘중앙정보부 6국’과 TBS 교통방송 건물이 사라지고 난 자리, 13,036㎡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눈부신 가을 하늘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역시 자연은 그 자체로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심어진 남산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샛자락 쉼터를 지나 공원 중앙에 서니 조선총독부 관사 ‘유구터’와 빨간 우체통 모양의 ‘기억6’ 메모리얼 홀이라는 건물이 보였다. 관사 터 중앙에 놓인 조형물에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사. 광복 뒤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6국이 있던 자리입니다”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기억6’ 메모리얼 홀은 바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건물 내부 지하 1층에 옛 중앙정보부 지하고문실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 있다고 한다.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건물 외부에 부착된 대형 현수막의 안내 문구를 보니, 미리 방문 신청을 하지 않으면 내부 관람이 불가한 것 같았다. 주말에는 신청 없이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 코로나 상황이었지’라는 깨달음이….
세상의 배꼽 중앙 고흥석에 새겨진 글귀를 마음에 새기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 앞에 보이는 아담한 돌계단을 오르니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서울유스호스텔과 종합방재센터 건물이 언뜻언뜻 보였다. 옛 중앙정보부 본관과 사무동이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서슬 퍼런 권력의 상징이자 수많은 개인의 인권이 유린당한 장소로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맘껏 지나다니기는커녕 남산 자체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남산창작센터(옛 중앙정보부 체육관)를 거쳐 서울시청 남산 제1별관(옛 중앙정보부 5국)을 가는 길 사이에는 터널이 하나 있다. 일명 ‘소릿길’ 터널. 원래 이 터널 끝에는 대형 철제문이 달려 있었는데 그 문을 통과해야만 중앙정보부 5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고문 피해자들이 들었을 철제문이 열리는 소리를 상상하니 절로 머리가 쭈뼛해지고 가슴팍을 돌덩이로 짓누르는 공포가 밀려왔다.
터널 입구 오른쪽 벽면에 부착된 빨간색 버튼은 당시 피해자들이 느꼈을 공포와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체험·상상해 볼 수 있도록 설치된 사운드 전시물(감독 시해성, 연출 배다리)이 있다. 철문 소리와 타자기, 물소리, 발자국 소리, 노랫소리 등 5가지 소리로 구성된 사운드 작품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작동하지 않아 매우 실망이 컸다. 공공미술로 만들어진 작품들에 대해 화려한 등장에만 치중하고 지속적인 관리와 보존에 소홀한 경우를 때때로 발견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씁쓸해져 온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남산창작센터 역시 리모델링으로 운영중단 및 폐쇄되어 있는데, 재개관일을 알리는 (굳이 가까이 가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X배너 하나가 입구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점도 마음에 걸렸다.
오수성 교수(전남대)는 “한국의 국가폭력 사례 대부분은 주로 경찰, 군대, 정보기관 등에 의해 자행된 것이기에 그동안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는 일반 국민의 의식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각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폭력으로 억누를 수 있다는 사고를 내면화시켜 망각의 사회화로 이어지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역사의 경험을 다루는 데 있어 과거는 단지 과거지사이므로 잊어버리고 미래에 매진하자는 태도는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역사에 대한 해법은 기억의 해법이어야 한다. 사건을 촉발시킨 상황과 정신을 철저히 기억하고 성찰하여 비극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교훈을 얻었을 때 비로소 역사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국가폭력과 트라우마”, <웹진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06.26. 중 일부 재구성)
서울 정도(定都) 1,000년이 되는 2394년 11월 29일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냉동인간이 되어 미래에 깨어나지 않는 이상 볼 수 있는 방법은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급격한 기후 이상과 지구의 변화 등을 생각하니 과연 저 캡슐을 열 미래가 있을까 하는 다소 우려스러운 감정마저 들었다. 그래도 만약 2394년이 무사히 온다면 미래의 후손과 미래의 한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사뭇 궁금하다. 타임캡슐을 연 후손들은 지금의 우리에 대해, 이 시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그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무한, 영원, 불멸 등에 집착하고 갈망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후손을 남기고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아마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개인을 넘어 집단(국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발자취가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그 후손들을 이어주듯이 한 국가의 역사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로 연결되는 일종의 고리이다. 오늘 둘러본 장소뿐만 아니라 남산 곳곳에 보존되고 문화적으로 재생된 역사의 현장들이 이곳을 다녀간 개개인의 기억과 추억이 되어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승옥·윤정자 님은 1958년 혼례를 올리고 60여 년이 넘게 살아오신 노부부로, 남산골한옥마을 회혼례 이벤트에 큰며느리의 사연 신청으로 선정되어 이번에 회혼례를 올리게 되셨다고 한다. 윤정자 님은 식이 진행되는 동안 첫 혼례와 더불어 60여 년 세월 하나하나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고 하시며, 남편 친구의 실수로 추억이 될 만한 결혼사진 한 장 없던 것이 사는 내내 한(恨)이 되었는데 이번에 그 한을 풀었다고 말씀하셨다.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맺힌 회한(悔恨)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결국 삶을 지속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인생의 수없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