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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기분의 전회팬데믹 이후의 예술에 관한 시론

함돈균_문학평론가, PaTI 인문연구소 소장
그림권민호_일러스트레이터,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마루
발행일2020.06.02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봄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봄뿐이랴. 일상 전반은 물론이고 예술계 또한 축제든 공연이든 다 마비되었다. 어떻게든 우리는 한동안 이 재난의 상황을 갖고서 씨름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건 코로나만의 특수상황이라기보다 최근 몇 년 들어 맞닥뜨려 온 예기치 못한 재앙을 통해 보내오는 전 지구적 경고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닌가 한다. 이것이 되짚기를 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이 글에서 제시하듯 ‘근본기분’의 통찰일 것이다. 한 시대가 세계에 은페 되어 있던 실재 혹은 진리의 모습과 만나는 체험의 형식을 ‘근본기분’이라고 한다면, 코로나 이후의 예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맞닥뜨린 초유의 사태가 요구하는 성찰의 시간

‘코로나 사태 이후의 예술’을 과연 지금 시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결국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즉 팬데믹의 경험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경험은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차원의 초유의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 시점에 그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지금 인류는 인간들끼리 서로 대립하고 연대하고 싸우며 기록해 온 ‘(인간) 역사’의 현장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즉 ‘초역사적’ 시간의 입구에 겨우 서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예술’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이후의 예술’을 얘기한다는 것은 이후의 정치, 노동, 고용, 주가, 복지 등등을 얘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예술은 산술적으로 측정되거나 어떤 대상을 특정하여 그 효과를 계산할 수 있는 부분적·단기적 함수 영역이 아니다. 물론 ‘예술 산업’ ‘문화 산업’의 측면에 관해서라면 어느 정도 예측해보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예컨대 팬데믹 이후 온라인화상공연의 본격적 등장이나 소비위축으로 인한 공연 수입의 감소 같은 현상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진단이 ‘예술적으로’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그런 진단은 엄밀히 말해 ‘예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산업적 수용·유통·소비에 관한 ‘경제·사회 담론’일 뿐이다. 그것은 나의 직접적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이 경험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낯선 시간 경험을 지극히 좁은 산업적 시야 속에서 산술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함으로써 이 경험의 근본적 성격을 거세해버리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정말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이 시간이 인류에게 던진 ‘감각 체험’의 충격과 전환에 관해 계속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러스트레이션 ⓒ권민호

압도하는 그 무엇의 체감이 예술의 근원에 자리한다

우리가 지금 ‘예술’이라고 부르며 그 범주 속에 넣는 음악, 시, 춤, 그림 등의 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룩하고 강력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외경과 관련된다. 이 존재는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데, 인간을 압도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감각되기 때문에 두려움과 경이를 동시에 동반한다. 그 힘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 두려움과 경이라면, 이와 관계 맺는 인간의 실천 양식으로서 찬양과 경배의 표현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음악, 시, 춤, 그림 등의 원시적 기원이다. 간단히 말해 예술 장르들의 원시적 기원은 ‘거룩하고 압도적으로 강력한 존재’와의 조우이며, 그에 대한 인간의 경배다.

생애 후반부를 ‘예술작품의 기원’을 사유하는 데에 바친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생산에 ‘존재 체험’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라는 작품생산의 구심점이 존재와 만나는 체험 형식이 ‘작품’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며, 따라서 시, 음악, 그림, 춤 등 예술작품에는 존재와 인간의 관계가 깃들어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지점은 예술작품이 작가 개인의 주관적 표현이나 생산품이 아니라, 작가가 만나는 존재 체험에 기반하여 ‘진리(세계의 실재)’가 드러나는 장이며, 작품에는 작가가 기반하고 있는 존재 체험, 특히 한 시대가 존재와 만나는 체험의 형식으로서 ‘근본기분(Grundstimmung)’이 깃들어 있다는 하이데거의 통찰이다. 작품에는 근본기분이 스며있고, 작가는 근본기분에 젖어 있으며, 작가-작품을 통해 그 근본기분이 바탕하고 있는 한 시대 ‘존재’의 모습이 드러난다.

원시예술이 자연숭배, 토템숭배, 범신론 등 주술적 형태로, 서양 중세의 예술이 기독교적 찬미로, 중세 동아시아의 회화예술이 자연에 대한 관념적인 완상이나 상징으로,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예술이 신적인 것 또는 신성한 것이 철저히 탈색화(20세기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를 ‘아우라의 상실·휘발’이라고 표현했다)되는 대신 인간 신체의 섹슈얼리티에 집중하는 일 등은 모두 작가가 그 시대의 존재와 만나는 근본기분의 다른 관계 양상을 보여준다. ‘팬데믹 이후의 예술’이라는 주제는 이미 예술을 작가의 주관적 표현 형식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문명사적 체험이 작가와 예술작품의 항유자 모두에게 예술행위나 작품을 둘러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체험, 즉 ‘근본기분’의 변화를 야기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즉 이후의 예술작품은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작가의 근본기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것이며, 그것은 작품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진리’ 체험의 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뜻이다.
일러스트레이션ⓒ권민호

지구적 관점의 도래는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키나

이 짧은 시론에 이 근본기분의 구체적 함의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이를 존재적 차원에서는 ‘인지하거나 감각되지 못했던 실재와의 조우’라고 명명하며, 이를 휴머니즘(humanism)의 철저한 해체와 지구적 관점의 도래라고 풀어쓰고 싶다. 이 풀이를 좁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인간중심적 관점과 서구적 현대성·세계관의 전면적 몰락이 들어 있는 것은 뚜렷하다. 이 해체와 몰락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이며, 예술작품은 이 계기에서 철저하게 체험되는 ‘진리’의 장이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지구가 멈추는 날> 같은 SF영화에서 나타나는 낯선 관점을 ‘이후의 예술작품’에서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다룬 SF영화다. 이 영화에는 외계인 클라투가 지구를 대표하는 미국국방장관과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왜 우리 행성에 왔습니까?”(미국국방장관)
“당신네 행성?”(클라투)
“예. 여기는 우리 행성입니다.”(미국국방장관)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클라투)

“당신은 우리의 친구인가요?”(미국국방장관)
“나는 지구의 친구입니다.”(클라투)



해리베이트(Harry Bates)의 단편소설 <Farewell to the Master>(1940)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인간의 친구’와 ‘지구의 친구’가 같은 뜻이 아니며, 지구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인간문명에 의해 위기에 처한 지구의 구원을 위한 외계인의 침공은 ‘인간침공’이지 ‘지구침공’이 아니다. 이는 사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팬데믹이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고 지구에서 뭇생명과의 공존을 파괴한 결과라는 자성을 미리 보여주는 인식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히말라야의 풍경을 도시에서도 처음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깨끗해지고, 인간의 이동을 제한하자 도시의 하천에서조차 사라졌던 물고기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세계 곳곳의 보고들도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스콧 데릭슨 감독 <지구가 멈추는 날> 2008, 출처: 다음 영화

이런 이야기는 종래에는 하나의 장르문학적 ‘상상력’으로 치부되었을 뿐 ‘사실-진리’로서 인식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휴머니즘적 태도,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근본기본’ 때문에 ‘진리’가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은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예술현상,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본기분을 뚫고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의 드러남은 인간문명사회에서 대중의 일반적 인식이 되기 어려웠다. 즉 예술가적 각성과 대중의 인식 사이에는 늘 괴리와 낙차가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영성적 각성 속에 사는 그루와 상투화된 사회제도로서 종교에 참여하는 ‘세속적 종교인’ 사이에 있는 존재 체험의 괴리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적 관점에서 인간문명의 비도덕성을 전면적으로 각성하게 됨에 따라 현존재(인간)의 근본기분에 대각성이 초래될 것이며, 이 각성은 특정 예술영역의 장르적 상상력을 넘어서 ‘이후 예술’의 기본적 무의식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예술적 그로테스크 혹은 ‘실재’의 귀환이라는 화두

종래에 ‘그로테스크 예술’이라고 치부된 것들의 불가해성도 이제는 마찬가지 차원에서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그로테스크(grotesque)의 핵을 이루는 ‘낯섦’은 대체로 작품의 핵을 이루는 실체, 즉 존재적 실재에 관한 예술향유자 관점에서의 해석적 수수께끼를 뜻한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실은 세계의 실재, 즉 ‘진리’에 관한 인간의 미망(迷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편혜영의 소설 <사육장 쪽으로>(2007)에는 신혼부부의 평화로운 일상을 난데없이 깨뜨리는 ‘개의 습격’이라는 ‘그로테스크’가 스토리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새>(1963)에서 끝까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난데없는 새의 습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인간중심주의를 지구적 관점으로, 즉 뭇 생명의 관점을 포괄한다면 더 이상 해석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다. 편혜영의 소설에서 이 습격은 스토리가 아닌 제목 ‘사육장 쪽으로’를 통해 암시된다. 개의 습격은 인간이 잡아먹기 위해 개를 가둬 둔 ‘사육장’ 때문에 일어난 개의 ‘정당한’ 분노를 ‘소설적으로(예술적으로)’ 드러낸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새의 습격’은 마찬가지로 자연을 침탈하는 인간에 대한 새의 ‘정당한’ 공격을 암시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정신분석의 개념을 이용하여 예술작품이나 대중문화에서 드러나는 이런 그로테스크를 ‘실재(the real)’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문명의 근본기분, 특히 지구적 보편주의가 되어버린 서구적 현대성의 기본적 태도를 의심해 보게 되는 순간, 작품의 그로테스크는 세계의 실재를 드러내는 ‘진리의 장’이 된다. 이것은 서구문화의 기원이자 끊임없는 예술적 영감의 대상이 되었고, 서구적 현대성의 기원이자 반성의 영감이 되기도 한 그리스비극의 탐구주제인 ‘죄-하마르티아(hamartia)’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지도 모른다. 영웅도 인식하지 못한, 그리하여 대부분의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에 대해 지구적 관점을 포괄하는 예술적 통찰의 등장 말이다.

팬데믹 이후 시와 소설과 영화 등 특정 장르적 양상으로 드러난 예술적 그로테스크는 이제 대중 전반에게 뚜렷한 각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그로테스크의 바탕에 있는 실재-존재 체험은 예술작품의 구심점이 되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문명 일반의 근본기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제 그로테스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함의한 특정한 예술 장르의 표현 양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아포칼립스(apochalypsis, Απōκάλυψις)’는 미래사회를 상상하는 SF문학 장르의 지위에서 벗어나, 본래 그 그리스 어원이 지닌 종교적 함의인 ‘은폐를 열기’ ‘가려졌던 것을 드러내기’라는 ‘진리’ 체험을 예술행위와 작품의 근본기분으로 삼는 예술 일반의 모델이 될 것이며, 아포칼립스화된 예술작품은 이 진리를 문명에 고지하는 중요한 임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떠맡게 될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권민호

문명에 스며든 ‘불안’의 정서를 협소한 휴머니즘 탈피의 가능성으로

‘정서적’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예술적 각성은 작품뿐만 아니라 문명 일반에 ‘불안’이라는 정서가 전면적으로 침투하게 됨을 뜻한다. 바이러스처럼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존재,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갈 수 있으며,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막거나 통제할 수 없으며, 문명을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도 있으나, 분명히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이 전능한 존재는, 결국 고대 예술작품이 의지했던 ‘신적인’ 존재의 21세기 버전이다. 실제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남미 고대문명을 간단히 멸망시키고 그 인류를 멸종시켰던 유럽인들의 몸에 실려 온 바이러스를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은 ‘신의 손’이라고 불렀다. 신적인 존재, 비가시적인 거룩한 존재 체험에 대해 고대인들은 ‘경배’라는 형식의 실천을 통해 예술행위를 출현시켰으나, 이미 휴머니즘을 체득하고 과학·기술을 가진 이 시대의 인간들은 결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를 ‘경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대와 같이 부적으로 그 ‘신적인 존재’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팬데믹을 통해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해체를 경험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지구인’ 존재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를 잃어버린 채 강제로 초역사적 시야를 갖게 된 지구인으로서 인간의 근본기분은 그러므로 ‘불안’이 될 것이다. 무언가 확인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도처에 있다. 예술작품에는 그 존재 체험으로서 불안이 주된 무의식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야말로 어쩌면 휴머니즘에 국한된 협소한 인간윤리가 지구적 시야 또는 우주적 감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의 촉매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함돈균_문학평론가, PaTI 인문연구소 소장
문학펑론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인문연구소 소장. 인문정신의 사회적 실천과 시민교육의 진화를 위한 많은 글과 교육적 시도들을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 교육사회혁신대담집 <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 등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림 권민호_일러스트레이터,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마루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와 왕립예술대학원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드로잉과 영상을 기반으로 일러스트레이션과 순수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관찰에 기반을 둔 재현 그림으로 생각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엮는다. 우리 근·현대의 풍경을 소재로 지금 우리 삶을 보이려 노력한다. 색을 다루는 것이 서툴러 잘 쓰지 않지만, 때론 ‘움직이는 빛’으로 그림 위에 색을 입힌다. 이 글과 함께 매칭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은 인간 문명의 한계치, 폭발, 그리고 재시작을 시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