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중문화의 키워드로 떠오른 ‘레트로’ 열풍. 낯선 과거의 문화를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향유하는 레트로 열풍의 포문을 연 것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그만큼 이 시기의 문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친숙한 동시에 낯선 문화로 다가오고,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표정과 역동성을 발견해가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당대의 대중들이 향유한 대중음악 역시 이러한 다양성과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 유행한 대중가요 중 많은 수가 현재의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알려져 있고, 당대에 사용된 음악 양식 중 일부는 ‘트로트’라는 장르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당대 대중음악의 다양성과 역동성 중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한국인이 작사, 작곡하고 한국 가수가 노래한 본격적인 한국 대중가요는 1932년에 발매된 <황성의 적>(이애리수 노래,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을 최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황성의 적>의 발매되기 이전부터 외국곡을 번안한 <사의 찬미>, <카츄샤의 노래> 등이 큰 호응을 받았고, 1928년에는 홍난파와 백명곤이 창단한 ‘코리아재즈밴드’의 첫 공연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언론에는 “미국 재즈밴드의 패왕, 폴 화이트먼”**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재즈 열풍을 우려하는 “서울맛 서울정조-경성의 재즈”***라는 논설이 실리기도 했다. 즉 이 시기 경성의 청년 대중들은 한국의 대중가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서양 대중음악의 어법에 친숙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중가요 음반은 노래의 제목과 더불어 곡종명, 즉 음악의 장르를 명기하고 있었는데, 이 장르 명칭들은 대략 유행가, 신민요, 만요, 재즈송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재즈송이라는 곡종명으로 발매된 노래들 외에도 많은 경우 셔플리듬, 스윙, 빅밴드 양식의 반주를 사용했으며, 탱고, 룸바, 플라멩코, 볼레로, 아바네라 등 다양한 춤 리듬을 사용한 노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박단마가 노래한 <끊어진 테프>(강영숙 작사, 전수린 작곡)는 ‘탕고’라는 곡종명을 사용하였으며, <룸바는 부른다>(이난영 노래, 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 <룸바의 도성>(김정구 노래, 이성림 작사, 손목인 작곡) 등 제목에서부터 이국성을 드러낸 경우도 많았다. 이난영은 <다방의 푸른 꿈>과 <바다의 꿈>에서 블루노트가 포함된 본격적인 블루스 양식과 스캣 창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중국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얼후, 공, 징 등을 사용하여 중국풍 음향을 연출하기도 했다. 신민요로 발매된 음악들에서는 피리, 장구, 가야금 등을 사용하여 전통적 음향을 연출했다. 즉 이 시기의 대중가요는 당대에 접할 수 있었던 세계 각국의 음악양식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 대중음악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중 하나는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恨)”을 담고 있다는 편견이다. 이는 이 시기의 대중가요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노래들이 <목포의 눈물>이나 <타향살이> 같은 비탄의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 당시가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편견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에 발매된 대중가요의 가사를 분석해보면, 망향이나 신세 한탄 같은 비탄의 정서를 담은 노래가 61.6%로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기쁨, 희망, 풍자 등의 정서를 담은 노래의 비중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음악양식과 정서를 담고 있었던 대중가요는 1930년대 말부터 전쟁과 불황으로 음반 산업이 난항을 겪게 되면서, 음반 제작을 넘어 공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선두주자는 오케레코드사 전속인 ‘조선악극단’이었다. 악극은 1920년대에 신파극의 흥행을 위해 삽입한 막간극과 일본의 소녀가극단에서 영향을 받은 ‘배구자악극단’, ‘삼천가극단’ 등의 활동을 통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들 악극단이 1930년대에 큰 인기를 얻는 것에 주목한 음반사들은 자회사에서 발매한 음반을 홍보하기 위한 공연에서 규모를 확대하여 본격적인 공연산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초창기 악극단의 공연이 일본 소녀가극단을 모델로 하여 레뷰나 버라이어티쇼로 구성되었던 것처럼, 조선악극단의 공연 역시 버라이어티쇼의 형태로 무대를 구성했고 이는 큰 인기를 얻었다. 후속주자인 라미라가극단이나 반도가극단처럼 규모가 큰 하나의 악극을 선보인 경우도 있었지만, 당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악극단은 악극, 춤, 노래, 만담이 모두 포함된 버라이어티쇼 형태의 악극을 선보였다. 또한, 당대의 대중가요가 그랬던 것처럼 악극단의 공연 역시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지의 다양한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형태였다.
일제강점기의 대중음악은 정치적 검열과 한계 속에서도 다양한 장르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전개과정에는 물론 정치적인 맥락이 크게 개입되었지만, 동시에 당대 대중들의 취향도 매우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현대의 대중음악계만큼이나 다양한 지역의 음악어법이 사용되었고, 다양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었다. 한국 근대의 대중음악을 재조명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일제강점기 대중음악이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표정들이 함께 재발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유정, <근대 대중가요의 지속과 변모>, 소명출판, 2012.(128쪽)
**<동아일보>, 1928년 9월 4일.
***<별건곤>, 1929년 9월호.
****이은진, ‘근대적 여성성의 구성과 훈육: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여성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