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Overview
디지털 시대의 관계 맺기 방식과 행동 양식에 관심을 갖는 예술공동체 제로그램(Zerogram, 배하영, 송하은, 신범균)이 주목한 것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는 온라인 국면으로의 전환이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거의 기습적으로 도래한 비대면 상황과 맞닥뜨려 사회 대부분의 요소가 온라인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타인과의 소통 방식 또한 다른 차원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인터넷과 SNS의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온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조금은 색다르고 유별나게 여겨졌던 양상들마저도 보편적 인식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제는 물리적 세계를 대체하기까지 하는 사이버 세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제로그램은 이처럼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사이버 세계의 영역을 확대하는 현상에서 ‘사이버 공간상 소통의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사이버 세계는 발화자의 배경이나 신체적 조건 등이 숨겨지고 오로지 스스로 설정한 페르소나만이 드러나는, 현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이다. ‘주어진 나’의 모습이 아닌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더욱이 팬데믹으로 인한 뉴노멀 시대에 들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하며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굳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과 변화상을 보여주는 사이버 공간 속에서, 제로그램은 새로운 시대의 소통 방식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로그램은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게임의 가능성을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해나간다. 특히 “아무 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동물의 숲’ 게임은 그 자유도와 유연성으로 인해 이미 단순한 게임 이상의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좌절된 사회적 활동의 대체재로서 주목받고 화제가 되면서, 디지털 생태계이자 그 너머이기도 한 그 이중성과 유기적 넘나듦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물리적 세계의 차원에서 사이버 세계의 차원으로 이행하고 넘나드는 가운데 있다면, 예술 또한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이에 제로그램은 커뮤니케이션 게임 ‘동물의 숲’에서 비대면 퍼포먼스 및 전시를 선보이고자 한다. ‘동물의 숲’은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커스텀 한 캐릭터를 내세워 자유롭게 섬을 꾸미고, 다른 플레이어와 캐릭터 대 캐릭터로 만나 소통하는 게임으로 '사이버 공간상 익명적 페르소나를 매개한 소통의 긍정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매체이다.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모든 관객은 자신이 커스텀 한 캐릭터의 모습으로, 즉 가상의 차원에서 스스로 창조한 페르소나로 퍼포먼스에 참여하게 되며, 이 또한 퍼포먼스의 일부를 이룬다. 이번 작업은 남산골 한옥마을을 새롭게 재탄생시킨 가상공간과 설화적 요소를 접목하여 선보인다.
퍼포먼스를 포함한 전시 <대기, 대기, 대기, 통신>은 이렇듯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통신을 기다리는 대기 신호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마주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전시 및 공연의 주인공 스스로를 디지털 공간에서 떠돌아다니는 다소 낯선 존재인 ‘사이버 정령’으로 정체화해 웹 공간 플랫폼을 제작하고, 이를 활용하여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주인공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환경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러한 탈출의 과정 속에서 어느덧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오히려 통신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나아가 디지털 사회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글 : 허명진 (협력큐레이터)
Artist Interview
Q. 제로그램은 무슨 뜻인가요? 팀 소개를 해주세요.
A. 저희 셋(배하영, 송하은, 신범균)을 디지털 공간에서 떠돌아다니는 ‘사이버 정령’으로 정체화해 웹 공간 플랫폼을 제작하고, 이를 활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어요. 저희가 창조하고 서식하는 공간 속에서 기존의 육체를 벗어나 캐릭터로서 존재하고, 관객들 역시 가상의 페르소나로 작품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요. 팀명인 ‘제로그램’은 이러한 가상 존재의 무게이자 디지털 시대의 성질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해요.
Q. 이번 작업은 ‘동물의 숲’이란 게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왜 ‘동물의 숲’을 선택했나요?
A. 매니악한 장르가 아니라 생활게임이고, 특별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승부욕을 요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현실이 아닌 다른 차원이 뚫려서 쉬고 오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고, 여백이 많아서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특성이 있어요. 게임 속에서 전시를 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활동을 이어서 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어요. 생일파티를 열거나 결혼식, 졸업식은 물론 시위를 게임으로 옮겨가서 진행하기도 하는 등 많은 이슈가 되었죠. 가장 최근에는 미국 대통령 후보 또한 선거 유세를 위한 섬을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걸 보면서 공연도 할 수 있겠구나 생각돼서 연초 상반기에 공연을 진행했고, 그걸 토대로 이번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Q. 그러면 선택의 자유도가 상당히 높다고 생각되는데, 이번 작업에서 가상 캐릭터나 설화의 요소를 가지고 작업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A. 팀의 정체성을 사이버 정령이라는 콘셉트로 정하고서 활동하고 있는데, 현대인의 삶에서 가상 세계의 영역이 확대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세계에서 각자 살고 있는 현실의 물리적 삶과 다른 별개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것에 주목했어요. 극의 전체적인 주제 또한 이와 연관되고 있고, 주인공도 가상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죠. 가상의 캐릭터도 사이버 정령인 저희 셋 중 누구든 연기할 수 있게 해서 캐릭터의 다중적 성향을 부각시켰어요. 또 남산골이란 공간이 전통적 측면이 있고, 남산골 섬이라고 새롭게 꾸민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전설을 통해 새로운 스토리를 대입시키면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흥미로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Q. 남산골한옥마을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무대 배경의 섬을 남산골 구조를 참고해서 설정했어요. 장소마다의 의미를 고려해서 공간을 재해석했죠. 또한 기와집, 단장 등 활용해서 표현하고 동선 또한 유사한 형태로 설정해서, 남산골 한옥마을을 모델로 한 가상세계를 만들게 된 거죠. 웹상에서 퍼포먼스가 없더라도 이 꾸며진 섬이 남아 있어서 계속해서 접속할 수 있도록 했어요. 꾸며놓은 섬을 저장해서 배포도 가능하고요. 추후에 활용해서 행사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큐알코드 등을 통해 공연의 흔적을 남겨놓아서 사후에도 어떤 공연이 있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또한 온라인 안에 온라인 전시를 만들어 공연에 사용되었던 오브제 등을 볼 수 있게 하거나, 공간별로 공연을 기억할 수 있는 굿즈를 만들어 제공할 계획도 있어요.
Q. 주인공이 섬을 탈출하려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도움을 받는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이 섬의 안내자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A. 주인공이 데이터 조각으로 돌아다니다가 낯선 곳에 떨어져서 보니 남산골 섬인데, 그곳으로 온 사람들과 함께 탐험하는 입장에서 진행이 이루어져요. 하나의 큰 섬을 무대로 활용해서 넓은 섬을 한 바퀴 도는 루트를 통해 서사를 이끌어 가는데, 함께 이동하며 장소마다 미션을 수행하면서 포탈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보시면 돼요. 꽃밭에서 특정한 꽃을 따서 머리에 꽂기,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고 가기 등 서사를 최대한 간략하게 하고 체험 위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설계했어요.
Q. 포탈은 어떤 관문과도 같은, 예를 들어 인터넷 포탈 같은 의미를 담고 있나요?
A. 여기서는 일종의 제단으로 설정했는데, 데이터 조각으로 돌아가느냐가 그렇지 않느냐 결정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어요. 주인공은 사이버 세계에서 왔으니 데이터 조각으로 흩어지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미션을 참여하면서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요. 자세한 건 공연에서 확인하시면 될 것 같아요. 신화에서도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에서 미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공간도 일종의 중간 지대인 거죠. 사이버 세계라는 게 물리적이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그런 곳이잖아요.
Q.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갖고 있지 않아도 관람이 가능한가요?
A. 물론이에요. 12월 5일에 진행되는 본 공연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서는 닌텐도 스위치 기기와 게임 타이틀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플레이 가능한 상태여야 하지만, 게임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당일 공연과 동시에 송출되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관람하실 수 있어요. 또한 공연 후 배포되는 ‘꿈번지’ 기능을 통해 전시기간 이후에도 기기로 접속해서 공간을 체험할 수 있고, 본 공연 전 11월 30일부터 오픈되는 웹 공간을 통해서도 전시를 즐길 수 있어요.
Q. 이 작업은 공연과 게임의 요소가 공존하는데, 공연을 즐기던 시각과 게임을 즐기던 시각에서 이 작업을 접하면 서로 느끼는 게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관객이 이 공연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요?
A. ‘모여라 동물의 숲’으로 아브라모비치 작품의 재연이 있긴 했는데, 공연의 사례는 아직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공연으로 즐기든 게임의 차원에서 접근하든, 저희는 이런 시도도 가능하구나 하는 지평을 열고 제시한 것일 뿐이에요. 게임으로서의 공연이 가능한가, 질문 던지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비대면 공연이라는 데 주목하기보다 자기가 가진 경험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마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평소에 공연 관람하면서 느끼듯이 자연스럽게 감상하면 얻어가는 게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기존 공연 경험의 느낌을 가져온다기보다 새로운 형식을 즐긴다는 생각으로 봐주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