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기획공연 <춘풍의 처>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축제, 

<춘풍의 처>

 

2016 <춘풍의 처> 포스터

 

극작가 오태석 선생님과 극단 목화는 30년을 넘게 함께 작업하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을 연극 속에 발효시키며 신명나는 오늘날의 연극으로 재탄생시키고, 그 안에 우리의 아픈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녹여내지요. 그래서 오태석 선생님이 쓰고 목화 배우와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으론 슬프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인정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따스하기도 하고, 때론 우리의 가락으로 어깨가 들썩이게 하기도  하지요.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에 불이 들어오거든 관객들이여, 그냥 마음 턱 놓고 배우들이 이끄는 대로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 안에서 우리는 잊었던 옛 모습들을 하나둘씩 새롭게 경험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혹은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집의 돌담, 초가의 지푸라기, 장독대의 항아리, 마당의 흙냄새, 멍석, 할머니의 자장가, 고무줄놀이하며 부르던 노래, 어머니의 빛바랜 광목 한복, 어머니가 수고스런 공정을 거쳐 만드신 도토리묵, 구불구불한 시골의 밤길, 구수하고 맛깔스런 말씨들...

엉겁결에 저지른 실수로 치명적인 아픔을 오래 오래 주고 받고 지금까지도 피 흘리며 아파하는 모습들, 그래도 그것을 감싸는 사람 사이의 은근한 정들, 그 상처를 묵묵히 안아주는 자연... 그 모든 것들이 무대의 조명 속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빛날 거예요. 거기에 우리들의 추억을 더해 함께 만들어가다 보면,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장단에 몸을 싣고 따라가다 보면, 평소 살아가기 위해 얼굴에 두텁게 썼던 가면들이랑 벗어던지고 과거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춘풍의 처>는 그러기에 아주 좋은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1976년에 초연된 이래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과 일본 미국 등 다양한 곳에서 거듭 공연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2016년 <춘풍의 처> 공연 장면

우리는 이 공연에서 힘찬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만날 거예요. 지난한 환경 속에서도 자식 키우고 야무지게 살림하고 허랑방탕한 남편 대신 길쌈장사로 돈도 많이 벌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심달래라는 이춘풍의 아내를. 그녀는 소박 맞았다고 안방에 쳐박혀 우울증에 빠져 무기력하게 기다리지 않지요. 평양 기생 추월이에게 빠져 넋이 나간 남편을 찾아 머리채라도 휘어잡고 집에 돌아올 기세로 전 재산 복대에 차고 용감하게 길을 떠나지요. 

조선조라는 시대적 배경이니 그때에 여자 혼자 한양에서 평양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겠어요. 그래도 모든 영웅은 위험을 무릅쓰고 안전한 고향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법. 걸어서 한양에서부터 기나긴 여정을 거쳐 평양까지 가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덕중과 이지라는 조력자를 만나지요. 그들과 함께 가는 지난한 여정을 우리는 지켜보는 거예요. 산 넘고 강 건너 가는 험난한 길,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고 전 재산을 도둑 맞기도 하고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내 놓고 벼슬도 사야하는 그 길에 우리가 동행하는 것이지요. 그녀가 세 번이나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는 그 길을 말이에요. 

 

공연에 등장하는 춘풍(송영광)과 처(이준영)



그녀는 도대체 왜 남편을 찾아 나설까요? 전혀 싹이 보이지 않는 남편을 찾기 위해 심달래는 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까요? 

 

그 슬픈 이야기를 왜 악사들은 신명난 가락으로 표현하고, 배우들은 거기에 더욱 흥을 더해 춤을 추는지.

 

그것은 비단 심달래의 삶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절실히 갈망하는 것은 그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들에는 감사는커녕 관심조차 없고, 단지 결핍된 그 무엇만을 바라보고 갈망하며 질주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해요. 심달래의 남편을 향한 갈망과 집착이 우리의 것과 어느덧 겹쳐 보이면, 그녀는 더 이상 극 속의 인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되는 거지요. 우리의 결핍, 집착 그리고 갈망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생각해볼 수 있지요. 배우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마음으로.  

 

오태석 연극세계와 <춘풍의 처>에 대한 분석이 궁금하면 제가 오래전에 썼단 논문을 조금 발췌하고 수정한 다음의 글을 읽어 보세요.

 

리허설 무대에서 단원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오태석 연출가


오태석은 <웨딩드레스>(1967년)로 등단한 이래 초기에서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실주의극에서 거리를 취하며 모더니즘 계열의 연극실험을 하면서 인간 사이의 소통단절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1972년 <쇠뚝이놀이>에서부터 시작된 전통미학의 실험은 <춘풍의 처>(1976년)에서 본격화된다. 그는 고전소설 <이춘풍전>의 뼈대에 탈춤의 미얄과장, <별주부전> 등을 인용하고 변주하면서 <춘풍의 처>라는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창고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이 작품은 극장에서 뿐 아니라, 식당건물 심지어 테니스장(공주사범대) 등 야외에서도 공연되었다. 특히 둔덕 아래 있는 테니스장에 백열전등을 십자로 밝혀놓고 했던 이 공연에서 관객(교수와 학생들, 공주시민 등으로 이루어진)과 나누었던 교감을 오태석은 잊지 못한다. 우리 조상 때부터 즐겨왔던 산대놀이의 저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이후 오태석은 40년을 우리 전통미학을 정제하고 현대적으로 변용하면서 심도 있는 연극세계를 만들어 왔다.

 

2016년 <춘풍의 처> 공연 장면


 <춘풍의 처>에서 우리는 심달래라는 기상 있는 한 여성을 만난다. “길쌈장사 수삼 년 만에 천하부자 석숭이도 못 당할 만큼 돈을 벌”어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그녀다. 노동력과 경영력을 동시에 지닌 유능한 그녀에게 단 하나의 결핍이 있다면 남편의 사랑이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바로 항상 결핍된 것을 갈망한다는 사실이다. 비어 있는 구멍, 결핍된 그 무엇을 향해 질주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달래의 남편을 찾는 과정은 인생의 축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관객은 그녀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갈망의 추구 과정을 차츰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바라보게 된다. 

 

 그녀의 이상은 남편을 찾아 “아들 낳고 딸 낳고 명주 낳고 베 낳고 정자 좋고 물 좋은데 일간초당 집을 짓고 진자리는 내가 눕고 마른자린 영감이 눕고 한평생 살아” 보는 것이다. 남편이 있어만 주면 자신의 온갖 노동과 희생으로 초당(草堂)안의 유토피아를 이루려 하는 것이다. 남편이 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더구나 유교적 담론 안의 여성은 단 하나의 남편만 허락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들과 딸을 낳을 수 있게 하고 명주와 베를 낳을 심리적 배경이 되어 줄 남편은 하나의 남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이 언급하는 갈망의 원천으로서의 남근이다. 남근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사랑은 ‘낳는’ 행위로 완결된다. 무대 위 한 번의 죽은 시늉과 세 번의 죽음은 모두 생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우선 떠나버린 생명의 원천을 부르기 위해 죽는 시늉을 한다. 남편의 폭력으로 죽음을 맞이한 달래는 죽은 아이들 소리를 내는 경을 듣고 살아난다. 두 번째 죽음에서도 봉사가 후행으로 장송곡을 부르는 대신 ‘사랑가’를 부르니 깨어난다. 남편과의 하룻밤을 위해 그녀는 고통스럽게 자신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자른다. 이렇게 죽었다가도 다시 살게 하는 강렬한 욕망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생명을 ‘낳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바친다.

 

2016년 <춘풍의 처> 공연장면

 긴 여정을 거쳐 드디어 그 생명의 원천인 남편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지만 그는 추월을 찾아 울부짖다 기함하여 쓰러진다. 이때 그녀는 상상계에 있던 인간이 모든 걸 불사하고 갈망의 대상에 다가갔을 때 느끼는 허무를 드러낸다. 막상 그 대상에 다가가 보니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심달래는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떠나려 한다. 그녀는 이 장면에서 “서방도 고만이다” 하고 쓰러져 있는 남편을 일으켜 쳐 버리고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던지고 “어허이, 시원하다”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간다. 그녀의 두루마기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지막 남은 한 배를 팔아 얻은 권력의 표상이다. 그때까지의 심달래의 지난한 추구의 과정에 감정이입을 한 관객이라면 이 지점에서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지금껏 무엇에 그리 집착했던가하는 물음은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가 삶의 과정에서 집착했던 그 무엇에 대한 물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춘풍의 처> 공연장면 
 
 

 그러나 <춘풍의 처>는 그러한 불교적 공(空)의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심달래는 자신의 갈망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끝까지 다가간다. 훠이 떠나 버리려고 발걸음을 옮기다 뒤돌아 무대 위에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추월의 치마로 남편을 유혹하여 마지막 성행위를 한다. 이때가 <춘풍의 처>에서 심달래의 가장 큰 에너지가 무대 위에서 발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모든 심리적 갈등을 뛰어넘어 다른 여인의 이름을 빌어서라도 마지막으로 남편을 끌어안는 이 장면에서 심달래는 무당이 작두를 타듯이 고통과 희열로 춘풍 위에서 요동친다. 이렇게 죽음 직전에 마지막 에너지가 폭발하고 성행위는 다름 아닌 남편이자 아들인 생명을 낳는 것으로 연결된다. 괄목할만한 점은 이 시점의 심달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죽음으로 해체되어 가며 아이를 낳는 그녀의 몸은 “임신한 노파”와 같은 카니발적 몸에 다름 아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적 존재로서의 춘풍의 처는 그 자체로서 축제의 몸을 형상화한다. 죽어가는 몸으로 성행위를 하고 출산하면서 죽는 심달래의 삶과 죽음은 자연 만물의 순환구조와 일치한다. 심달래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가며 결국 단 하나뿐인 남편을 만나 생명을 태어나게 하며 죽는다. <춘풍의 처>에서 특이한 점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바로 이춘풍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새로 태어나서도 전혀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이렇듯 심달래의 원(願)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고, 갈망의 속성이 영원한 결핍이기 때문에 관객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삶의 한과 겹쳐진다. 그리하여 무대와 객석을 잇는 씻김굿이 필요한 것이다. 생명의 화신으로서의 추월이 무녀로서 무대와 객석에 물을 뿌리며 모두의 원을 풀어내는 굿은 연극화된 제의 안에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글_이상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저서로는 <한국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의 기능(독문)>, <희곡과 연극의 담론>, <오태석 연극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