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기획공연 <예인, 한옥에 들다>
오늘의 예인 - 안옥선 인터뷰
음악으로의 삶을 열어준 가야금 소리
글_김보나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가야금병창 이수자 안옥선
귓가에 들리던 가야금 소리를 듣고 그냥은 지나칠 수 없었노라 말하는 안옥선은 단 한 번도 인생을 계획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
늘 음악이 이끄는 대로 충실하게 행복한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음악으로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 안옥선의 목표다.
소녀, 가야금에 매료되다
안옥선은 어린 시절, 발걸음을 붙잡는 가야금 소리에 이끌려 음악을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안옥선을 매료시킨 소리는 이모 강순영(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5호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보유자)이 연주한 신관용류 가야금산조였다. 이때부터 안옥선에게 음악은 스스로 흥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가히 절대적인 것이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남원국악원’에서의 공부를 통해 안옥선은 많은 걸 배웠다. 가야금, 소리, 무용, 타악까지 안 해본 장르가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의 기초를 다졌다.
“기본적인 건 다 배웠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큰 혜택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름도 다 기억이 안 날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누구하나 빠질 것 없이 훌륭한 선생님들께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잔잔하면서도 깊은 소리,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어린 시절 들었던 가야금 소리는 이모가 연주하는 신관용류 가야금산조였다.
“신관용류는 다른 산조보다 하청에서 시작해요. 보통 ‘미’음으로 시작하는데 신관용류는 ‘레’음에서 시작하거든요. 음악이 테크니컬하게 구성된 건 아니지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해져서 좋아요. 마치 유순한 여자애 느낌이에요.”
신관용류 가야금산조에는 농도 짙은 계면 성음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격한 감정을 쉬이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절제된 감정표현 때문에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가리켜 연주하기 어려운 산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안옥선은 그런 신관용류 가야금산조가 자신의 정서와 잘 맞았다고 말한다.
“연주하면서도 혼자 멋있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래도록 앉아서 연습하곤 했죠.”
안옥선이 참여한 단 한 장의 음반
안옥선은 세상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공연도 많아야 1,2년에 한 번 하는 정도이고 음반이나 방송에 출연하는 일도 즐겨하지 않는다. 과거 다수의 음반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언니 안숙선과 함께 작업한 것이었고 온전히 안옥선의 이름으로 음반을 낸 것은 <안옥선 바람의 길> 1장뿐이다.
“음반을 내거나 방송 출연을 하려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전 온전히 음악만 생각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거든요. 예인으로서의 자존심이죠.”
음반 <바람의 길>
안옥선의 음반 <바람의 길>에는 최옥삼류 가야금산조와 살풀이 반주가 담겨있다. 이 외에 안숙선과 함께 녹음한 음반에는 안옥선이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연주하고 안숙선이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를 연주해 담았다.
“보통 최옥삼류 가야금산조가 남성스럽고 강렬하다고 하는데 전 오히려 강태홍류 산조가 남성스럽다고 생각해요. 꺾이는 선율도 그렇고 몰아붙이면서 리듬을 가지고 노는 것도 강렬하니까요. 그런데 어릴 땐 이렇게 딱딱 끊어지는 음들이 싫었어요. 나중에 음반을 낼 때도 언니랑 한 가지씩 나눠서 해야 하니까 제가 신관용류 산조를 타고 언니가 강태홍류 산조를 탔죠.”
강렬하면서도 절절했던, 스승 함동정월의 가야금
안옥선에게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는 특별했던 스승과의 인연으로 귀결된다. 함동정월이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보유자가 되기 전부터 연을 맺은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이기 전에 스스럼없는 말동무였고 의지하는 벗이었다.
“함동정월 선생님은 제게 특별한 스승이셨어요. 늘 옆에 앉아서 선생님이 해 주시는 세상 이야기를 듣곤 했죠. 그 끝에 선생님의 연주를 들으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고 마음이 쓰였어요. 타고난 예인 기질이 워낙 높은 분이셔서 강렬하고 절절한 심정이 음악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올 정도였거든요. 어떤 이는 선생님의 가락을 두고 매번 달라진다고 하지만 그건 음악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진계면의 범위 안에서 탁월하게 음악을 가지고 노는 거지 틀리거나 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선생님은 가야금뿐 아니라 병창도 잘하셨어요. 목소리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요. 다재다능한 천생 예인이셨죠.”
함동정월을 추억하는 안옥선의 얼굴엔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스승의 절절한 소리만큼이나 추억 또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KBS에서 전화가 왔어요. 선생님 제자니까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반주를 하러 오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 반주를 하기로 약속 하시고 못 지키셨으니 대신 오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악기를 챙겨서 택시까지 타고 방송국으로 갔던 기억이 나요. 덕분에 훌륭한 선생님들과 한 무대에서 즐겁게 연주했죠.”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안옥선의 증언은 1977년으로 이어진다. <KBS 창극시리즈 춘향가>에 안옥선의 이름이 올라있는데 무려 7회에 걸쳐 연속으로 방송됐다. 함동정월은 “후에 예능 보유자가 되면 안옥선을 수제자로 부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제자를 아꼈다. 하지만 안옥선은 스승의 음악을 배운 것으로 만족하고 함동정월이 보유자가 된 후엔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두 명의 스승에게 배운 가야금병창
안옥선은 언니이자,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가야금병창 보유자인 안숙선과 함께 박귀희의 병창을 사사했다. 하지만 정해진 대로 공부하는 것이 힘들어 꾀를 부리기도 하고 더러는 공부하러 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안숙선이 제2의 스승이 되었다.
“병창은 성인이 된 후에 박귀희 선생님에게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훌륭한 교육자셨는데 그땐 공부가 힘들고 어려워서 꾀를 부리고 안 나가는 경우도 있었죠. 그럴 땐 오히려 언니한테 많이 배웠어요. 언니는 불평불만도 없이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거든요.”
안옥선과 안숙선 그 중간쯤
2016년 6월 10일, 제자들과 함께 남산골한옥마을 민씨 가옥에서 가야금 병창을 선보인 '오늘의 예인' 안옥선
대부분의 연주자들에게 우선순위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직장이다. 하지만 안옥선은 직장에 매어있던 시간보다 늘 새로운 음악을 만나고 연구하는 순간이 훨씬 즐거웠다고 말한다. 물론 언제나 든든하게 비를 가려주는 언니의 존재 덕분에 가능했노라 고백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이어졌다는 안옥선은 언제나 사심 없이 음악을 사랑하는 게 먼저다.
“제가 그랬듯이 후배들도 어떤 계산이나 사심 없이, ‘그냥’ 음악이 좋아서 하는 거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희 언니처럼 미래에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그래서 지금 뭘 할 건지 스스로 고민하고 계획하는 프로정신도 필요해요. 안옥선과 안숙선을 섞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죠.”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안옥선의 자유로운 음악 인생은 이 문장 위에 쓰인 것이다. 그래서 음악인으로의 삶을 걷고자 하는 후배들 역시 그 문장 위에 자신의 삶과 음악을 새기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