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기획공연 <예인, 한옥에 들다> 

오늘의 예인 - 박송희 인터뷰

최고령 소리꾼의 삶이 녹아든 소리

글_김보나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박송희
 

‘신의’를 지키라는 스승의 말씀을 따라 소리에 대한 신의,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살았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굽이굽이 넘어 이제, 봄날 만개한 꽃처럼 온화한 미소로 관객과 마주하는 소리꾼, 박송희를 만나본다.

 

 

음악 학교, 광주권번에서 창극단까지 

박송희는 1927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어린 박송희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광주권번’에 입학시켰는데 그때의 ‘광주권번’은 지금의 음악 학교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그렇게 소리꾼 박송희의 삶이 시작됐다. 

“권번에 들어가 몇 년간 소리 공부를 하고 졸업과 동시에 ‘동일창극단’에 입단했어요. 창극단에 유명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거기서 연기도 배우고 토막소리도 배웠죠.” 

박송희가 19살이 되던 해, 동일창극단은 해방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고 어린 나이에 만주까지 따라갈 수 없었던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극단이 신의주에 있을 때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그길로 돌아온 창극단 사람들은 조국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극단 사람들이 계몽운동 하는데 '같이 갈래?' 하기에 따라 나섰어요. 그때 광주 경찰청장의 차를 타고 다녔는데, 거기서 남편도 만났죠.” 

 

 

소리 인생을 열어준 스승, 박녹주

박녹주는 박송희에게 본격적인 소리 인생을 열어준 스승이었다.

 

남편과 함께 광주에 살던 박송희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건 임방울의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방울은 소리로 ‘통정대부’의 품계까지 받았던 동편제 소리꾼, 이동백 선생의 추모식에 가자며 박송희를 서울로 불렀고 서울에 올라온 박송희는 그 길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곧 광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 시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상을 지낸 뒤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어요. 그때 소리가 배우고 싶어서 돈도 없이 무작정 박녹주 선생님을 찾아갔죠. 근데 선생님께서 ‘돈이 무슨 필요가 있나! 소리만 잘하면 됐제. 사람은 신의만 있으면 된다’하시곤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어요. 그때부터 선생님이 계시던 종로로 또, 면목동으로 소리 공부를 하러 다녔죠.” 

박녹주는 어려운 시절 배까지 굶으며 공부하러 찾아오는 제자를 위해 조용히 어묵을 사서 먹이며 은근하고 깊은 사랑을 제자에게 주었다. 박녹주는 박송희에게 본격적인 소리 인생을 열어준 스승이었다.

 

 

 

인복이 많은 소리꾼, 박송희
박송희는 두번째 스승 김소희에게 춘향가 <초앞>과,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사사했다.
 
판소리 흥보가로 이름을 알린 박송희는 사실 춘향가와 심청가 그리고 적벽가까지 두루 섭렵한 소리꾼이다. 한 가지 소리를 간직하기도 어려운 때에 여러 소리를 만났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박녹주 선생님께서 ‘내가 죽고 나면 네 선생 할 사람은 박봉술 밖에 없다’ 하시더니 박봉술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셨어요. 송만갑 선생님 제자로, 그때 당시 적벽가를 제일 잘하는 분이 박봉술 선생님이라고 얘기하셨거든요. 그리곤 ‘우리 송희, 적벽가 좀 알려주소!’하셨죠. 제가 적벽가를 배우는 동안, 매일 공부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주시기까지 하셨어요.” 
박송희는 그때 스승의 마음이 너무도 감사해, 적벽가를 다 배우고도 밖에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만 불렀다.
 
1949년 ‘여성국악동호회’의 두 번째 작품, <햇님 달님>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당시, 그곳에서 또 다른 스승 김소희와 박귀희를 만났다. 특히 김소희는 소리를 배우러 온 박송희에게 갈비며 굴비를 아끼지 않고 꺼내 밥을 먹이고 자신이 부를 소리를 앞서 부르더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자를 아꼈다. 
“하루는 김소희 선생님과 어느 모임에 갔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께 배운 <범피중류>를 자랑스레 불렀죠. 근데, 부르다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뒤에 부르실 소리를 눈치 없이 먼저 부른 거더라고요. 그래서 절반까지만 부르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너니까 가만 뒀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가만 안 둔다!’ 하시곤 넘어가주셨어요.” 
김소희는 1993년, 박송희가 첫 번째 제자발표회를 할 때에도 ‘거짓도 없고, 요사도 없고, 허세도 없으며, 남을 헐뜯는 법도 없고, 양보할 줄도 아는 우리나라 여성 중의 여성이지요.’라고 박송희를 극찬하는 추천사를 써주었다. 
“저는 스승 복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포기하지 않고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김소희 선생님은 박녹주 선생님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스승님이죠.”  박송희는 김소희에게 춘향가 <초앞>과,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사사했다.
 
 
 
잊지 못할 감동의 무대 
박송희는 스승인 박녹주가 남긴 흥보가를 잘 지켜 지난 200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이름을 올렸다. 
 
광주권번을 졸업한 이후 1944년 ‘동일창극단’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무려 72년 동안, 박송희는 무수히 많은 공연에 참여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잊지 못할 무대가 있었다고 한다. 1986년 국립극장에서의 흥보가 완창 공연이 그것이다. 
“토요일 3시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흥보가 완창 공연을 했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대대적인 홍보를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또 가난한 소리꾼이라는 소문도 있었던 터라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공연 당일,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오는 거예요. 손님이 없으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며 무대에 섰는데……. 2층까지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라서 2시간을 쉬지도 않고 소리를 했었죠.” 
함께 무대에 올랐던 고수 김동준이 좀 쉬었다 하라며 박송희를 말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때 그녀가 느꼈을 감동과 흥분은 짐작으로나마 헤아려볼 뿐이다.
 
 
가슴에 아로새긴, 스승의 소리
단가 <인생백년>은 박송희에게 더없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스승 박녹주의 마지막 말을 노래한 곡이기 때문이다. 
 
박송희는 스승인 박녹주가 남긴 흥보가를 잘 지켜 지난 200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박송희’ 하면 스승이 남긴 <흥보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박녹주가 제자에게 남긴 소리는 <흥보가>만이 아니다. 공연마다 부르는 단가 <인생백년>도 스승이 남긴 것이고 지금은 많이 불리지 않지만 <숙영낭자가>도 스승이 남긴 것이다. <숙영낭자가>는 한때 정정렬이 잘 부르던 소리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송희가 이 소리를 배울 땐 30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노래였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숙영낭자가는 30분짜리였어요. 근데 너무 짧아서 완창이라 할 수도 없었고, 짧게 부르고 끝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여러 곳에서 숙영낭자전 책을 구해, 그 사설을 바탕으로 앞에 30분을 더 짜서 넣었어요.”

 

2016년 5월 6일, 남산골한옥마을 민씨 가옥에서 단가 <인생백년>을 선보이는 박송희 명창
 
처음 이 소리를 전해 준 것은 스승 박녹주였지만, 완성한 것은 제자 박송희였다. 지금은 박송희의 제자 민혜성이 이 소리의 계보를 잇고 있다. 단가 <인생백년>은 박송희에게 더없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스승 박녹주의 마지막 말을 노래한 곡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선 자식이 없으셨는데 대신 자식 같은 조카가 있었어요. 그 조카가 면목동 집에 선생님을 모셨죠. 어느 날 선생님께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갔는데, 그 사이 손자를 앉혀 놓고 ‘이제 내가 세상을 마치는구나. 내가 말하는 대로 받아 적어라’ 하셨대요. 그리고 손자가 적어둔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을 제가 전해 받았죠. 그때 주신 말씀을 조금도 고치지 않고 선생님이 부르시던 가락을 더해 단가로 만들었어요. 지금도 단가는 늘 그 노래만 불러요.” 
그 곡이 바로 단가 <인생백년>이다. 박송희가 스승이 남긴 유언과도 같은 곡을 매 무대에서 부르는 이유는, 스승이 늘 강조했다던 ‘신의’를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함이 아닐까. 목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남은 인생 또한 스승과의 신의를, 또 소리와의 신의를 지키며 살겠다는 최고령 소리꾼, 박송희의 무대를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