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기획공연 <가객열전> 프리뷰
가곡으로 벌이는 아름다운 경쟁
2016년 남산골기획공연 <가객열전> 포스터
빠른 세상, 느린 음악
느리고 여유롭게, 사색하며 천천히 살도록 허용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든 빠르다. 세상 변화하는 속도도, 생각도, 결정도, 판단도, 사람들의 발걸음조차 모두 빠르다. 속도경쟁에 휘말려, 천천히 음미하며 느리게 나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맛볼 시간이 없다. 느려서 귀한 가치에 노출되는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천천히 서두르지 않는 것에 목말라 한다.
바로 그러한 즈음 가곡(歌曲)은 느려서 아름다운 자태를 우리 앞에 고고하게 드러낸다. 그 음악은 짧지 않아 단숨에 파악되지 않고, 그 맛은 심오하여 아주 서서히 음미된다. 한 눈에 드러나지 않아 접근하는 묘미가 있으며, 한 손에 잡히지 않아 더욱 궁금하다.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가곡의 가치를 뒤늦게나마 발견한 이들은 그 심오한 맛을 음미하는 행운을 얻는다. 가곡을 곁에 가까이 두고 그 가치에 한껏 마음을 열어 놓는 삶이라면 격변하는 세상의 회오리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함으로 서서히 무장하게 될 것이다. ‘느림’의 가치는 그렇게 천천히 삶에 스며든다
가객과 관현악 반주단으로 이루어진 가곡 공연
느려서 아름다운 음악, ‘가곡’은 고려시대에 그 곡체가 형성되고 조선후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고도의 예술미를 자랑하는 성악음악이다. 음악이 발생하여 전개되어 나가는 역사도 길지만 긴 세월동안 변화하는 흔적을 옛 악보 여기저기에 남겨 놓아 발자취를 돌아볼 있는 음악이다. 그래서 가곡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깊은 역사가 부여한 무게 때문이다.
가곡 발달의 역사에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조선 후기에는 가곡을 잘 부르는 사람 56인의 명단이 문헌에 버젓이 기록하여 남겼다. 수백 년 전의 인기인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 시대 가곡의 명인 56명의 명단을 그 어디에라도 기록해 놓고 있는가? 긴 역사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애호를 받고 수많은 인기 가객을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온 역사 깊은 음악이 가곡이며 묵어서 아름다운 것의 소중한 가치를 온몸에 지니고 있는, 느린 음악이 가곡이다. 느려서 여유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음악이 가곡이다.
가곡계의 옛 명인들과 가단 활동
조선 후기에 빛을 발했던 수많은 가객들의 흔적은 김수장의 <해동가요>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나이 순서로 배열해 놓은 유명 가객들의 명단, 그들의 신분, 그들의 활동상이 기록에 보인다. 그들의 노래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의 활동을 기록해 놓은 여러 문헌을 접하면 조선 후기에 가곡이 융성한 발전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선 후기의 그들은 가단(歌壇)을 중심으로 모임을 결집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단이란 가객들이 모여 음악 활동을 펼치는 공간을 말한다. 그곳에서는 여러 음악인들이 모여 음악적 소통을 이루었으며 후배,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가곡의 노랫말인 시조를 지었고, 그것으로 가곡을 노래하였으며 그것을 감상하며 더 좋은 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가단은 조선 후기 가객들의 중요한 음악 소통 공간이자 창조의 공간이었다.
국립한국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시조집 <청구영언>
18세기의 대표적 가단으로 김천택의 경정산가단과 김수장의 노가재가단이 있다. 이들은 각각 가집(歌集) <청구영언>과 <해동가요>를 편찬하여 가곡이 전성기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19세기에는 박효관과 안민영이 ‘가단’과 비교되는 ‘계’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펼쳤다. 박효관은 ‘노인계’, 안민영은 ‘승평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들의 활동은 가곡의 문학성보다는 음악성에 더 우위를 보이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문학성이 다소 퇴보하긴 하지만 음악적인 면에서는 더욱 정교하고 세련미를 더해가 19세기는 ‘창곡왕성시대’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된다. 18, 19세기의 가곡계는 그렇게 빛을 발했다.
지금 여기, 가곡, 가객, 감흥
조선 후기의 절정기를 지난 ‘지금 여기’, 우리의 가곡계는 어떠한가. 18세기 김천택과 김수장, 19세기 박효관과 안민영이라는 거장이 가곡계에 큰 업적을 남겨 한 시대를 빛냈다. 20세기에는 하규일, 이병성, 홍원기, 이난향, 이주환, 김월하 등의 혁혁한 활동이 그 시대를 비추었다. 21세기인 지금도 수많은 가객이 저마다의 빛깔을 드러내며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한국음악의 발전에 힘썼던 故 김월하 명인
가곡은 전공자가 많지 않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가곡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가곡을 어려워했던 것은 한 시대를 빛냈던 최고의 명인도 다르지 않았다. 故 김월하 선생이 언젠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다음의 이야기는 가곡을 전공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습니다. … 그래서 가곡은 열 명이 부르다가 열 한명이 달아나 버린다고도 하지요. 스승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가곡 최고 명인의 솔직한 고백이지만 가곡하기의 어려움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2015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진행된 기획공연 <귀한 음악> '여창가곡 두바탕' 공연 사진
최고의 명인이 이처럼 어렵다고 진단을 해 주었으니 지금 가곡하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하는 젊은 가객들은 다소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곡하기가 어렵기만 하겠는가? 그 유려한 선율의 아름다움과 발성의 묘미, 정리 잘 된 호흡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련된 미감, 끊어질 듯하다 다시 일렁이듯 이어지는 선율의 우월함, 그것은 노래를 듣는 이에게도 무한한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이 자신에게도 선물이다. 조선 후기의 어느 여성 가객은 노래를 부를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는다[心忘口, 口忘聲]”고 하였다. 노래에 몰두하여 노래를 부르는 이는 아무런 사심이 발동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입은 자신이 인위적으로 애써 발성을 하고 있다는 경지를 잊게 하여 최고의 소리를 발산시킨다. 그러한 경지는 노래를 듣는 이, 부르는 이에게 더없는 만족감을 부여해준다.
아름다운 경쟁
듣는 이, 부르는 이에게 더없는 만족감을 부여해 줄, 그러한 경지로 나아가기까지, 예로부터 수많은 음악가들은 멋진 경쟁을 벌이곤 했다. 음악사에서 음악인들이 벌인 건강하고 멋진 경쟁의 현장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해금악사 유우춘이 지음(知音)인 호궁기와 벌였던 해금 경쟁이 생각난다. 유우춘과 호궁기는 가끔 만나 해금으로 경합을 벌였다. 함께 연습을 하다 틀리는 사람이 벌금을 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둘은 한 번도 벌금을 낸 적이 없다. 아무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금 연주자가 된 이상 최고의 소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프로정신이 선의의 경쟁을 만들었고 그 경쟁은 이 둘을 당시 최고의 해금 연주가로 만든 것이다.
2015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진행된 기획공연 <귀한 음악> '여창가곡 두바탕' 공연 사진
그러한 경쟁이 어디 이 둘에게만 있었겠느냐만, 지금 이 시대 가곡으로 벌이는 아름다운 경쟁, ‘가곡 문파전’과 ‘가곡 대학전’은 아마도 최고의 노래를 만들기 위한 노정에서 만날 수 있는 선의의 경쟁이 될 것이며 다소 침체된 듯 보이는 가곡계의 연주자들에게 음악적으로 재무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 선의의 경쟁은 더 나은 연주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더없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016년 남산골기획공연 <가객열전> 문파전 출연자. 왼쪽부터 홍창남, 김나리, 이유경 가객
이석재 문파의 홍창남, 김영기 문파의 이유경, 김경배 문파의 김나리가 각각 부르는 남창가곡과 여창가곡은 엄밀히 말하면 ‘경쟁’이라기보다는 각 문파의 대표 주자가 스승으로부터 이어 온 소중한 보물을 잠시 펼쳐 보여주는 ‘풍경화’같은 것이다. 풍경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그 풍경 안에서 펼쳐지는, 같은 듯 다른,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가객열전> 대학전 출연 가객. 왼쪽부터 구민지(이화여대), 김승란(한양대), 장명서(서울대), 조의선(한예종)
서울대의 장명서, 이화여대의 구민지, 한예종의 조의선, 한양대의 김승란이 각 대학의 대표주자로 나와 노래하는 가곡 대학전은 젊은 가객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경쟁의 모델이 될 것이다. 이들이 펼치는 선의의 경쟁은 이후 다른 여러 젊은 연주자들에게도 자신의 음악세계를 다듬어 보도록 하는 기회를 부여해 줄 것이다. 이들이 펼치는 경쟁은 다른 한 사람을 떨어뜨려야 하는 ‘경합’도 아니고 누군가가 져야 하는 ‘전쟁’도 아니다. 이들의 경쟁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게 하는, 긴 호흡의 아름다운 경쟁이다.
또 하나의 노래, 가곡 반주
가곡은 노래와 기악 반주를 모두 갖추어 노래하는 전문가의 음악이다. 45자 내외의 짧은 길이의 한글 정형시인 ‘시조’가 노랫말의 기본이 된다. 가곡의 후반부로 가면 음악의 속도가 빨라져 노랫말이 많은 사설시조가 쓰이지만 가곡의 본령은 45자 내외의 짧은 노랫말을 노래한다. 간결한 정형시이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자연예찬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 왕에 대한 충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압축된 글자 수 안에 많은 내용을 담기 때문에 은유와 상징과 해학이 가득하다. 짧은 노랫말을 긴 시간에 노래하므로 음악을 감상할 때 자음보다는 모음이 더 많이 들린다. 모음의 변화가 세밀한 선율의 전개와 함께 어울려 매우 세련되며 멋스럽다.
가곡의 전반부는 매우 느린 속도로 노래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노래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며 노래의 분위기나 노랫말의 내용도 후반부로 갈수록 엄격하고 긴장된 정서보다는 다소 이완된 경지를 노래하게 된다. 노래의 반주를 담당한 거문고, 가야금, 양금, 해금, 대금, 피리, 단소, 장구 등 현악기와 관악기, 타악기가 모두 참여한 줄풍류 편성의 반주 음악은 노래와는 또 다른 하나의 음악세계를 구축한다. 반주 부분만 독립시켜도 훌륭한 줄풍류 편성의 감상 음악이 된다. 한 여름 노래와 함께 또 하나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느라 애쓴 반주음악의 묘미도 여기서 함께 느껴 보자.
글/송지원(서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