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극단 목화가 낳은 사람들
배우 박희순
글_이소영
자유롭게 날아갈 듯 한 파마머리에 차분한 목소리. 무심한 말투 속에 들어있는 유머와 섬세함. 늘 궁금했던 배우, 박희순을 만났다. 올여름 시작한 <남산골기획공연 - 국악, 시대를 말하다>의 마지막 공연인 극단 목화의 <템페스트>를 응원하기 위한 자리였다. 박희순은 12년동안 목화의 단원으로 활동했고, 목화를 떠난 지금도 후배 단원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서울남산국악당에서 만난 박희순
박희순과 목화의 만남은 1990년에 시작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작품은 오태석 연출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빠졌나>.그런데 첫 작품부터 공연 중에 감전이 되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꽤 큰 전기여서, 그 무대가 인생의 마지막 무대가 될 뻔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저는 정신 차리고 한다 했는데, 눈에 들어오는 다른 배우들이 모두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나요. 온 몸이 경직되어가지고 분장실로 이동했다가 2막에 들어갔지요."
재미있는 에피소드라 하기엔 다소 엄숙한 이야기. 그 와중에 박희순이 부리는 미묘한 유머 때문에 웃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모르다가 인터뷰의 서막이 시작됐다.
내인생의 연극 교과서, 오태석 스승님
박희순이 추억하는 오태석 선생님은 ‘연극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연극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가 선생님 아래 있었던 12년 동안 연극 외에 다른 내용으로는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학교, 극장, 집 외에는 어디 잘 가지도 않으셨어요. 여행도 해외공연을 나가면 그게 여행인거였죠. 단원들에게도 연극만 생각하게끔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는데, 그 덕분에 제가 목화에 있을 때에도 아주 집중해서 작품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만큼 다가가기 어려운 선생님'이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이어 그가 웃는다.
"많은 단원들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나네요."
연극 <템페스트>의 리허설 무대를 지도하고 있는 오태석 연출
오태석이 이끄는 목화는 엄격하고, 치열한 극단이었다. 지방에 사는 단원들은 주말에도 연습이 있으면 집에 가지 않았다. 집에 다녀온답시고 며칠 연습을 빠지게 되면 그새 자신의 배역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습과정에서 대본에 없던 것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수정되었던 것이다.
"누구 한 명이 안 나오면 그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곤 했어요. 그래서 평소에도 모든 캐릭터의 대사를 다 외워놨어요. 배역이 없는 후배들은 선배님들이 어디 아프시진 않나 기대할 정도였죠."
극단 안에서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연기를 '공부'하고 배우려했던 단원이었다.
"저 같은 경우, 이정도 공부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정도로 목화에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특히 오 선생님 작품은 한자나 어려운 말이 많아서 열심히 찾아가며 공부했던 것 같아요."
작품을 제의 받거나 관람할 때 그와 관련된 서적을 다 찾아 읽는 버릇도 목화 활동 시절에 생긴 습관이다. 박희순에게 목화는 재능만큼이나 중요한 ‘태도의 기본기’를 가르쳐준 극단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자리, 목화
목화 창단 30주년 기념 연극 <백마강 달밤에>에서 박수무당 역할을 맡았던 박희순
박희순은 작년 가을, 극단 목화의 창단 3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백마강 달밤에>에 출연했다. 오 선생님께 '바람 좀 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극단을 떠난 지 10여 년. 다시 목화의 일원이 되어 연기를 하기로 했을 때, 처음에는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치열하고 강도 높은 연습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먼저는 그의 몸이 목화를 기억하고 있었고, 마음도 금방 예전의 온도를 되찾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속 목화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간 것처럼.”
지금 박희순에게 목화는 언제나 거기 있는 친정집처럼 따뜻하고 애틋한 곳이다. 자신의 젊은 날을 알아주는 곳. 그때 뻗치던 힘과 두려움, 열정과 고뇌마저 기억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목화의 공연을 보고 있으면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눈물이” 난다.
박희순, 템페스트를 말하다
박희순에게 목화는 '오태석 연출과 극단 목화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이어서 박희순에게 <템페스트>는 어떤 공연인지 물었다. 대답은 명쾌하다. ‘오태석 선생님, 그리고 목화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 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그가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이 총집합된 작품이라고 들었거든요. 그 안에 <로미오와 줄리엣>도 있고 <햄릿>도 있고 <오델로>도 있고…. 셰익스피어의 문학세계가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오태석 선생님의 템페스트도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수많은 작품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오태석 연출의 <템페스트> 공연 장면
지난 50여 년 동안 오태석 연출이 보여준 작품들은 매우 실험적이고 창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일관된 점이 있었는데, 바로 전통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수용하는 무대를 꾸몄다는 것이다. <템페스트>는 그가 지금까지 구사해 온 다양한 연출기법과 연극적 상상력이 총동원된 한 편의 꿈같은 이야기다. 그가 이야기해오던 “마당놀이의 뛰어난 부분과 서구 드라마투르의 구조가 편하게 녹아 들어간 무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박희순은 <템페스트>가 “예술적으로도 많이 승화가 된 작품이지만 대중적으로도 굉장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데에 주목한다.
“템페스트는 외국에서도 굉장히 호평 받았고, 좋은 상도 받았고, 한국 관객 여러분께도 몇 번 선보인 적이 있잖아요. 그만큼 국적을 떠나서 남녀노소 다 봐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간만에 찾아온 서울남산국악당을 둘러보는 박희순. 다른 곳보다 무대를 꼼꼼하게 살핀다. 조용히 잠들어 있는 객석의 공기와 은은한 조명, 독특한 무대 장치를 보며 이것저것을 묻는다. 최근 뮤지컬 <무한동력>의 연출을 맡게 되면서 극장과 무대장치에 더욱 관심이 깊어진 그다. 그는 “국악당 극장이 너무 예쁘고, 템페스트와도 잘 어울리는 공간인 것 같다”며, “후배들이 새로운 극장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임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