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출가 오태석

꿈꾸는 거장, 오태석

글_이소영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오태석 연출

 

남산골기획공연 - 국악, 시대를 말하다의 마지막 레퍼토리인<템페스트> 공연을 앞둔 8월, 서울남산국악당은 초저녁부터 사람 없이도 분주한 분위기였다. 극단 목화가 국악당 무대에서 리허설을 갖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연출석에 마련된 마이크가 무색할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 배우들의 몸짓 하나, 말소리 하나, 호흡 하나마저도 연출가의 허락 없이 허투루 흘러가는 법은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한 손으로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해오는 목소리. 소문대로 엄하고, 소문과 다르게 유쾌하고, 소문보다 뜨거웠던 거장 오태석이다. 



1. 서울남산국악당 

Q. 배우 손병호 씨로부터 ‘선생님의 연출은 극장주의라고 봐도 좋다’고 들었어요. 그만큼 같은 연극이라도 공연장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르게 구성을 하신다는 소리겠지요. 이번에 공연을 하고 계시는 서울남산국악당의 장단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A. 서울남산국악당은 예전에 개관공연을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어요.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는 곳이지요. 장점은 굳이 연극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관객과의 숨쉬기가 아주 편안한 공간이라는 점. 마치 우리 옛날에 있던 사랑방 같은 느낌이에요. 단점은 극적인 느낌이 덜한 점. 비현실감이라 하죠. 무대의 높이도 거의 현실의 높이에요.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해서 비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맛이 아쉽다고.

 

Q. 그래서 이번에는 공연 전, 무대공사를 진행하셨어요. 무대가 차지하는 공간을 관객석 쪽까지 더 확장시키셨죠.

A. 내 생각에는 국악당 아래 지하를 하나 더 판 걸로 알고 있는데, 무대가 그 공간까지 더 내려가든지 아니면 지금 높이보다 3-4미터 더 올라가든지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명동성당이나 대웅전 같은 큰 절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게 뭐에요. 내가 아주 작아진 것 같고, 현실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잖아요. 무대도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관객들이 뭔가 꾸며진 곳에 들어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잖아요.

그런 점에서 국악당은 현실을 너무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허구가 벌어지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까만 천으로 가능하면 다 막았어요. 무대도 너무 강당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다 파괴하고. 관객이 들어와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바로 갖도록 노력을 했죠.


 

2. 셰익스피어
Q. 오랜만에 셰익스피어의 공연을 보는 것 같아요. 선생님 작품 중에 <로미오와 줄리엣>도 있지 않나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주는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오태석 연출이 이끄는 극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장면 (초연 1995년)


A. 셰익스피어 하면, 연극 하는 사람으로서는 만나기가 힘든 분이에요. 너무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신비스럽게까지 만들어서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작품처럼 만들어놨고, 또 이게 작품의 규모나 의상 제작비 등 그런 것이 부담이 되기 때문에 많이 못했거든. 많이 못하니까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는 아주 먼 사람이었다고. 그래도 하기는 해야지. 다만 이걸 좀 가차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서 자꾸 해보게 된 거예요.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학자들의 셰익스피어가 아니고 관객들의 셰익스피어를 소개해주면 어떨까 싶었던 거죠.

Q. 맞아요. 이번 공연에서도 많은 분들이 ‘어린 친구가 봐도 재미있을까요?’ 같은 질문을 많이 하셨어요. 그만큼 셰익스피어가 유명하긴 하지만 정극의 느낌, 어려운 학문의 느낌을 준다는 거겠죠. 그런 셰익스피어를 가깝게 만드는 오태석 선생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뭘까요?

A. 옛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올려졌던 글로브 극장 시대라는 게 해봤자 450년 전인 15세기쯤 되지요. 그때 런던 시장에 장 보러 왔다가 연극 보던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그리 높지만은 않았을 거란 말이지. 중고등학교 정도의 수준 쯤 됐을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공연이 어렵지가 않았을 거라고. 학자들 앞에서 학술대회를 한 것도 아니고.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1500년대의 극장을 재현하기 위해 1996년에 복원 작업을 한 영국의 글로브 극장(출처: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 홈페이지)

 
상상을 해 봅시다. 공연은 늦어지면 안 되니까 땡볕에서 2-3시쯤 열었을 거예요. 객석은 발코니도 있고 지붕도 있다지만 결국은 야외극장인데요. 거기서 무슨 집중력이 있겠어. 가격은 예를 들자면 아랫바닥에서 보는 사람은 1파운드, 발코니석은 2-파운드나 3파운드 그랬을 텐데. 조명도 없고. 그런 데서 그냥 재미있게 얘기를 한 거란 말이에요. 이야기꾼이.

 

이 재미있는 얘기를 왜 우리 젊은이들은 멀리 해야 하느냔 말이지. 가차이 할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러면 나도 역시 얘기꾼이 동네 사랑방에 사람들 모아놓고 얘기 하듯이 하면 될 거 아니야. 그렇죠? 450년 전에 이 사람이 그렇게 했으니까. 응. 그러면 그 얘기를 하는데 굳이 밀라노니 나폴리니 그런 얘기를 해 가면서 할 게 아니라, 그저 우리 신라 나라가 가야하고 이렇게 했다 하면 쉬울 것 같아요.

Q. 그래서 삼국유사를 가지고 오신 거군요.

A. 그렇지요. 이게 영국의 역사라든가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처럼 러시아의 큰 농원같은 특정 지역이다, 하면 그 나라 역사 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이거는 프로스페로가 자기가 이 동생한테 쫓겨나가지고 무인도에 도착해서 12년 동안 도술을 배워 공을 쌓았고, 마침내 원수들하고 만나는 이야기거든. 그러니까, 그냥 허구에요. 도술을 부리고, 모든 것을 복구하고, 딸도 원수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자신의 왕권을 복권하고. 도저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얘기거든. 그런 얘기라면 굳이 이태리가 배경이 될 필요가 없지. 우리도 무인도에서 일어난 이야기로 배경을 해 주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아주 재미있는 얘기꾼 할아버지가 실감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우리 옛날 이야기가 될 것 같았어요.

한국의 고전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배경으로 만든 <템페스트>. 등장인물의 이름과 옷, 대사 모두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3. 템페스트
Q. 이번 연극을 쓰시면서 특별히 마음이 가시는 캐릭터가 있나요?

A. 캐리반이라고, 원작에서는 원래 섬에 있었던 마녀의 자식인데, 프로스페로를 도와주거든. 12년 동안을 부엌일 다해주고 장작 뽀개주고 머슴처럼 다 해줘요. 이번 연극에서는 이 캐리반을 머리가 두개인 쌍두아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이래요. 
이 프로스페로가 결국에는 자기 딸도 시집보내게 되고 다 잘됐잖아요.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그런데 그러면 캐리반이 혼자 남잖아. 12년 동안 부려먹었는데, 얘한테는 머슴한테 주는 세경도 안주고 그냥 훌쩍 떠나가요. 그런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볼 때 프로스페로가 정당하지 않거든. 그렇게 버리고 가면 나쁜 놈이지. 그래서 이 캐릭터를 쌍두아로 만들었어요. 프로스페로를 도덕적으로 구제해주려고.

연극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머리 둘 달린 인간 쌍두아.

이번 연극에서는 그가 이 쌍두아를 갈라서 두 인간으로 만들어줘요. 자유를 준 거죠. 가장 큰 걸 준거야. 가장 큰 걸 주고 떠나는 프로스페로를 만들려고 캐리반을 머리 두 개 달린 인간으로 했어요.  

 

Q. 들어보니 쌍두아의 존재가 아주 감동적인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극의 완성도도 더욱 높여주는 설정이라 생각해요.

A. 그런 인물을 만든 것은 셰익스피어를 어떤 의미에서 도와주려고 그런 거죠. 그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는 강자가 약한 곳을 자기 속국으로 만드는 시대 였으니. 섬에 있는 인간, 쓰레기 같은 원숭이나 산돼지 같은 존재는 잊어버리고 가도 된다 이거야. 그때는 정당했지. 그때는 세계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관객이 프로스페로를 보고 “저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할 수도 있어. 그래서 캐릭터를 도덕적으로 흠이 없게 하려고 보완을 해봤어요. 어쨌든 쌍두아에게는 자유가 가장 큰 선물이었을 테니까.  

Q. 캐릭터 외에도, 선생님께서는 무대를 꾸미실 때 꼭 배우들에게 신발을 벗게 하시잖아요. 그 이유도 궁금해요.

​A. 우선은 신발을 신게 되면 (움직임을)아무리 깨끗이 해도 소리가 나요.

그리고 보통 우리가 집에 들어가면 신발부터 벗어버리죠. 그 착지감. 뭘 신고 있을 때와의 차이를 생각하시면서 들어보세요.

사람이 종일 서 있으면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거든요. 이때 자꾸만 내려가는 하중을 잡아 올려야해요. 내가 발바닥에 빨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올라간답니다. 올라가는 힘과 내려가는 힘이 중간에서 만나고, 소용돌이 쳐요. 이 도는 힘을 눈깔에도 쓰고 손가락에도 쓰고 발가락에도 쓰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가 두꺼운 창 있는 신발 신으면 안되지요.

씨름선수, 유도, 레슬링 선수가 왜 맨발이에요? 이 힘을 끌어올리려고 그러지. 그만큼 힘을 써야 하는 게 배우들이라는 거예요.

<템페스트> 리허설에 참여하여 배우들을 지도하는 오태석 연출. 그 역시 신발을 벗고 있다.


우리가 연극 보면 쉽게 들리는 것 같지만, 그거 하려면 다 힘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연습을 3-4개월 하는 거죠. 결국 이 힘이 배우에게 결정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배우가 나하고 연극하려면 다 벗어야 해요. 제작년 돌아가신 장민호 선생님도 벗으셨어요. 왜냐. 신발을 벗으면 당신 대사가 분명해져요.



4. 연극, 그리고 꿈 
Q.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한국 연극계의 거장’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매일같이 연극 리허설에 참여하시고, 여전히 극을 쓰시고 계세요. 그 열정과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도 연극적으로 ‘아직 못 이룬 꿈’이 있으신가요?

A. 이제 내가 시작이지(웃음). 그동안은 전부 리허설이고.

옛날부터 어른들이 해 주시던 말씀 중에 “은혜를 입으면 꼭 보답할 생각을 해라.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 있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두 마디는 마치 선조들의 유언 같지. 옛날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형제간에 싸우면 안 되고, 보은해야 하고.

우리가 모든 것에 은혜를 입잖아요. 계란 후라이를 먹는 사람이라면? 그럼 닭한테 은혜를 입는 거야. 물론 통닭도 먹지만(웃음). 우리는 어떻게든 무언가로부터 빚을 지고 있다고.

<템페스트> 리허설에서 배우들을 지도하는 오태석 연출

 

형제간 우애라는 건 뭐예요. 우리가 조금만 더 가면 형제의 형제죠. 그러다보면 이웃간의 예의와 우애가 결국 형제간 우애가 되는 거겠지. 그래서 누군가 연극을 볼 때 ‘아, 나는 빚을 지고 있구나. 내가 은혜에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구나’라는 마음이 든다든가 ‘남을 항시 존중하는 마음,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작품을 했으면 좋겠어.

그런 사회가 되도록 나는 부탁하고 싶은 거야. 그런 사례가 담기는 작품을 해야 하는데, 아직 그 저 충분히 좋은 작품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안 죽어 아직.

 

Q. 선생님께서는 연극이 갖는 핵심 요소가 '허구'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허구의 세계가 주는 유익이랄지, 의의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A. 누구나 24시간을 살아요. 청와대에 사는 양반이든,남해의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할머니든. 그 안에 헌법, 윤리, 계약, 관습이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현실생활을 운영합니다. 그러다보면 한쪽에 쓰이지 않는 머리가 생겨요. 24시간에 메였기 때문에 풀어내지 못한 것들을 풀어내도록 해주는 머리. 그것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허구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추스린다고 할까, 씻는다고 할까. 그런 일. 24시간에 메여있느라 풀어내지 못한 생각들을 풀어주고,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주는 공간과 시간이 허구라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런 시간이 적어도 우리가 한 달에 한 번쯤은 월세를 내듯이 만나야 하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전혀 뜻밖의 사건을 만날 때. 이 때,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유턴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 인생의 길에서 잠깐 멈춰 사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연극 아닐까요. 

 

Q. 연극 <템페스트>를 보러 오신 관객분들이 선생님이 만드신 허구의 세계에서 무엇을 얻고 가셨으면 좋겠는지 말씀해주세요. 

A. 사람들은 극장에 들어올 때 24시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야 해요. 떠나서 450년 전, 영국의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시간 공간으로 들어오시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허구가 자신과 같이 숨쉬기를 요청을 해요.  

내가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내가 어떤 정도로 삶에 폭과 깊이를 가지고 가고 있는지. 그런 것과 만나고 조우할 수 있는 시간이 공연장에서 만나는 시간인데, 그런 일에 있어서 <템페스트>가 관객분들께 도움이 되었다면 좋은 공연이고, 그렇지 못하면 잘못된 공연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