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지순자 명인 인터뷰

강산이 두 번 정도 변하고서야 돌아온 한국이다. 25세에 떠났고 22년을 미국에 살았다. 25년은 이 땅에서 한국음악의 큰 산인 지영희, 성금연 선생의 딸로, 제자로 살았다. 푸른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며 당당한 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맞은 미국에서의 22년은 글쎄... 삶을 익혔다고 해야 할까? 부자를 꿈꾸며 건너간 삶이 아니었다. 당시로서도, 지금도 역시 이해할 수 없지만 쫓기듯 떠나간 삶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가야금이고 음악인데, 갖은 능력이 ‘고작’ 예술이란게 한 없이 초라했다. 

 

살기위해선 돈이 급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보석회사에서, 조개껍질 끼는 회사에서... 일했다. 한국에선 가야금의 천재라는 소리도 들었던 청년이었는데 그 말을 추억함은 사치일 뿐 살아야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삶은 바닥부터 찬찬히 다져졌다. 그래도 다행인건 이따금 연주를 청하는 곳이 있었고, 명인의 가문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덕분에 가야금을 옆에 두고 ‘애기 씨’때부터 들었던 것들, 해오던 것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20여년을 살았다. 남들처럼 여기에 살았다면... 이라는 상상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환갑을 훨씬 넘긴 명인 지순자는 ‘아니다. 여기 살았다면 가야금에 대한 애착도 없었을 것이고 인생의 기본을 몰랐을 것이다. 인내하는 법도 배우고 돌아보는 법도 배웠다.’한다. 떠났던 22년의 세월로 얻은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방인 아닌 이방인의 눈과 마음을 얻었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일인데 이로써 지순자는 국악의 태평연월을 정확히 기억하고 구현할 수 있는 내부의 객관자로서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말했다. ‘지순자 넌 옛날 그대로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吉再, 1353년~1419년)

 

지순자는 명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뱃속 ‘애기 씨’ 때부터 들었다. 듣고 자고 듣고 일어났다. 가야금은 어머니 성금연에게 일곱 살에 정식으로 배운 것이 기억에 생생하지만 듣고 경험했던 것은 가야금만이 아니었고, 또 음악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지영희에게 지순자는 ‘자식이 아니었구나. 제자였구나. 아버지로서는 마이너스’라고 추억한다. 아버지는 딸 지순자에게 음악을 전하려 애를 썼다. 승무, 장구, 노래, 무용, 이론, 해금..... 피리까지도 배웠다. 가야금은 분명 어머니지만 음악의 대부분은 아버지 지영희에게 배웠다.

지순자가 기억하는 우리음악, 태평연월은 이러하다.

아버지 지영희는 박자를 중요하게 말씀하셨다. 제자와의 수업시간 마주 않아 피리를 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박이 생기면 잡히는 것 무엇이라도 날아간다. 그것이 휴지면 다행인데 옆에 있던 것이 재떨이면 보는 딸의 가슴도 철렁한다. 다행히 제자들은 요령껏 피했지만 보다 못한 어린 딸이 되바라지게 묻는다. "말로 하면 될 것을 대체 왜 던져요?" "박자는 때를 놓치면 안 되고. 그렇게 혼나면 다시는 안틀린다"고 아버지는 답한다. 음정은 틀리면 고쳐주시는데 박이 틀리면 대번 어디서건 소리치신다. ‘누구냐!!’ 박이 틀리면 되는게 없다. 춤도 박자, 음악도 박자가 제일 중요하다.

 

성음을 이유로, 호흡을 핑계로 ‘고무줄 박’이 되어있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옛날 음악인은 칼박이다. 강태홍, 지영희 이런 분들은 칼박이다. 그래서 인정받는다. 늘고 줄고는 다 완성이 되었을 때 하는 일이고 , 공부할 땐 칼 박이다. 박은 서양음악과 같은 박이다. 같은 개념이다. 성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박이 늘어진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동작 때문일 뿐 음악적인 것은 아니다. 

함동정월이 박을 몰라.... 아니다. 김명환 선생이 박을 못 맞출 뿐이다. 왜냐면 박은 그대로 가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가야금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단이 나스레를 치고 김명환선생이 왔다같다 하니까 함동정월 선생이 맞춰준 것이다. 장단이 틀려서 함동정월 선생이 맞춘 것이다. 특히 말발굽, 자진모리, 늦은 자진모리가 그렇다. 

 

맞춰주는 장단도 문제다. 맞춰주는 장단이 명창을 못 만든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 했다. 장단은 항구고 가야금은 배다. 정확하게 있어줘야 할 곳에 있어줘야 배가 들어갔다 나갔다하는데 배따라 항구가 움직이니 난리도 아니다. 지금은 규칙이 무너졌다. 나는 명인 보다 오히려 젊어도 따박따박 박을 주는 고수가 좋다. 

 

음정 역시 박자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것이다. 서양의 그것과 같다. 다만 우리에겐 ‘조’가 있고 농현이 있다. 김소희, 안향년의 소리를 들어봐라 음정이 너무 정확하다. 음이 맞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보다 귀가 안 뚫렸다. 그러고는 우리는 달라.. 이렇게 말한다. 서로의 음이 그렇게 다르면 어떻게 음악과 음악이,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이 만나 협연할 수 있겠는가 

명인 지순자가 살아온 태평연월엔 음정과 박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조가 있고, 다양한 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허나 지금은 이론에 의해 획일화 되었고 따라서 이야기와 향기가 사라졌다. 더불어 지순자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수법이다. 세상은 충분히 발달했고 풍족해졌는데 미개하고 답답해 보이는 구전심수를 바탕으로 한 옛 교육방법을 뛰어 넘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세상, 이런 조건이라면 어마어마한 영재들과 명인들이 나왔어야하는데 오히려 어렵다. 그동안 무엇이 중요했는지 국악은 골다공증으로 고생이다. 걱정이다. 

이것을 어찌 돌릴지, 어떻게 자리 잡게 해야 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돌아온 한국에서의 삶보다 배고팠던 미국에서의 삶이 훨씬 편했던 것 같다. 음악에 대해서,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안타까운 변화들에 대해서 대화할 수 없었다. 대화는 종종 싸움이 됐다. 마음이 아팠고 힘들었다. “근데 이것이 내가 걱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어요. 역사라는 것은 자기가 맡은 일만 하다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통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알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 음악을 남기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처럼.”

 

“난 연주할 때 늘 행복해요. 내 음악에 내가 감흥이 되고 관객들이 내 음악을 탈 때 내 음악을 관객들이 느끼는 것을 느낄 때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심사위원인냥 관객이 앉아 있다면, 공기가 딱딱하고 답답하다면 뭔가를 한다. ’트로트를 한다거나 말을 한다거나 해서 관객의 상태를 바꾼‘다. ’내 흥이 났는데 관객이 내 흥을 탈 때‘ 느껴지는 그것 때문에 하는 연주다. 최상의 연주를 위해 공간의 기온을 바꾸는, 말랑말랑하게 관계의 상태를 만드는 것 역시 명인의 능력이다. 무대는 평가의 공간이 아니다. 나와 남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빠지고, 내가 내 음악에 빠지는 행위를 통한 공감의 공간이 무대다. 따라서 ’성심과 성의를 다하고 자신의 열정을 다 해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단순한 공간이 무대다.

 

'예술의 최고, 음악의 최고는 죽을 때가 최고’다. 시간이 필요하고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알아지는 맛이 있다. 무無맛이라 말하는 무맛을 알 때가 있다. 

“무가 맛있을 땐 어떤 과일보다 맛 있는거 알아요? 아주 미친 듯이 달지도 시지도 않은 전혀 자극적인지 않은 그 맛을 알아야 해요. 가야금 산조는 강태홍 산조를 탈 정로가 되면 가야금에 도통한 거예요. 강태홍류는 신선의 가야금이예요. 가야금하고 싸워야만 좋은게 아니에요. 경지에 오른 거예요. 많은 것에 통달해야 할 수 있는 것이 강태홍류죠. 강태홍류가 재미없다는 건 무 맛을 모르는 것과 같아요”

 

명인 지순지는 요즘 25현을 공부한다. 너무 재밌다. 뭐가 재밌냐면 안 되던게 되는게 재밌다. 하나하나 배워가는 게 재밌다. 배우고 성장하는게 정말 행복하다. 어제보다 오늘이, 아침보다 점심이 나으니까 행복하다. 명인의 사는 일, 명인의 행복은 이러하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글_천재현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