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성창순 명인 인터뷰
“힘들어하는 제자에게? 아니...전공이라고 해놓고.. 니가 전공이 뭐냐? 바꿔라 그럼. 아니면 선생을 바꾸던지”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까 궁금했다. 시대의 스승이 갖은 노하우가 궁금해서 드린 물음에 명창 성창순의 답은 단호했다. “난 칭찬을 안해요. 왜 해요? 칭찬을. 잘해야 칭찬을 하지. 잘 못하는데 잘한단 소리를 왜 해요? 안 해요 난.”
길지 않은 질문이고 짧은 답이었지만 이 작은 대화에도 명창의 지나온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대의 일반적 요구와는 다른 교육 방법임에는 확실한 것 같다.
이 시대의 명인들과 마찬가지로 성창순 역시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창이었던 성원목의 첫째 딸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소리를 접했고, 집이 권번가에 위치한 덕에 판소리는 물론 가야금, 거문고 소리도 익숙히 들으며 살았다. 이쯤 되면 평범한 예인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예상하겠다. 물려받은 재능과 더불어 남들보다 윤택했던 교육환경이 기대되었으나 성창순을 명창으로 만들었던 것은 우리가 갖은 보통의 상식과 달랐다. 물론 중요한 한 가지 음악이 좋았고, 음악을 욕망했다.
명창이셨던 아버지는 딸자식이 소리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셨고, 첫 스승인 공기남선생은 ‘소질없으니 시집이나 보내라’ 했다. 몸이 허약했던 탓에 여러 스승들에게 ‘저래가지고 어떻게 명창이 되겠냐’던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성원목은 소리꾼의 인생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었기에 느즈막히 얻은 딸 ‘이삐’가 곱게, 이쁘게,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소리꾼의 삶은 아니었다. 물론 성공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보장 받을 수 없는 그 험난한 길로 딸자식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소리꾼의 삶을 끝까지 반대하셨던 아버지에게 서운했고, 그 반대에도 눈을 감는 그날까지 소리하고 있는 성창순에게 아버지는 서운하셨다. 딸이 원했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왔던 어머니와 다투시던 두 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팔십평생 소리를 해온 지금 돌이켜 아버지를 떠올리면 죄송하다. 그렇게 반대한 것을 여태껏 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분 ‘부모님께 감사하다. 소리하게 나줬으니까’. 판소리로 인해 부모님과 맺은 감정은 서운하고,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다음 생을 바라보는 팔십의 명창은 ‘또 태어나도 소리할 것’이라 한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소리선생 공기남에게 찾아간다. 성창순의 기억으론 소리 몇 마디 듣지 않고는 ‘소질 없으니 시집이나 보내’라 말했고, 첫 스승의 첫 마디가 정확하게 가슴에 남았다. 오기가 생겼다. 자식이 원하는 것을 실현시켜 주고 싶었던 어머니와 어린 소녀의 열망과 오기가 ‘조선창극단’ 입단의 결과를 만들었고, 본격적인 판소리 인생은 시작된다.
시작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몸이 약했다. 자그마했다.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선생님과 주위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저래가지고 어떻게 명창되겠냐’고. 어른의 심중은 모르겠고 이 말을 들은 성창순은 당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른들의 이 말을 들을 때 어땠겠어요.. 그래 명창이 되나 못되나 봐라 속으로 말하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두고 봐라 내가 명창 된다.” 하루에 몇 시간이라고 할 수 없이 공부했다. 45킬로 밖에 안되니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고, 비위가 약해 고기도 싫었다. 어떻게 해야 이 소리를 잘 해볼꼬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좌우간 끝까지 가보자 뭣 때문에 이것을 못하게 하는 걸까? 이렇게 귀하고 하면 할수록 좋고 윤곽이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어리석은 질문일까? 명창 성창순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비율로 따지면 얼마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잠시의 고민도 없었다. ‘좌우간 저울에 달아 봐도 노력이 더 무거워. 소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었고 좋았어요. 내 자신이 좋아했기 때문에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몰라도 내가 좋으니까’
그렇다. 좋으니까 능력을 따지는 건 관심 없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왔다. 어렸지만 해방도 보았고, 6.25땐 예술가라서 살았고, 예술가라서 고됐다. 매일 칠팔십리를 걸어 위문공연을 다녔고, 영문도 모르고 잡혔다가 예술가란 이유로 풀려나기도 했다. 창극도, 여자들만의 소리집단인 여성국극도 시절의 바람을 타고 흥했고 또 망했다. 소리도, 소리꾼의 인생도 이러한 시간과 이합집산(離合集散)했다.
성창순의 젊은 날도 그렇게 흘렀다. 성창순은 부산을 제2의 고향이라 했다. 당시 젊은 예인들이 살기 위해 모여들던 곳이 부산이었다. 7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청춘의 시간이었다. 세상을 알았고, 사랑을 알았다. 술도, 낭만도, 친구도 만났다. 이맘때 이러한 이유들로 가야금도, 거문고도, 철현금도 손에 닿았고 떨어질 줄 몰랐다.
5.16 직후로 기억한다. 아름다운 방황을 정리하고 서울행을 결행한다. ‘내 전공이 무엇이냐?’ 이때 스스로에게 뱉은 일갈이 지금을 만들었고, 지금도 그 한마디가 제자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서울로 왔고 다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한다. 김소희, 박녹주, 정응민, 정권진 선생님들을 모시고 이 산에서 저 들로 옮겨가며 밤낮없이 공부했다.
성창순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가 서예다. 국전에 두 번이나 입선을 했고, 종종 자신의 발표회 때 병풍에 글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서예에 마음을 낸 것도 판소리를 잘하기 위해서였다. 판소리의 사설에 한문이 많아 답답함이 많았던 젊은 시절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김소희 선생에게 내었고 김소희 선생의 소개로 신호열 선생에게 공부했다. 예술의 궁극은 통한다. 인생과도 그럴진대 하물며 예술끼리야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물었다. “똑같아요. 한일자(一) 하나 들어가는데도 신문지에다 좌우간 수 백 번을 써야 힘이 서죠, 혹이 생기고.. 판소리도 똑같아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알 만한데 다음은 어떻게 글로 전할 수 있을까 싶다.
“글씨가. 만일에 점을 찍잖아요. 접이 있고 홑이 있는데..그냥 이렇게 찍는게 아니고 한 바꾸 돌아가지고 여기서 봉끝에를 돌려서 이렇게 띨 정도로. 소리도 그러잖아요. 소리도 접이 있고 홑이 있어. 아니 대목이라야 알것나야? 홑이 아니고 (노래시작)범피중류...둥덩실 떠나아가... 이런거 상하로 우조.. (침묵) 막 일러줘도 모르니까. 그냥 접인 줄만 아셔.”
70년 초 였던가? 판소리를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험했던 시절이었다. 성창순이 ‘솟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몹쓸 소리들이 들려왔다. 동료와 후배는 물론이려니와 스승들까지도 시기와 질투로 없는 소리들을 했다. 밖에 나가질 못했다. 무서웠다. ‘어른들이 그러는 것 보고 많이 느꼈다. 그래서 판소리를 포기하려 했다’.가 75년도에 음반 취입건을 계기로 본연의 태도를 찾았다. 열심히 하기로 했다. 그런 소리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로 했다. ‘내가 어중띠게 해서 이렇게 질투, 시기를 하는구나 더 더욱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험했던 시절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했고 명창다운 결론이었다.
또 다른 인생의 어려움을 물었다. ‘외로웠어요. 사람이 그리웠어요.’ 궁금했다. ‘소리 공부한다고 산이구 어디구 들어가 앉아 있으면 외롭더라구요. 사람이 그립고. 그래도 금방 적응돼요. 일주일쯤 지나면..’ 기대 때문이겠지만 조금은 허무한 명인의 정답을 들었다.
그렇다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17년간. 늦게 시집을 가서 17년간을 살았는데. 여자로서는 시집을 한 번 가야겠더라고. 행복했다기보단 그냥... 여자니까 잘 갔다 왔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한 번쯤은 가야돼. 안 맞으면 운명적으로 이혼해야지. 서로 남남끼리 만났는데 뭘 그리 깊이 알겠어요? 자식은 없어요. 판소리하고 결혼했으니까.. 후회 없어요. 죽어도 다시 판소리할거예요.’
사진_남산골한옥마을/글_천재현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