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강정열 가야금산조

예술은 내 안의 '음악성'과 잔잔한 근육들이 만들어 내는 '기술'의 조화가 이루어 질 때 성립 가능한데 만약 그것이 이뤄지면 '내가 가야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한다. 무슨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예술의 세계는 구분하는 세계가 아니다. 이미 예술이니 내 정신과 내 몸은 그대로 하나이며 더불어 나와 악기의 구분도 없는 그저 커다란 하나, 온전한 하나인 것이다. 거기에 나와 남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 이미 그러한 예술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예술의 목적을 묻는 자들에게 이야기는 역순이다. 일차적으로 내 안의 심미안과 내 기술이 하나 되는 것이 예술이요. 하나 된 그것이 사물-악기와도 구분 없는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술이니 그 경지에서 나와 남의 구별은 보잘 것 없는 그것이다.

 

강정열은 '뿌리 깊은 공부'를 강조한다. 뿌리 깊은 공부란 '쉽게 배우고 어서 풀어먹을 생각'만 가득한 단순함을 버리고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반드시 하루에 해야 할 연습시간을 확보'하는 단순함을 취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강정열은 여기에 훌륭한 선생이라는 중요한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한다. 가볍게 가르치지 않는, 매질할 능력과 안목을 갖춘 선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흔들린다. 그래야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 

 

명인 강정열은 남자다. 투박하고 우직하고 단순하다. 생명체로서의 남자, 성별로서의 남자를 넘어 정신까지, 마음까지도 완벽한 남자다. 예술의 궁극이 마음과 육체, 육체와 사물, 사람과 사람의 경계를 허무는 조화와 통일을 목적으로 하듯. 남성으로의 완벽, 남성으로의 궁극 역시 여성의 궁극과 같음이요 통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건강한, 통일 된 남성성이라 부른다. 건강한 남성성은 여성성의 궁극과 건강과 조화라는 측면에서 분명 같지만 남성이라는 분명한 색깔을 갖는다. 강정열은 분명하게 남자의 계보를 잇고 남성을 지향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의 산조, 자신의 병창은 '고제이며, 남병창'이다. 남자 예인이 흔치않은 지금 뿌리부터 지향까지 남자인 형형하고 단아한 연주자가 강정열 명인이다. 남병창은 남자가 하는 병창을 지칭함인 줄 알겠는데 고제(古制)라 함은, 옛 것이라 함은 어떤 의미일까? 강정열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남병창과 고제라는 말에서 남병창이 제 영역을 명확히 할뿐 남병창과 고제는 다른 말이 아니다. 병창에서의 고제는 민요가 아닌 판소리를 그대로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고제는 유행에 가볍게 응하지 않는, 투박한 근본을 지켜내는 것을 말한다. 그의 산조도 남자산조, 고제 산조다. 강정열은 한숙구, 정남옥, 정달영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잇고 있으며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서공철 역시 남자이며 한숙구의 계보를 잇는다. 강정열에게는 이 계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생의 중요한 때 이 남자는 남자의 계보를 지킴으로 지금을 일궜다. 

선생 정달영은 이승의 몸을 벗기 전 유언인냥 강정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내 얼굴 가리는 일하지 말 것이며, 내가 못 이룬 것 네가 다 이루고 와야 한다. 그래야 네가 죽고 오면 하늘나라에서 내가 네 절을 받을 것이다." 

그 선생에 그 제자 아니 그 제자에 그 선생인 것인가. 임종을 앞둔 선생의 이 선언, 이 당당함이 부럽다. 강정열은 스승의 이 말씀을 스승과의 아니 자신과의 약속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가야금만큼 끼고 살았고 밥벌이의 중요한 연장이었던 아쟁도 스승을 배웅한 후로는 정리(?)하였다. 

사실 남자의 계보를 잇고 지금의 삶을 살게 된데에는 의리도 한 몫 했다. 강정열이 전주대사습에서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로 장원을 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릴 때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 선생이 강정열을 제자 삼고자 거처로 찾아 왔더랬다. 제자가 되라는 박귀희 선생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를 둘러대며 제자됨을 고사했다. 당시 여자들의 병창이 민요와 창작이 많아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과 더불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박귀희 선생의 제자인 안숙선은 고모의 딸이고 강정숙과는 의남매를 맺은 사이인데 '아무리 출세길이 좋더라도 같은 형제들과 그 문하에 들어가 그들과 대립하며 삶을 살 수는 없다 판단'했다고 한다.  보장된 미래를 볼 수 없었던 시절, 자식 셋을 둔 가장의 위치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정달영 선생과의 인연은 그 다음이었다. 삶에서 이런 단순한 의리의 작용은 산조유파를 결정함에도 있다. 강정열은 공식적으로 신관용류를 연주한다. 그러나 신관용류는 어릴적 고모에게 배웠을 뿐 신관용의 얼굴도 모른다. 산조는 오히려 서공철 선생에게 제대로 배웠다. 병창도 배웠고 철가야금 연주도 배웠다. 철가야금은 울림이 많기 때문에 막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서공철류 산조는 의남매인 강정숙 선생의 연주가 훌륭하다 치켜세운다. 자신은 병창을 하느라 그 깊은 맛을 잃었노라 이야기한다. 대신 끊어져가는 신관용류의 맥을 잇고 있다.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의 합리보다 앞서는 것은 의외로 많다.

정달영 선생에게는 36세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전주에서 생활하며 토요일에 올라가 일요일까지 공부하고 내려오기를 10년 했다.' 서울과 전주를 오고감에 대한 피로도는 기억에 없다. 다만 어려웠던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오늘치가 다르고 내일치가 다른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매력 아닌 매력 때문이었다. 토요일 일요일 배우고 내려와 전주에서 일주일을 연습하고 서울로 올라가면 다른 가락을 내놓으시는 통에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스승의 자유분방함은 분명 능력이었다. 옛날 선생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서공철 선생은 가르침에 한결 같았다. 정달영 선생은 아니었다. 어렵게 이 마음을 스승에게 고했고 스승 역시 같은 고민을 갖고 있다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스승도 이젠 법통이 고민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가락을 이렇게 비틀고 저렇게 비틀며 주고받다가 맞아 떨어지는 딱 한 가지가 찾아질 때 유레카인냥 ‘바로 그거다 분명하게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한다. 이렇게 찾아진 핵심이 강정열의 제자들에게 '한 질(길)'로 전해지고 있다. 

 

강정열의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 그리고 가장 행복했던 때의 기억은 의외로 평범했다. 

'집사람하고 자식들 자는 것 보니까 기가 맥히고 미칠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집사람 쌀 도가지 긁는 소리가나... 그러면 밖에 나가 소주 한 잔 먹고 생각해. 이걸 계속 해야 하나... 그래 어쩔 수 없어 요정을 나가는 거야. 그러면 한 달치 먹을 돈을 벌어 들어와. 그러면 다시 안나가 그러곤 신관용류 테이프 구해 다시 공부하는 거야."  80년 5월에 강정열은 지금의 전주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를 강정열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예술하는 사람은 비참했어, 전라북도 예술하는 사람들 환갑잔치 아니면 굶어 죽어, 예향의 도시라는 데가 그러네...."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아니 그래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붙잡고 있었다. 예술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것이 어찌 음악 안에서만의 일이겠는가? 음악과 삶은 그렇게 통일되어 가는 것이다. 돈하고는 인연이 없는 강정열의 삶이었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듯 전북도립 국악원이 생기고 국악대학이 생기면서 삶의 문제들이 하나 씩 풀려갔다. 

이러한 삶의 이력 때문일까 강정열에게선 '싸움'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이 싸움은 시간 속에서 내가 처한 상황과 싸우는 것. 결국 내 '자신과의 싸움' 이다. 강정열에게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밖에 있지 않다.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느냐 이기느냐가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혹은 삶이란 어려운 것이 기본이고, 행복은 두 번째 문제라 한다. 

남들은 100일 한다는 산속 독공을 일 년 했다. 지리산에 들어가 판소리 6개월로 막혔던 목이 텃고, 용정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6개월 동안 매일 같이 가야금을 탓다. 이러한 묵묵한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다보면 내 소리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남이 들으면 좋아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내가 들을 때 그렇지 않다. 시간과 노력과 성장은 이렇게 정확히 비례하는 수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지리한, 포기하고픈 유혹의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면 맞이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 들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고, 감동을 내가 받고 자유자재가' 된다. '그래가꼬 득음을 하는 거'란다. 이 경지, 득음의 경지는 끝이 없다. 생을 다 하는 날까지 어쩌면 생을 넘어, 생을 거듭하며 완성해야 하는 경지 일지도 모른다. 그 득음의 순간순간 맛보는 절정의 체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엇이리라. 그래서 실력의 한계에서 고민하는 제자에게 강정열은 "두 말 안해버려. 내가 그 한계까지 올려줬으면 그 다음은 네 싸움이다." 

 

 

예술은 이렇게 수양 쌓듯, 도 닦듯 하는 거다. 도 닦는 일이라는게 말이 도 닦는 것이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닌가? 이것이 예술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강정열이 도 닦듯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이뤄온 예술로 하는 일이 무엇일까? 

 

"서예의 대가가 눈감고 있다가 딱 찍으면 작품이 나오잖아. 화가도 마찬가지야. 어디 딱 찍으면 작품이 나오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여. 지금도 무대에 딱 서면 관중을 딱 봐. 단가를 무엇을 해야겠구나 느낌이 딱 와. 그러면 그렇게 시작해 버려. 여기는 단가 호남가를 해야겠구나. 여기는 춘향가를 해야겠구나 느낌이 와." 이런 것이 경지이고, "심청가에서 슬픈 대목을 하면 여기서 훌쩍 우는소리 저기서 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 그러면 내가 대화적으로 연주를 하는거야 여기도 바라봐 주면서 저기도 바라봐 주면서...고수랑 대화도 하면서... 달래가면서 노래를 하는 거야. 마지막에는 흥겨운 것으로 하면 손뼉도 치면서 마무리하지... 그런게 무대여." 

 

그렇다 이런게 무대고 이런게 예술가의 일이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 / 글_천재현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