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이건용 편]
한국미술의 거장 3인의 동거동락(同居同樂)전
작가와의 대화 - 이건용작가, 김노암 평론가와 함께 하다.
예술은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글_이소영
10월 30일,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남산골한옥마을 윤씨 가옥을 찾은 이건용 작가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남산골한옥마을 윤씨 가옥에서 전위예술가 이건용을 만났다. 이건용 작가는 지난 14일부터 이곳 윤씨 가옥에서 전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프로젝트는 1세대 전위예술가인 김구림, 성능경과 함께 한옥 전시를 하는 컨셉으로, 이건용 작가의 작품 주제는 <폭발과 피난민과 동거시대(Explosion and Refugee>다. 이날은 몇몇 관객들과 작가, 그리고 큐레이터 김노암이 함께 했다. 작가에게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에서부터 작가의 아주 개인적인 역사까지-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젊은 예술가의 데뷔작, <신체항>
<신체항>, 1971년, 이건용 作
이건용의 작품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은 <신체항>이다. <신체항>은 1971년 대한미협전에서 그가 데뷔를 할 때 처음 발표된 작품으로,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지층과 함께 떠내어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때 관객은 전시관이라는 인위적인 장소에서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만남은 관객으로 하여금 ‘의외성’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험이 된다.
이건용 : '신체항'에서 항이라는 것은 수학용어인데, 신체가 만날 수 있는 경우 즉 조건을 제시한 거죠. 그때(70년대) 당시에는 ‘전람회의 장소’라고 하면 뭔가 만든 것, 회화나 조각 이런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통념이 강했어요. 그런데 지층과 생목(生木)이 거기에 놓여짐으로 인해서 관객의 신체는 거기 놓여있는 생소한 신체와 만나게 되는 겁니다. 전시장이라는 특수한 문화와 장소 안에서 관객들이 만나지 않아야 될 것을 갑자기 만나게 되는 지점을 이용한 작품이지요.
<신체항>은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서도 발표를 하게 되었고, 북유럽을 비롯한 각지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신체항>이라는 작품이 탄생한 경위는 이건용 작가의 10대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논리학 시간에 배운 메를로 퐁티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당시 교과서에 적혀 있던 메를로 퐁티의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다”라는 문장이 그를 깨웠다.
이건용 :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다.” 다시 말해서 뭐냐면, 일어나는 것과 사실이라는 점이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고 있는 신체성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파악했어요. 사물은 그대로 있는 것인데, 사실이라는 것은 관계론적으로 관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이후 <신체항>은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서도 발표를 하게 되었고, 북유럽을 비롯한 각지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이건용 작가는 파리 비엔날레에 참석한 경험을 통해 “보다 중요한 예술의 매체가 작가의 신체, 작가 자신”이라는 걸 크게 느꼈다고 한다. 또 이후에 신체와 장소를 이용한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건용 : 조건만 된다면 아주 큰 나무를 가지고 한 번 제대로 작업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커다란 나무를 구하기가 어렵더라고. 아직 못한 계획이 너무 많아요. 나무 구하기가 힘들어서.
이벤트, 로지컬
<달팽이 걸음>, 1979년, 이건용 作
이건용 작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작품은 <달팽이 걸음>이다. <달팽이 걸음>은 1975년 백록화랑에서 발표된 작품으로, 당시에는 ‘이벤트 로지컬’이라는 명칭을 썼다. 한국미술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벤트’라는 용어가 사용된 날이었다.
이건용 : (작품을 했던 백록화랑이) 150평 되는 장소인데, 이벤트는 한쪽 코너에서 시작했어요. 기자들이나 사람들이 볼 때에는 깡마른 안경 낀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서 백묵으로 앞에 줄을 찍 긋고, 발바닥으로 조금 움직여서 가고 있으니까 ‘뭘 하는구나, 모름지기 현대미술은 저렇게 이상한 짓이야’ 하고 있었겠죠. 그렇게 차 마시고 대화하고 놀다가 어느 순간 딱 보는데, 그려진 백묵 위로 지나간 발자국이 삐죽 번져 있는 거지. 그 깡마른 사람이 테이블 밑으로까지 들어가서 작품을 하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맞은편 벽면까지 가서, 한동안 말없이 이마를 벽면에 대고 있다가 일어나서 “끝났다”고 말했죠. 그렇게 ‘이벤트 로지컬’이 시작됐습니다.
이건용은 <달팽이 걸음>을 통해 한국미술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작가는 <달팽이 걸음>이 '0과 1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디지털적인 행위'와 '신체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호흡이 결합되어 있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발 앞에 ‘백묵을 긋고’ ‘앞으로 나가는’ 행위는 기계적으로 반복이 되었지만, 오른쪽 발과 왼쪽 발이 나아가는 힘의 중심이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에 전체적인 줄은 사선으로 휘어졌다. 이렇게 신체가 가진 자연스러운 호흡과, 긋는 것과 동시에 지우는 디지털적인 행위가 결합한 것이 그가 '이벤트 로지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근거다.
이건용 : 거창하고 스펙타클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단순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등치가 크고 호흡이 거칠고 했던 사람들에겐 감동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달팽이 걸음이라는 퍼포먼스는 저를 대표해주는 ‘이벤트 로지컬’이랍니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관객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
관 객 : ‘이벤트 로지컬’이라는 두 단어는 사실 모순적인 관계잖아요. 사건과 논리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 같거든요. 선생님의 작품 안에서 ‘사건’이 퍼포먼스라면, ‘로지컬’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이건용 : 나는 이벤트라는 것이 혼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무언가 관계론적으로 서로 만나서 +되는 것이라 생각하죠. 사물 그대로 남아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다른 것이 부과되며 일어나는 것, 그럴 때 그것은 1+1이 2가 아니라 100도 될 수 있고 50도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벤트, 사건이라는 게 그저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흘러가버리는 것은 아니라 느끼고요. 나보다 먼저 했던 퍼포먼스 하는 사람들, 헤프너들에 대한 반발도 있었어요. 물론 '제 4집단'이 그 당대에 시대라든가 정치상황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비판하고 그렇게 했던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화젯거리만 만드는 점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죠.
이건용 작가에 의하면 이벤트는 순간의 예상치 않게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항상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용의 이벤트는 다른 헤프너들처럼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하나의 이벤트를 하기 위해서 수많은 과정과 사실 자체를 수없이 분석하고 사유(드로잉)하기도 했다.
이건용 : 과정이나 분석을 갖다가 노트에 필기를 하고 다시 또 필기를 하고 그래서 하나의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기록을 합니다. 신체항만 하더라도, 스케치북 하나를 갖다가 온통 그것만 가지고 생각할 정도로 드로잉을 반복하고, 분석했어요. 바로 그 지점이 한국 미술사에 있어서 나한테 주목한 지점인 것 같아요.
더 메소드 오브 드로잉(The method of drawing)
신체 드로잉은 캔버스를 작가의 몸 앞에 위치시킨 채, 눈으로 보지 않고 뒤쪽에서 드로잉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건용 :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요. 실기대회를 하면 1주일 정도 나가서 스케치 하고 그래요. 미술 선생님이 지도도해주고. 그때 내 친구 중에 훗날 홍대 교수가 된 애가 있는데, 나는 실기대회를 하면 그 애 뒤에 가 있어. 그 애 그림을 보고 있는거지. 그럼 미술 선생님이 와서 이야기를 해요.
“이건용.”
“네”
“넌 왜 맨날 걔 뒤에만 있어, 니가 그리란 말이야.”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먼저 연구를 해야 되니까요. 얘가 상도 많이 받고 잘 그린다고 얘기하니까, 왜 잘그리는가 그걸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너는 이상해~ 그냥 그려. 그럼 잘 그리게 되는거야.”
“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곤 그 녀석 그림을 보는 거예요.
엉뚱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만큼 이건용은 다른 것보다 미술 방법론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에서 들어온 잡지나 예술 관련 서적을 펼쳐놓고 몇 시간을 바라보며 어떤 기법으로 나무를 그렸는지, 개나 사람을 그릴 때 어떤 방식을 사용했는지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건용 : 그러다가 중학교로 올라가지 않았겠어요? 새 교과서를 받자마자 미술책을 펼쳤죠. 거기에 인상파, 큐비즘, 야수파, 추상화 같은 작품들이 다 실려 있는 거야. 그때 무릎을 탁 치며 이야기 했죠.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리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야.”
미술 선생님이 피카소나 세잔, 반고흐의 이야기를 할 때면 이건용은 ‘세잔은 세잔이고 반고흐는 반고흐고 이건용을 이건용’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기법으로, 이건용만의 작품을 만드는 꿈을 꿔 온 것이다.
이건용 : (작품들을 보면)가슴으로 그리는 것도 있고 정서로 그리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런 것들이 예술로 드러날 때에는 작품으로서 메소드(방법)가 중요한 겁니다. 그 메소드가 독특하고 창조적일 때 그 작품이 가치가 있는 겁니다.
폭발과 피난민과의 동거시대
이건용 작가는 하나의 이벤트를 하기 위해서 수많은 과정과 사실 자체를 수없이 분석하고 사유(드로잉)하기도 했다.
관 객 : 선생님은 신체 드로잉과 설치작품도 줄곧 하셨잖아요. 신체 뿐 아니라 장소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작품을 하면서 장소가 가지는 의미는 뭘까요?
이건용 : 사실 저에게 어떤 특정한 장소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장소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만약에 그 장소가 가치가 있다면, 거기에서 인간에게 희망을 주고, 인간에게 보다 좋은 발전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그런 것들 때문에 손을 잡을 장소라면 그 장소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장소가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에요.
관 객 : 이번 전시가 진행된 한옥이라는 공간은 전시 장소로써 어떤 곳인가요?
이건용 : 여기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이 고옥(古屋) 때문이죠. 여기가 입장료를 안 받고 개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외국인들도 많이 옵니다. 이런 장소에서 내가 그동안 해오던 작품들이라든가 어떤 생각을 그런 장소에서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굉장히 가슴 설레게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한 번도 나는 이런 장소에서 내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거든요. 가옥은 가옥 그대로 있고, 작품은 작품대로 존재하고, 관객은 관객대로, 이건용은 이건용대로. 이런 ‘위치 시킴’은 좋은 콜라보레이션인 것 같아요.
윤씨 가옥에 전시된 이건용 작가의 작품들
이건용 작가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윤씨 가옥에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폭발과 난민 사건을 주제로 한 캔버스 작품과, 작가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 폭발적으로 작업했던 신체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과거에 작업을 한 것들이지만 전시를 위해 바탕과 몇 가지 요소들을 다시 작업하여 가져온 것. 작품들은 윤씨 가옥 마루와 안채를 비롯한 곳곳에 설치되었다.
이건용 : 가옥에 대한 스토리가 있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나한테는 지금 전시를 하면서 고려된 사항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나라 고옥, 한옥이라는 점을 생각했어요. 그 다음에 지금 현재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문제, 폭발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신문에 나와 있는 장면을 참고했어요. AP통신에 실린 소식 위에 작업을 했고, 알리는 주체에 대해서도 밝혔어요.
작가가 황해도에서 이남으로 피난 오던 시절에 찍은 사진(왼쪽)과 신체 드로잉 작품 일부(오른쪽)
한동안 인터넷과 언론 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시리아 난민 아이 크루디에 대한 그림도 있다. 이건용 작가는 고향을 떠나 피난을 오다가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 크루디가 파도에 실려 떠밀려 온 사건을 접하며, 자신이 세 살 때 해방 후 피난오던 시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하여, 전시 작품 중에는 작가가 세 살 때 어머니와 유모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이건용 : 시리아 난민 아이의 운동화를 보면, 어머니가 끈을 얼마나 단단히 묶었는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왔는데도 신발이 벗겨지지 않았더라고요. 아이의 신발끈을 묶어주던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렇게 강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이건용 작가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폭발과 피난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루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사유와 작업을 계속 해나갈 예정이라 한다. 무기를 가지고 위협하는 일과 비인간적인 폭력사건 등을 캔버스에 전사한 후 그 위에 드로잉 해서 큰 전시를 하는 것, 이건용 작가가 작품으로 동시대와 접촉하는 방법이자, 앞으로도 폭발적으로 이어질 작업의 방향이다.
이건용 작가의 문장이 적힌 동거동락 엽서
작가와의 대화가 마무리 된 다음날, 이건용 작가는 윤씨 가옥 마당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전날 참여했던 관객들 대부분도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다시 모였고,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건용 작가는 한국의 현대미술사 안에서 학술적으로만 접근되었던 자신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원했고, 실제로 이건용 작가에 대해 연구하던 학생들도 책이 아닌 작가의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에 열중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이 아닌, 작품을 포함하는 작가 속의 '실제적인 스토리'가 흘러가고 기록되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