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성능경 편]

 

한국미술의 거장 3인의 동거동락(同居同樂)전

작가와의 대화 - 성능경작가, 윤진섭 평론가와 함께 하다

인생이 어렵지, 예술이 어렵나

글_이소영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김춘영가옥에서 포즈를 잡은 성능경 작가
 

사람들이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김춘영 가옥에 들어섰을 때, 성능경 작가는 가옥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햇빛 차단용 우산을 펴놓고,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전시용으로 개켜져 있던 이불을 펼쳐 덮은 채였다. 발소리를 죽이며 한옥 마당에 한 켠에 모인 사람들. 새삼스럽게도 이곳이 누군가의 보금자리였음을, 살고 자며 주인과 함께 늙어갔을 집이었음을 깨닫는다.

부채 태우기 퍼포먼스 모습

잠에서 깬 성능경 작가는 이불을 턴다. 힘 있게 두 번 탁, 탁. 곱게 갠 이불은 한 쪽에 치우고, 하나씩 옷을 벗는다. 이어 맨손체조와 다리 들기, 물구나무 선 채로 안내문 읽기, 부채 태우기, 새총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사색당파 - 특정인과 관련 없음

김춘영가옥 안채에서, 작품과 함께 있는 성능경 작가

성능경 작가가 작업을 해 놓은 김춘영 가옥에는 수많은 흑백 인물사진이 집안 가득 붙어있다. 모든 사진의 눈 부분에는 빨간색이나 파란색, 녹색 혹은 보라색의 테이프가 붙어있는데, 그래서인지 사진을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단번에 알아보기 어렵다. 이 작품의 제목은 <사색당파 – 특정인과 관련 없음>이다. <특정인과 관련 없음>이라는 제목은 그가 1977년에 했던 작업의 제목으로, 이번 전시가 그 40여 년 전의 작업과 이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7년에는 인물들의 얼굴이 노란색 실크 스크린으로 가려졌다면 이번에는 네 개의 색띠가 사용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작가는 이 네 가지 색이 이번 전시 제목에 들어간 ‘사색당파’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관 객 : 이번 한옥 전시에서 특별히 ‘사색당파’를 주제로 잡으신 이유가 있나요?

 

성능경 : 한옥마을 테마파크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고 하니, 이게 한옥 중에서는 제일 작은 집이더라고요. 작은 집에 살았던 이 사람조차도 아마 그 당시에 자의든 타의든 사색당파로부터 자유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색당파는 조선시대,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나눠진 사림파의 분할된 집단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졌다가, 훗날엔 동인 가운데에서도 남인과 북인이, 서인 가운데에서는 노론과 소론이 나누어졌다. 이렇게 나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사색당파라 한다. 가옥의 주인이었던 김춘영도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지낸 사람이었으니, 당파간의 갈등과 힘의 균형 안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단 김춘영만은 아니다.

성능경 작가의 작품은 김춘영가옥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성능경 :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6.25전에 양반을 따졌어요. 떡을 동그랗게 썰면 소론, 길게 썰면 노론. 여자들 옷 동정도 길이에 따라 노론이네 소론이네 구분을 했고, 옷 단의 색을 가지고도 소론 노론을 구분했어요. 그게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지요. 어떤 사상이 외골수로 가게 되면 옳다 그르다 싸움을 하게 되고. 나도 그런 영향권에서 자유스럽지 않았어요. 여기 와서 보니까 그 생각이 먼저 드는 거예요. 곡선의 아름다움이나 마루모양의 특이함, 기둥의 담백한 멋이라든지 대들보의 자연스러움이라든지 이런 것은 너무 흔해가지고 의식 속에 들어오지를 않더라고요. 그렇다면 그 당시에 조선시대 있었던 사색당파와 오늘날 정파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사색당파와 사색정파간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어떤 대립이 있는가를 한 번 여러분들에게 또 제 스스로 숙고하기 위한 기회로 이 작품을 하게 된 겁니다.

 

 관 객 : 그런데 사진 속에서 얼굴을 가려놓은 색이 조금 섞여있는 것 같아요. 각각의 정당을 기준으로 색을 분류하셨다면, 왜 같은 색들만 모아놓지 않으셨나요?

 

성능경 : 설치하다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실제로도 철새 정치인 또는 사쿠라 정치인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다못해 당의 색도 바뀌지 않습니까? 빨간 당이었던 곳이 어느새 파란 당이 되고, 파란 당이었던 곳이 지금은 빨간 당이잖아요. 정치적으로는 당의 색이 지닌 성격이 정확할 것을 주장할지 몰라도, 예술 속에서는 그게 다 의미 없고, 소용없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섞어서 붙여놓게 되었습니다.

 

 

민원과 소동 - 특정인과 관련 없다니까?

소동의 원인이 된 특정 사진은 뒤집어서 전시하게 되었다.

어느정도는 예상된 일이었지만, 전시가 시작되자마자 여기저기서 문의사항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성능경 작가의 작품 속에 사용된 사진 한 장이 문제였다. 거기에 박근혜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눈 부분에는 빨간색 테이프가 발라져 있었고, 그 사진은 안방 벽면 가장 위쪽에 붙어 있었다. 작품의 제목은 '특정인과 관련 없음'인데, 정작 특정인과 관련된 문의는 끊이질 않았다. 

 

관 객 : 이번 작품을 전시하면서, 초반에 소동 아닌 소동이 있었잖아요. 민원도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성능경 : 서울시에서도 “저 사진은 조금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표명하더라고요. 그밖에도 염려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남산골 직원 분들도 곤란하셨을 테고. 일단은 “걱정하지 말아라, 토요일까지만 기다려라” 말한 다음 이후로는 사진을 싹 돌리고 그 위에 글귀를 썼어요. 그 사진은 앞으로 다른 곳에 작품을 낼 때에도 뒤집어서 보낼 거예요. 그 사진만 아무도 못 보는 겁니다. 일이 더 재미있게 되어 가는 거죠?

 

윤진섭 : 정말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요.

 

성능경 : 때로 외부로부터 압력이 들어왔을 때에는,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도 있지만 살짝 비틀어서 피하는 방법도 예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관 객 :  한옥에서 이런 현대적인, 또 다소 비판적인 전시를 했을 때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성능경 : 안 그래도 어떤 관광객 분이 “왜 여기서 전시 하냐”고 하길래, “여기서 전시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어요.별다른 대답은 안하고 가셨지만, 사실 그 관객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거예요. 자기는 아주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한옥을 감상하고 돌아가길 기대했는데, 갑자기 이런 사진이 붙으니까 불만족스러웠던 거지요. 그런데 그 점이 이번 기획에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런 한옥, 전통적인 가옥 구조에서 가장 현대적인 예술을 전시함으로써 충돌을 한 번 일으켜보자, 그래서 문화재로써의 공간이 살아있는 삶의 공간으로써 어떤 기능을 하고 역할을 할 수 있을는지 재질문하려는 것이 이번 기획전시의 중요한 의도였다고 생각하거든요.

  

 

개념미술의 시작

1974년, 성능경 작가의 신문 오리기 퍼포먼스 

성능경 작가는 젊은 시절, 이건용 작가와 함께 70년대 ST그룹에서 활동했다. ST그룹은 Space and Time의 약자로, 평면 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미술계 안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온 전위미술의 일종이다. ST회원으로서 성능경 작가가 선보였던 대표작은 <1974. 6. 1 이후>로, 신문 오리기 퍼포먼스다.

 

윤진섭 :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벤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건용 선생님이세요. 1975년에 백록화랑에서 열린 <오늘의 방법>전에서였죠. 이전에는 해프닝이라는 용어로 사용되던 것이었고요. 성능경 작가님의 경우, 1974년부터 일종의 이벤트를 진행했던 거죠.

 

성능경 : 신문이 그 당시는 두 장이에요. 8면이죠. 그거를 74년에 유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였거든요. 벽면에 하얀 패널4장 준비하고, 신문을 네 장 붙이고, 매일 가서 기사만 오려내는 거예요. 그 다음날 같은 행위를 하면서 전날 오렸던 신문을 떼어서 투명 아크릴 판에 넣고, 오려낸 기사 조각은 따로 분류하는 행위를 한 거죠.

 

관 객 :  그렇게 개념미술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나요?

 

성능경 : 당시에 있었던 개념미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통제가 심해서 본격적인 개념미술에 대해서는 볼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보니 서구의 개념미술하고 내가 했던 개념미술이 거의 유사한 성격의 것이었었어요. 직접 받아들인 건 아니었어요. 제 미술 행위는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행위고, 서구에서 개념미술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는 내가 하지 않았을까고,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합니다.

 

윤진섭 : 이게 참 중요한 말인데요. 헤프닝이나 이벤트 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당시 한국 작가들이 외국어를 잘해서 외국의 미술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정보를 정확하게 받아들였다면 서구나 일본의 아류가 되었을 텐데, 죄송합니다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영어 일어 못했어요. (일동 웃음)

 

성능경 : 사실 우리는 엄청 무식했어요.

 

윤진섭 : 그러니 잡지의 글은 읽지 못하고 이미지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더 독특한 우리만의 작품이 나온 거죠. 이건용 샘도 그렇고 김구림 선생님도 그럴 거예요. 다들 이구동성으로 그래요. 이미지만 봤다고,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되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요.

작가와의 대화에서 관객들과 이야기중인 성능경 작가(왼쪽)와 윤진섭 평론가(오른쪽) 

관 객 :  그래도 성능경 선생님이 말씀하시거나, 작품에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은 전혀 무식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그 누구보다 명쾌한 것 같은데요.

 

성능경 : 물론 내 나름으로는 공부 열심히 했어요. 책도 많이 읽었고요. 책이 재밌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좀 알아야겠다 싶었거든요. 내가 미술행위를 하는 데, 적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야겠다, 또 다른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할 때 그걸 좀 알아듣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남의 애기를 알아듣고 싶으니까 책도 보고, 미술 관련 서적도 보고, 서구 형이상학적인 책도 조금 보고, 뭐 그랬던 거죠.
 

윤진섭 : 성능경 선생님이 70년대에 신문을 읽거나 그런 이벤트를 했음에도 왜 잡혀가지 않았느냐면, 작품에 사용된 언어가 매우 고도의 상징이라 그랬던 거예요. 개념미술이 가진 일종의 암호죠, 코드해독을 못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넘어가는 거죠.사실 굉장히 체제비판적인 내용이거든요. 90년대에 와서는 엄혁이라든지 이영철, 최민 같은 민중 평론가들이 70년대 성능경 작가의 <1974. 6. 1 이후>와 <특정인과 관련 없음> 작품을 다시 조명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당시 미국 퀸즈뮤지엄의 큐레이터였던 제임 파버가 남미와 한국의 개념미술 작품들을 모아서 열었던 전시에도 초대된 적이 있어요. 


 

배고픈 시절

다리찢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성능경 작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한다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 아주 유리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의 1세대 전위예술가였던 성능경 역시 그랬을 것 같다.그는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난 후, 당시 미술계를 주름잡던 ‘입체파(지금의 설치미술)’에도 잠시 관심을 가져보았으나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장르에 도전을 해 보았자 아류밖에 되지 못할 것 같아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만큼 미술계도 하루가 다르게 변했고, 80년대에 들어서자 민중미술이 화단의 주목을 끌며 성능경 작가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윤진섭 : 성능경 작가에 대한 제 평론 글을 보면 ‘경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요. 모더니즘에서 70년대 미술이 시작되고, 80년대에는 민중미술이 성행하기 시작했어요. 70년대에 1세대 전위예술가로 활동하던 성능경 작가의 경우 중간에 멍찔 수밖에 없었죠. 여기서도 안 불러주고, 저기서도 안 불러주는 거죠. 아마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알기로는 정신병원 통원치료도 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성능경 : 이번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는데, 이런 얘기가 이제 나와서 다행이에요. 진작 소문이 났으면 자식들 시집장가도 못보냈을거 아니야.

 

관 객 : 그렇게 힘이 들 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아니면 돈이 되는 미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든지요.

 

성능경 : 나에게는 내 예술이 중요했어요. 예술을 한다고 해서 돈 버는 게 나쁠 건 하나도 없죠. 돈 버는 게 왜 나쁘겠습니다. 다만 예술로 돈을 벌고자 했을 때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영어로 창녀라는 글자인prostitute의 두 번 째 뜻이 뭐냐면, “돈을 위해서 예술의식을 굽히는 화가”라고 나와 있어요. 언어라는 게 다 역사성이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돈을 목적으로 예술 행위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prostitute가 되는 지름길인 거죠. 그런데 그런 지름길을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예술가라고 타인에게 명칭을 부여받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조금 탈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려서 파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다만 그것만이 목적이 되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결과 말고, 과정에서 말하는 예술

관객들과 대화중인 성능경 작가 
 

관 객 :  끝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좋겠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일반 시민과 만나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어떠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성능경 : 관객하고 소통행위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죠. 예술을 결과로서 보는 게 아니라 소통의 과정으로 보는 것에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관객과 대화하고 토론하고, 문제제기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그걸 안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걸 포기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전 번시를 레지던시라고 하는데, 비록 기숙할 수는 없지만 잠시라도 특정 가옥에 대기하면서 지나가는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수 있다는 것은 기획자들의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번 전시가 이벤트 따로, 한옥 따로인 현상에 머무르는 게 아니고, 제 이벤트가 한옥 구조와 서로 잘 만났으면 좋겠어요. 만남이 되든, 충돌이 되든 그건 상관없어요.

 

윤진섭 : 한국 70년대 이후에 미술의 역사는 성능경 작가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어요. 사실 말년까지 치열하게 행위예술 하시는 분들은 많이 없어요. 초창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니까 출세하려고 행위예술을 선택하는 사람이 좀 있는데, 그렇게 돈을 벌게 되고 거장이 되면, 속된 말도 ‘아 대중 앞에서 남사스럽네’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성능경 선생님의 경우 나이와 상관없이, 지위와 상관없이 끝까지 당신의 예술 세계를 이어 가시잖아요.이런 분들이 있어서 버텨 나가는 거죠. 정말 존경스러운, 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예술은 쉽고, 인생은 어렵다" 

작가와의 대화가 끝난 후, 재미있는 컨셉으로 사진을 찍는 윤진섭 평론가와 성능경 작가

작가와의 대화가 끝난 후, 성능경 작가는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씩 친필 사인을 해주고,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한국전쟁 후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1세대 전위예술가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 길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치열함이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애틋한 선후배와 동료들이 있었는지, 이날의 대화로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연극은 명확하지만 현실은 되려 모호하다"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쉽고, 인생은 어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