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녘 수륙재> 프리뷰
남산골기획공연 <귀한 음악> - 명명(暝明)한 노래 ‘아랫녘 수륙재’
영혼을 위로하는 귀한 마음, 아랫녘 수륙재
글_이소영
오는 11월,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선보이는 기획공연 <귀한 음악>의 마지막 레퍼토리는 ‘아랫녘 수륙재’다. 수륙재는 땅과 물 등 온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불교의식으로, 영혼천도를 위한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푼다. 나와 깊게 관계되는 사람의 영혼만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수륙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수륙재와 영산재
보통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의식으로는 수륙재보다 영산재가 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오늘날에 와서는 영산재와 수륙재의 차이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굳이 이론적인 차이를 설명하자면, 영산재가 살아있는 사람의 복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인 데에 비해 수륙재는 죽은 사람의 극락천도를 기원한다는 점이 있다. 또 수륙재는 영산재와 달리 그 명맥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다가 최근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영남지방의 아랫녘 수륙재
아랫녘 수륙재 모습
이번 공연에서는 수륙재 중에서도 영남범패의 맥을 잇고 있는 ‘아랫녘 수륙재’를 볼 수 있다. '아랫녘'은 낙동강 동남부지역을 가리키는데, 예로부터 범패승들이 이 지역을 ‘아랫녘 소리’라 하여 ‘웃녘 소리’(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지)와 구분하였다고 한다. 아랫녘 수륙재가 전해지는 영남지방은 불교문화가 특히나 성행했던 지역이라, 불교가 탄압받고 국행 수륙재가 중단된 조선 중엽 이후 민간에 퍼진 수륙재가 가장 많이 설행된 곳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범패와 달리 지역문화의 고유한 특색을 보존하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만나볼 아랫녘 수륙재는 아랫녘 중에서도 경상남도 통영과 고성 지역의 계보를 따른다.
수륙재의 예술성
홍고와 바라를 이용한 의식무용
단순히 지역문화의 특색만 보존하였다고 하여 공연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아랫녘 수륙재의 예술적인 성격을 조명할 예정이다. 수륙재의 예술성은 무엇보다도 불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악기와 소리, 춤, 놀이 등의 요소를 전반적으로 다룬다는 점에 있다.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진행되는 아랫녘 수륙재의 경우, 본래 2일간 이어지는 수륙재의 의식을 예술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해 90분 가량의 무대로 양식화 시켰다.
아랫녘수력재 모습
공연은 먼저 홍고라는 북을 치며 시작된다. 북소리를 통해 사방에 떠도는 영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이후에는 범패승들의 합창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짓소리가 이어진다. 수륙재의 짓소리는 서양의 음악처럼 화음을 가지고 있는 소리가 아니라, 각 사람이 가진 고유한 목소리와 떨림의 어울림을 특징으로 한다. 이후 한 사람의 독주인 홋소리가 있고, 의식이 무르익으면 불교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의식무용이 시작된다. 이 부분을 천수바라무와 상주권공이라 부른다. 특히 접시처럼 생긴 두 개의 금속악기 ‘바라’를 가지고 추는 바라무는 악기가 내는 소리의 변화와 춤의 리듬이 잘 어우러져 매력적이다. 무용이 끝나면 수륙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화청(회심곡)과 삼회향(놀이)이 진행된다. 화청은 대중이 잘 아는 민속음악에 불교 교리를 가사로 넣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한 불교음악이고, 삼회향은 모두가 한 자리로 나와 다같이 어울리며 화합과 소통을 이루는 자리다.
영남지방이 지켜온 영혼의 소리
아랫녘수륙재보존회
아랫녘수륙재 보존회장인 석봉 스님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물질문명의 시대 속에서 산사람만의 행복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죽은 천도 받지 못한 영혼들 위한 의식인 수륙재”를 통해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민족 모두의 화합을 도모하길 바란다”고 했다. 나아가 “이번 공연을 통해 수륙재의 문화원형을 잘 보여주고 사부대중, 불교권을 넘어서서 대중에게도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한때는 국가가 행하는 의식이었고, 때로는 잊혀지기도 하며 민간에서 민간으로 전해져 내려온 수륙재. 이번 아랫녘 수륙재를 통해 영남지방의 지역문화 뿐 아니라, 모든 죽은 영혼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귀한 마음’을 돌이켜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