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정회천의 가야금산조
정회천 예인(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전수조교)
또 한 번, 이렇게 음악은 깨어난다
판소리와 고법에 능통한 가야금 연주자 정회천. 그는 정재근에서 정응민으로, 다시 정권진에게 이어진 하동 정씨가의 ‘보성소리’ 원류를 태중에서 이미 양수로 삼았던 ‘쟁이’ 중에 ‘쟁이’다. 하여, 그가 ‘쟁이’들의 음악인 ‘산조’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터. 중학생이 될 무렵, 혜성처럼 등장했던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의 무릎 제자로 들어가 당대 최고의 고수 ‘김명환’이 남긴 북 가락을 전해 받고, 그의 인생은 지금까지 흘러가는 소리처럼 굽이쳐 왔다. 그리고 이제 음악 저 너머에 숨겨진 거대한 질문을 앞에 둔 2014년의 봄날. 정회천, 그는 다시 고즈넉한 한옥의 정취를 말없이 응시해 본다.
무심하게 찾아온 스승과의 만남
예술가의 분신술은 제자를 키우는 것이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함동정월은 까까머리 중학생을 앉혀 놓고 지난날 자신이 고이 간직해 온 ‘최옥산류 가야금산조’ 가락을 전수했다. 아버지 정권진이 소리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던 ‘한국정악원’의 율객이었던 함동정월. 어린 정회천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정권진의 권유로 고수 김명환과 기거하게 된 함동정월은 엄청난 연습으로 인해 셀 수 없이 깨지는 ‘안족’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스승 최옥산이 들려줬던 가야금 산조를 기억에서 복원해 냈다. 그리고 함동정월이 낳은 옛 가락은 다시금 제자 정회천에게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어려서 판소리를 익혀 소리 속을 알던 소년은 훗날 ‘최옥산제 함동정월류’ 가야금 산조의 명맥을 잇게 되었고, 세상을 향한 소년의 발걸음은 대학 2학년 시절로 내달린다.
스승에게서 비롯된 두 번의 기회
남산골한옥마을 민씨가옥 사랑채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정회천 명인
1978년. 당시 한국일보 강당에서 가졌던 제1회 정회천 가야금독주회는 함동정월 가야금 산조의 부활을 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이듬해, 독일문화원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연주를 준비하고 있던 함동정월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인해, 무대에 설 수 없었다. 행사를 주관하던 이화여대 황병기 교수는 함동정월을 대신할 분신이 필요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정회천은 세상에 나갔고, 이후 함동정월을 대신할 후계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뿐만 아니었다. 그 다음 해에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명인명창 공연에 스승을 대신해서 무대에 섰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스승은 구음으로 자신의 가락을 제자에게 확인해 주었고, 정회천 그는 이 공연으로 인해 스스로도 ‘행운’이라고 할 만큼 탄탄하게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음악은 ‘몸’으로 듣는 것”
분단의 역사 한복판을 살았던 최옥산은 북으로 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금기시했다. 스승의 가락을 전해 받은 함동정월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디느라 가락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명고수 김명환과의 만남을 계기로 산조 가락을 펼쳐냈다. 그러나 가락을 끌어내는 데 온 열정을 다 바친 함동정월이었지만, 정작 마음은 언제나 소리에 머물고 있었다. 예능보유자가 된 이후에도 판소리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접지 않았던 함동정월의 모습에서 제자 정회천은 소리의 곳간 같은 판소리의 넓은 음악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산조 역시 제대로 알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산조 연주자는 모름지기 판소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남도 지역에 근거한 판소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각 지역에서 전해지는 다양한 음악 어법을 함께 익혀야 할 것입니다. 지역별 ‘토리’를 모두 이해하고 있을 때, 산조가 가진 음악성도 제대로 발현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연습생’이 아닌 ‘연주자’가 필요한 시점
정회천 명인
약관의 나이로 스승을 대신할 차세대 명인이 됐던 정회천은 현재 전북대학교 교수로, 더불어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장차 미래를 짊어질 젊은 예인들의 앞날을 고민한다. 그는 입시 위주의 음악 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함께 ‘전통’과 ‘성음’이라는 너무나 엄격한 기준에서 젊은이들이 숨통을 트여 자주 무대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루 7~8시간 이상 연습은 하지만, 정작 무대에 설 기회는 없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앞으로는 ‘연습생’에 머무르지 않고, ‘연주자’로 자리매김하는 여건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오늘의 예인’이 되기까지, 지난 날 스승을 통해 얻었던 두 번의 행운이 큰 자양분으로 작용했음을 상기해 보게 한다. 무대라고 불리는 ‘난장’이 주는 자극과 쾌감은 분명, 젊은 세대들에게 애달픈 비관에서 벗어날 힘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통 ‘한옥’의 고졸한 멋과 산조 음악의 어울림
‘전주 한옥 마을’에 가 본적이 있는가. ‘남산골한옥마을’과 마찬가지로, 전주의 명소로 손꼽히는 그 곳에는 정회천이 마련한 정갈하고 품격 있는 한옥, ‘국악의 집’이 있다.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그 곳에서 한옥 공연을 준비하기도 했던 그는 우리 음악, 그리고 우리 악기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한옥’이라고 믿고 있다.
“한옥에서의 연주가 전통음악 산조의 본질을 관객과 함께 제대로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공연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전통 공간이 갖고 있는 공명의 기능을 통해 악기가 발현하는 그대로의 소리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정말 기대가 큽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우리의 풍류 문화가 지금의 우리음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토대라 여기는 그의 한옥 예찬이 이어진다.
“이 곳 한옥마을에서 울리는 전통음악이 정말 제대로 된 우리의 음악을 전할 소중한 매개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풍류 문화를 주도했던 계층의 사랑채가 우리 민간음악을 오늘날까지 있게 한 모태 기능을 했습니다. 단순히 건물만 보고 지나가게 하는 관광지에만 머물게 하기에 이 곳 한옥 마을은 너무나 좋은 환경과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향후 다양한 우리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상설 연주회장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시절이 재현되는 ‘공간’
사는 동안 한 번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발화’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누군들 그 시기를 그냥 놓쳐 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만약 예술가라면, 어느 예술가가 자신의 역량을 물끄러미 넋 놓고 그냥 묵혀둘 수 있으랴. 정회천의 스승이었던 함동정월은 긴장과 이완이 넘실대면서도, 장단과 가락이 깔아 놓는 복선의 논리가 번득였던, ‘최옥산제 함동정월류 가야금 산조’를 생전에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그런 음악을 이어받은 제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인 한옥에서 이번 공연을 통해 스승이 절정의 시기에 선보였던 음악을 재현하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잊지 못할 선생님의 연주를 제대로 한 번 들려주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절정기 때의 힘 있던 그 소리. 선생님의 학구열까지도 모두 전하고 싶습니다. 음악에 대한 선생님의 끊임없는 집념을 지켜봤던 저이기에 이번 공연에서 여러분과 나눌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함동정월을 향한 ‘오마주(hommage)’로서, 이번 공연은 정회천에게 가야금 산조의 감동을 입증할 절호의 기회다. 삶의 표정이 담긴 산조 가락. 운명 뒤에 숨지 않았던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소리가 갖가지 우리 음악 언어에 능통한 정회천에 의해서 감정의 과잉 없이 호명되기를 기원한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 / 글_김산효(국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