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원장현의 대금산조

원장현 예인(원장현류 대금산조보존회 대표)

 

고향의 소리로 천년의 푸른 대바람 소리를 일으키다.

미당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원장현 명인(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이수자)을 키운 건 팔 할이 고향의 대나무라고 할 수 있다대나무의 고장인 담양에서 태어난 원장현과 대나무와의 인연은 숙명이었다. 대나무 울타리가 되어있는 집에서 태어난 그는 대밭 속에서 자랐고, 아버지(원광준)의 대금 소리를 듣고, 대나무를 갖고 놀았으며, 죽순과 대통밥을 먹고, 평생을 대나무로 만든 대금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담양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어린시절을 자연 속에서 자랐다는 게 내 음악을 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몰라요. 자연의 이치를 알게 됐고.” 고향 담양은 그의 음악적 자양분이 됐다.

 

 

예술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음악

2014 <예인, 한옥에 들다> 공연장면

 

원장현은 열네 살 때 숙부(원광호)의 권유로 대금을 접하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근에서 소문난 젓대소리 명인이었고, 숙부는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였다원장현이 대금을 배운 곳은 학교가 아니라 예술현장이었다. 일찍이 여성국극단에서 반주를 하면서 유랑극단 같은 생활을 했는데 민속악의 뿌리를 하나하나 체득해나기기 시작했고, 그때 얻은 경험이 그의 음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어떤 음악이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그때는 제가 유별나다고 핀잔도 많이 들었어요. 밤늦게 공연이 끝나고 피곤해서 다들 자는데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싫었겠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안 주려고 산에 가서 연습을 했다니까요.”

 

 

스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공부

원장현은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스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했다. 김용기 선생에게 처음 대금을, 김동식 선생에게 대금산조를한갑득 선생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한갑득 선생님은 약주를 아주 좋아했어요. 낮에 선생님한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10년 이상을 다녀도 산조 한 바탕을 못 끝내더라구요. 그래서 고민하다 저는 새벽에 선생님을 찾아가서 공부를 했는데 1년도 안돼서 공부를 끝냈어요.” 어떤 식으로든 공부를 하기 위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한일섭 선생에게 구음으로 배운 대금산조

원장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한일섭 선생이었다. “선생님은 구음으로 대금 산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지병으로 아파서 더 이상 대금을 불 수 없을 때인데 선생님의 마지막 가락을 가르쳐준 셈이죠그 가르침이 제 음악에 풍부한 자양분이 됐어요. ‘원장현류 대금 산조도 한일섭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알기에 입술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대금을 불고 또 불었다.

 

 

30대 중반에 만든 원장현류 대금산조

한일섭의 음악적 영향과 원장현의 풍부한 음악적 기량으로 1985년 원장현의 대금산조가 만들어지게 됐다. “당시 국립국악원 악사장이던 이승열 씨가 저한테 원장현류라는 이름을 걸라고 하더라구요지금 같았으면 주저했을 텐데젊은 혈기에 용감하게 원장현류를 들고 나왔다니까요()라는 것은 70대 중반 정도 원로가 됐을 때나 돌아가신 다음에 붙이는 것인데 30대 중반에 했으니 난리가 났지요.”

원장현류 대금산조’ 공연이 성황리에 끝난 후 이듬해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원장현류를 전공하겠다는 학생이 생겼고이후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원장현류를 강의하고 있고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다.

 

 

 

대금소리에 내가 살아온 세월이 다 나타나 있는 거죠.

원장현류 대금산조에는 저음에서부터 고음까지 고루 담겨 있어요. 대금이 낼 수 있는 소리는 다 가락으로 연주를 한 거예요. 저음을 이용해서 중후한 맛을 내고, 귀곡성 같은 애절한 계면성음을 잘 낼 수밖에 없는 건 어린시절부터 듣고 자라면서 힘들게 살아온 삶이 내 음악 속에 다 표현이 된 거예요. 전라도에서 연세 드신 분들이 제 대금 소리를 들으면 너 고생 많이 했구나 해요. 내가 살아온 세월이 소리에 다 나타난 것이죠.” 원장현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애절한 계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장현은 대금산조뿐만 아니라 거문고, 태평소 등 여러 악기를 골고루 잘 연주하는 남다른 기량을 지니고 있는데 그의 이런 음악적 역량은 작곡에서 발휘되고 있다. “소쇄원을 비롯해 날개”, “고향가는 길”, “”, “항아의 노래등 퓨전곡은 대중성까지 담보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고향과 자연이 작품의 모티브

그의 작품 중 유난히 자연과 고향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작품의 모티브를 고향과 자연에서 찾았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한들 대자연을 따라갈 수가 없고, 누구나 고향이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같드라구요. 외국에 가서 고향가는 길을 들려주면 우리와 거의 흡사해요. 그 사람들도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내가 고향 담양을 떠난 지 50년이 됐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을 어렸을 때 사물을 볼 때부터 시작해서 거의 50년 세월을 지나면서 고향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생생히 기억을 해요.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가족같이 살아왔던 고향사람들, 고향을 떠난 사람들까지 음악적 소재가 되는 거예요.” 그는 지금도 고향 담양을 수시로 찾고 있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  글_김경순(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