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김호성의 시조가사

김호성 예인(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준보유자)

 

 

풍류방의 마지막 세대가 전하는 봄날의 풍류

풍류객들이 즐겨 듣던 노래 정가(正歌).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 정가를 부르면서 인격을 수양했고, 담소를 나누면서 문화적, 정치적으로까지 소통을 했다. 풍류방의 마지막 세대인 김호성(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후보). 그는 정가를 통해 사라져가는 풍류방문화를 지키고 있다. “50~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장안에 수십 개의 풍류방이 있었어요. 풍류방에는 풍류를 즐기면서 인격을 수양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어요. 마음의 여유가 없고 각박한 요즘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게 풍류방문화예요.”

 

 

국악사양성소에서 전인교육

김호성 명인

 

평생을 오직 한길, 정가의 길을 걸어온 김호성 명인은 어떻게 풍류음악에 첫발을 내딛게 됐을까?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그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 3기생으로 입학했다. 전인교육을 하는 그곳에서 향피리, 대금단소, 민요, 판소리, 범패, 가곡, 무용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배우면서 기본기를 충실히 다졌다. 처음엔 대금이 전공이었으나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주환 선생에게 가곡, 가사, 시조를 배우면서 평생 정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43년째 스승 이주환 선생 추모사업

소남(韶南) 이주환 선생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 첫 제자가 김호성이었다그래서 일까? 그에 대한 이주환 선생의 애정은 더 각별했다. 정가 지도는 물론이고그가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지 수시로 살피면서 정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공연이나 방송이 있으면 늘 절 데리고 다니셨어요.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 때부터 방송 출연을 하게 됐다니까요. 이주환 선생님은 말이 별로 없었어요. 뒷짐을 지고 학교를 한 바퀴를 돌면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내게도 특별한 분이지만 국악계에서 다시 나올 수 없는 분이에요.” 

 

오직 스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가면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43년째 추모공연을 열고 있는 걸 보면 스승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존경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최고의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공부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의 스승이 있는데 여성가곡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최정희 선생이다. 최정희 선생에게 가곡, 가사, 시조는 물론이고 잡가까지 배웠다배울수록 정가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그는 다른 방식으로 노래하는 선생이 있으면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그 선생을 찾아가 공부를 했고, 조을봉, 유한경, 김태영 등 당대 최고의 풍류방 가인들에게 풍류방음악을 익힐 수 있었다.

 

 

최초의 가곡완창발표회 

그렇게 다진 실력으로 1971년 최초로 가곡완창발표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주환장사훈, 성경린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칭송을 받기도 했다. 국악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김호성은 국악사양성소 졸업 후 국악관현악단 창단 멤버로서 부지휘자이자 대금주자로 활동했다. 또한 국악보급진흥회를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단소를 가르치는 등 국악 보급에도 힘썼다. <시조교본>, <단소교본>, <남녀가곡보>, <12가사보> 등을 발간해 정가의 이론과 실기 등을 정립해 나가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또한 풍류방문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한국민속촌에 99칸짜리 사랑방을 만들어 옛날 방식 그대로 풍류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11년 동안의 노력으로 해외언론에서 관심을 가질 정도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감하고 소통해야 진정한 락()

김호성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소통이라고 했다
 
음악이라는 게 좋은 것만은 아녜요. ‘()’자가 즐거울 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락에는 공유공감, 소통 같은 의미가 담겨 있어요. 세종대왕이 백성과 즐기기 위해 친히 만든 여민락은 총 1시간 15분이 걸리는데 그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이 더불어 즐긴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즐긴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에요.” 
 
세종대왕이 여민락을 통해 공감하고 소통했듯이 그는 정가를 통해, 우리 음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제자양성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일반인들에게 국악을 가르치는 일에도 애정을 쏟았다.
 

박물관을 방불케할 정도로 많은 국악자료 수집

김호성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국악자료 수집이다. 국악이 좋아서 모으기 시작해 하나 둘 국악자료를 모으다 보니 점점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국악자료를 모으다보니 고향집 논까지 팔 정도로 점점 미쳐갔어요. 1960년대 전주 전연옥씨 단소산조 9분짜리를 쌀 11가마니 주고 샀어요. 신광웅 산조 26분짜리를 구하기 위해 경주를 열 번 넘게 갔어요. 그때 돈 20만원 주고 샀으니 지금 같으면 아마 몇 천 만원 할 거예요. 다들 미쳤다고 했죠. 하지만 그 자료를 구한 다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어요. 그 자료를 나만 갖고 있잖아요.” 

 

국악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모은 국악자료는 국악 관련 종사자나 연구자들이 소장하고 싶어 할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김준현, 함동정월, 지금성 등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명인명창들의 음악을 담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란 음반과 책은 그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음악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는 게 때로는 허망하게 느껴져그렇게 어리석은 짓이 없지... 하지만 내가 좋아서 모으기 시작했으니 후회는 없어요.” 

 

박물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국악자료는 난계박물관과, 국립국악원 등에 기증하고 지금은 4~5천 점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방문화 재현

정가 보급과 풍류방 문화 재현, 국악자료 등을 통해 이 시대에 풍류정신을 일깨워온 김호성은 남산골 한옥마을과 유난히 인연이 깊다. 개관기념 공연을 했고, 2년 후 풍류 공연 때 무대에 서기도 했다.남산골샌님이라고 들어봤죠?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에다가 운을 달아 풍월을 읊던 장소가 바로 남산골한옥마을이에요. 서울시민들이 그 풍류를 몰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평생을 풍류방의 정수인 정가의 맥을 이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했고, 풍류방문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던 이 시대의 가객, 김호성. 그가 갑오년 봄날, 풍류문화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 무대에 선다. 평소 무대에 잘 서지 않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마이크를 전혀 쓰지 않고 옛날 방식 그대로 노래하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어 이번 무대에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옛선비들의 고고한 기개와 풍류를 느낄 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에서 풍류방 마지막 세대인 김호성이 펼치게 될 봄날의 풍류를 기대해 본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 / 글_김경순(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