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인, 한옥에 들다 - 오늘의 예인 인터뷰
김일구의 아쟁산조
김일구 예인(중요무형문화재 제 5 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
아쟁산조, 가야금산조, 판소리 등
모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 시대의 만능 예인
모든 예술은 시대정신의 산물이라 했다. 우리 음악에도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후보인 김일구, 그의 예술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늘 새롭게 흐르고 있다. 판소리, 가야금, 아쟁산조 등 다양한 전통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고,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락과 새로운 창극을 만드는 등 다양한 재능을 지닌 그는 이 시대가 원하는 진정한 예인이다.
끝없는 배움의 길
우리 전통 예인 대부분이 그렇듯 김일구도 가난 때문에 우리 음악을 선택했다. 아버지 김동문 명창을 통해 소리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이웃에 살던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예술인생은 끊임없는 배움의 길이었다. 호남국악원에 있는 공대일 명창을 찾아가 소리공부에 전념했다. 그런데 너무 의욕만 앞선 탓인지 소리에 회의를 느껴 잠시 소리를 접고 여러 가지 일을 두루 전전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가야할 길은 소리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쟁소리에 빠져들다.
2014년 예인, 한옥에 들다 공연 장면
다시 소리를 시작한 그에게 변성기가 찾아와 계속 소리를 할 수 없게 됐다. “내가 판소리를 할 때 아쟁소리를 들었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아쟁을 좀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딱 한 박자, 중모리를 가르쳐주고 안 가르쳐 주더라구요. 이걸 갖고 죽고 살고 연습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다니던 단체를 그만두고 내 스승인 장월중선 선생님을 찾아가서 아쟁산조를 배웠어요. 술대를 잡은 손가락에서 물이 생기고, 진물 나고, 고름이 날 때까지… 우리가 공부할 때는 일회용 반창고도 없었어요. 헝겊에다 밥풀로 이겨서 붙였어요. 그런데 다시 술대를 잡으면 걸려서 빠져버려요. 다시 감아도 물이 질질 흘러요. 나중에 하고 나면 아쟁 줄에도 물이 묻어 있어요. 연주할 때는 몰라요. 하고 나면 그때부터 아파서 죽습니다. 그걸 이겨야 해요.” 그 아픔을 이겨내자 비로소 번데기 껍질을 뚫고 날아올라 자신의 가락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섬세하면서도 강한 김일구류 아쟁산조
산조는 일정한 틀이 정해져 있지 않고 자기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음악인데 선생님께서는 스승에게 배운 가락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락인 김일구류 아쟁산조를 만들었다. “판소리에서 동편제, 서편제가 있는데 악기도 마찬가진데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박종선류는 서편제, 김일구류는 동편제라고 해요. 김일구류는 섬세하면서도 강하고, 박종선류는 부드럽고 한이 있다고 해요. 내 산조는 강하면서도 음의 변화가 달라요. 끌고 가다가 솟았다가 강하고, 맺을 때 정확하게 맺어요. 판소리 눈대목이라고 하듯이 김일구류 아쟁산조는 눈이 딱딱 있어요.” 동국대 최종민 교수는 김일구류 아쟁산조는 “말하듯이 하고 있다.”고 했다. 판소리를 공부한 그는 판소리 기교를 아쟁에다 접목시켜 아쟁산조를 만들었다. 그의 아쟁산조는 한을 가장 잘 표현하면서도 한을 신명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아쟁, 판소리, 가야금, 삼재(三才)의 명인
김일구는 아쟁산조뿐만 아니라 가야금산조와 판소리에도 능하다. 김일구의 예술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분야는 판소리. 오랜 세월 판소리에서 공력을 다져온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 소리를 익혀 동편제와 서편제를 두루 섭렵했고, 판소리 다섯 바탕 또한 다 가지고 있다. 아쟁과 판소리, 가야금, 삼재(三才)의 명인인 김일구, 한 가지도 잘 하기 힘든데 그는 어떻게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밖에 없어요. 노력… 맨날 해야 해요. 춘향가 한바탕이 5시간인데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이불 덮고 자면서도 춘향가를 해요.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안해요. 자면서 잊어버려요. 그렇게 날마다 하게 되면 득음을 하는 거예요. 득음이라고 하면 판소리만 생각하는데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입력하는 것도 득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득음이 안 되면 잊어버려요. 득음이란 많이 해서 잘 하게 되는 것도 득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판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다 유효한 말입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김일구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 왔다. “제가 누구보다 전통을 선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 가는데 고집만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서 전통은 전통대로 변함없이 지키면서 시대를 따라 가야겠다해서 창극 <뺑파전>을 만들었습니다. 김소희, 박귀희, 박초월 선생님 등에게 불려가서 혼났어요. 전통을 버린다고 해서… <뺑파전>은 서양춤과 가요, 판소리, 이 세 가지를 접목해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백대웅 교수님이 <뺑파전>을 가지고 중앙대에서 세미나를 했어요. 과연 전통음악을 이렇게 가지고 가야 할 것인가? 이 세미나가 끝난 후 그 소식을 문화재청에서 보고 듣더니 잘 했다고 하더라구요. 전통 속에 이 시대의 것도 보여 주면서 전통을 보여주니까, 저렇게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칭찬을 받았어요.”
전주의 명소가 된 온고을소리청
늘 새롭게 흐르는 김일구는 오랜 서울생활을 접고 지난 2000년 전주에 생활터전을 마련했다. “고향인 화순이 아니라 전주를 택한 것은 전주가 소리의 고장이자 전주대사습이 열리는 곳이고, 또 그동안 전주에서 많은 공연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온고을소리청이 전주의 명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곳에서는 맨날 소리가 났어요. 가야금소리나지, 아쟁소리나지, 거문고소리나지, 노래 소리 들리지… 오고가는 사람들이 이곳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담을 넘어 보다가 다치기까지 했다니까요. 온고을소리청에서 제자 발표회도 하고 수시로 크고 작은 공연을 열었는데 공연이 있을 때면 국수를 삶아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다 먹였어요. 동네잔치를 한 셈이죠.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온고을소리청이 전주의 명소가 돼 있더라구요.” 전주의 명물이 된 온고을소리청은 여명카메라박물관을 같이 운영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는 지금도 크고 작은 국악공연이 열리고 있다.
멀티플레이어 제자들
전통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김일구. 그는 후진 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요즘엔 전천후시대예요. 판소리 하나만 해서는 안돼요. 소리하는 사람도 연극은 물론이고 무용의 기본, 악기의 기본도 알아야 되고, 이런 걸 다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들에게 소리, 연극 등 모든 걸 가르쳐요. 외부강사를 불러서… 그래서 김일구, 김영자 문하에 들어가면 전체를 할 수 있다고 해요.” 그의 제자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그처럼 제자들도 새로운 걸 시도하길 바라고 있다.
다만 처음에 배웠던 것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근본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거죠. 바탕이 단단한 사람은 뭘 해도 잘 합니다. 퓨전이나 현대음악을 해도 나타납니다. 기본이 있는지 없는지… ”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온 김일구, 그가 꽃피운 예술의 향기가 이 봄날, 남산골한옥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_남산골한옥마을 / 글_김경순(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