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공연, 팀결성의 순간

 

안상욱 : 저희 첫 공연이 여기였는데…. 2010년 10월 15일, 남산국악당. 팀의 첫 공연이었어요. 결성공연.

 

권보라 : ‘숨’은 언제가 첫 공연이었나요?

 

박지하 : 2008년 11월이었나? 북촌 창우극장에서 했던 것 같아요.

 

권보라 : <천차만별 콘서트(이하 <천차만별>)>죠? 그걸 하시고 <21세기한국음악프로젝트(이하 <21세기>)> 하신 거에요?

 

박지하 : 네. 2009년에 했죠.

 

권보라 : 보통 거꾸로인데.

 

안상욱 : 저희 <21세기> 나갈 때 ‘숨’ 동영상 보면서 연구했어요. (일동 웃음)

 

권보라 : 처음에 두 분으로 시작했던 이유가 있나요?

 

박지하 : 저희는 원래 4명이었어요. 처음에 좀 덜 진지하게 작업할 때 4명이었죠. 그 후에 의뢰 받아서 작업하다가 2명이 의견이 안 맞아서 나갔는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팀을 하기로 했으니 이걸로 뭔가 해봤으면 좋겠는데 싶고. 보통 팀이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3명, 4명이 되어야하는데 2명이여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하는 오기가 있었어요. 다행히도 저는 관악기였고 이 친구는 현악기였는데, 만약 관악기와 관악기가 만났으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뒤로 같이 음악작업을 진지하게 해보자해서 하다가, <천차만별> 공모가 그때 있었어요. 사실 저는 처음에 떨어졌어요. 10팀에 못 들어서 떨어졌었는데, 그 10팀 중에 한 팀이 지방 팀이었는데 갑자기 못한다고 해서, 나중에 전화를 받고서는 하게 되었죠. 그때는 음악만 한 게 아니라 무용하는 친구랑 무대에 밀가루 뿌리고 그런 걸 했어요.

 

권보라 : ‘그림’팀은 첫 공연이 기억나세요?

 

신창열 : 2001년에 정동극장에서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비교적 많이 했었죠. 처음엔 제가 공부하다가 음원작업을 목적으로 후배들에게 녹음을 한 번 씩만 하고 가라고 꼬셨어요. 그래서 음원작업을 조금씩 해서 밀림닷컴(millim.com)이라는 인디 뮤지션들이 음원을 올리던 사이트에 올렸죠. 근데 음반회사에서 전화가 온 거에요. 그래서 녹음했던 애들 다 모아서 연주를 했는데, 공연을 해야 할 것 같고 해서…. 그렇게 시작했죠.

 

정진세 : 두 팀 다 10년 차이신가요?

 

권보라 : 아니에요, 여기는 9년입니다.

 

안상욱 : 올해가 6년째입니다.

 

정진세 : ‘고래야’가 그것밖에 안됐어요? 10년 넘은 것 같은데.

 

안상욱 : 아직 새파랗습니다…. (일동 웃음)

 

정진세 : ‘그림’은 정말 옛날부터 있었던 느낌이긴 한데… 더 상징적인…. (일동 웃음)

 

신창열 : 만으로 15년입니다. 원래 작년이 15년이었는데, 저희가 활동을 한 동안 안 해서 작년에 뭐할 게 없는 거에요. 누가 올해가 15주년이라고 전화했는데, 그럼 어떡하지? 그럼 내년에 하자, 내년에 만으로 하자고 해서 올해를 만으로 계획하고….

 

정진세 :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데뷔하기 전에 어떤 기억들이 있겠네요.

 

신창열 : 그쵸. 저는 어쨌든 두 팀의 음악을 되게 좋아합니다. 팬이에요.

 

정진세 : 두 분은 어떠신가요?

 

안상욱 : 이렇게 말하면…. 팬이라고 하면 뭐라고…. (웃음)

 

정진세 : 서로의 음악을 자주 들으시나요?

 

신창열 : 저희는 예전에 잘 안 들었어요. 진짜 안 들었어요. 배타적인 느낌은 아니었는데, 다른 팀 음악들 참 좋은데 잘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한 4~5년 전부터는 입소문 난 팀들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그 때 음악 좋다고 했던 곳이 ‘고래야’하고 ‘숨’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팀도 있었겠지만…. 우리만 그랬나? (일동 웃음) 이제 철이 들어서 음악 많이 들어요.

 

 

창작방정식X, 창작에 대하여

 

안상욱 :  ‘고래야’는 초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해요. 음…. 아무 것도 없진 않았는데, 오히려 초기에는 레퍼런스에 의존했던 것도 있었죠. 저희 팀은 한국 전통음악 전공자 4명, 그리고 브라질이나 아프리카 퍼커션 연주하던 저, 인디락 뿌리에 연극이나 무용도 공부하던 리더 작곡 옴브레 구성이었죠. 그러다보니 가장 아이디어랑 의견을 많이 내던 사람이 국악을 안 한 두 명이었는데, 저희 팀이 시작할 때부터 그런 칼라가 있었어요. 국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악기를 합주할 때 매력적인 포인트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죠. 초기에는 그런 의욕과 탐구심이 있었어요. 저희 팀 작곡가가 고민하는 방식이랑 제가 작곡하는 거가 매우 달랐거든요. 저는 되게 파고들어서 찾으려고 하는 타입이고, 옴브레는 그냥 굉장히 어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순간 떠오르는 것들을 막 시도해보는 타입이어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면서 만들어진 것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게 처음에는 둘 다 국악을 모르니까 “이런 장단이 있대.” “이런 악기는 이런 소리를 내고 이런 음역대나 이런 테크닉이 매력이야.” “아 그걸로 뭘 해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거는 좀 원래 있던 거를 재조합하는 그런거일수도 있잖아요. 초반에는 “뭐 아 내가 들었던 어떤 전통 곡에서 이 부분이 좋은데 이 부분을 이렇게 풀어보고 저 장단이 괜찮은데 저 장단을 섞어볼까? 내가 좋아하는 브라질 리듬을 섞어볼까?”같이 조금은 기계적인 결합을 하려는 게 있었죠? 그래서 시간도 오래 걸렸고, 처음 만들어진 곡이 ‘물속으로’라는 곡인데, 그게 거의 6개월 7개월 정도를 계속 고쳤어요. 그런 방식의 창작을 했던 시간이 있었는데 점점 작업 시간이 빨라지고…. 지금도 저희도 국악을 잘 모르긴 한데, 계속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팀들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익숙해지는 것도 있고, 많은 걸 보게 되는 것 같아서 조금 더 어떤 확신을 갖고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저희가 3집을 준비 중인데 그 방식의 결과물들이 3집에 나올 것 같아요. 1집은 6명이 해보고 싶었던 걸 중구난방으로 했던 음반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정신없는 걸 해결하고 싶어서 2집 때 토속민요로 앨범을 냈었고요. 그때 민요에 대해서 공부를 좀 많이 했어요. 저희는 항상 우리는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팝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지만, 사실 일반인들은 저희의 노래가 민요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3집은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우리 방식의 음악을 만드는 시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걸 공연 때 어떻게 얘기해요. (일동 웃음)

 

정진세 : 6개월 정도가 걸리면, 정말 팀에서 사용할 수 있 모든 자원과 영감, 시간 같은 것들을 모두 쓰시는 편이네요?

 

안상욱 : 저희 팀은 작곡가가 악보를 그려서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악보 작업에 굉장히 미숙해요. 사실 많은 밴드들은 어떤 테마를 가지고 오면 잼을 하면서 공연을 하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뭔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그게 대금이랑 거문고가 어떻게 풀지는 그 연주자들이 더 잘 알 수밖에 없는데 그거를 맡겼던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여기서 거문고는 어떻게 칠까”를 작곡자가 알려줄 수 가 없었어요. 내일 저희가 TED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옴브레가 연사로 나가는데요. 옴브레 연사의 주제가 <나는 국악을 모릅니다>에요. 거기서 하는 게 이런 내용이에요. 옴브레가 가져온 곡이 있었는데 6개월 동안 해체되었거든요. 거의 아무것도 안 남았어요. 실제로 쓴 게, 다 이건 이 악기로는 맛이 안 산다고 바꾸고, 막 그런 과정이 있었어요.

 

박지하 : ‘숨’은 처음에는, 둘이 즉흥연주를 한 뒤에 거기서 나온 좋은 소스를 발전시키는 방식을 많이 했어요.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식으로 하면 시간이 되게 많이 오래 걸려서 제가 어떤 부분을 만들어가서 거기서 조금 더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바꿨어요. 저도 가야금이라는 악기를 하면서 예전보다 많이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이런 소리를 냈으면 좋겠고 여기부분은 이렇게 해줘. 여기에 어울리게.’ 이렇게 주문하기도 하고요. 피리가 내야하는 음색이 있고, 가야금이 내야하는 음색이 있다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피리 자체로 낼 수 있는 소리들을 찾아보고… 악기 하나가 말하는 수단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했었죠. 저희는 리듬악기가 없잖아요. 채워주는 그런 것들이 필요한데, 저 같은 경우는 정민 씨 가야금에서 사운드를 찾는 것 같아요. 거문고에서 사용하는 음색 비슷한 거를 내줘,라고 요구를 하기도 하고. 이 악기에서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사운드를 찾아내는 것 같아요. 그리고 둘이다 보니까, 곡의 구성은 좀 더 잘해야지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조화나 호흡이 잘 맞았으면 좋겠어서 자주 만나죠. 거의 평일에는 아침시간은 비워놓고 매일 만나서 얘기를 하든, 연습을 하든, 아니면 새로운 곡을 만들든 그렇게 시간이 많이 보내요. 그런 시간이 쌓여서 호흡으로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정진세 : 창작과정이 악기의 사용법을 재발견하고 찾는 과정이네요.

 

박지하 : 네. 그런 것도 있고, 음악적으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음악을 레퍼런스 삼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오브리나 공연에 참여하면서 다른 뮤지션들 만났던 경험에서 얻은 것들을 차용해서 곡을 만들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도 보고 배우는 것 같아요.

 

정진세 : 기반은 전통예술이지만 “어? 저팀이 저런 것도 하네” 하는 파격적인 곡들이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 ‘고래야’는 인원이 많아서 뭔가 단일한 의견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은데, 반대로 ‘숨’은 둘만 합의하면 결정이 나는 거잖아요.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니면은 잘 맞지 않은 결정을 빨리 내려 버리면 돌아가기도 힘들잖아요.

 

박지하 : 사실 저는 끌고 가는 입장이고요. 정민 씨가 제가 설득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며 잘 따라와줘서요.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지만 처음에는 그런 부분이 조율하는 게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둘이다 보니까 좀 더 이야기가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같이하는 시간이 오래 되었으니 그게 장점이 될 때도 있고. 너무 깊이까지 속속들이 이야기해야 되니까 힘든 부분도 있긴 한데, 잘 맞춰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신창열 : ‘그림’은 연주앙상블로 만들어진 음악들이 아니라 음원작업들로 시작했던 음악들이라 전과 후의 개념이 달랐죠. 그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어요. 연주앙상블로 다시 만들어서 기존에 음악의 성격이 가지고 있었던 질감이나 음악 구성을 다시 생각해야 되니까…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악기구성을 거기에 맞춰서 가다보니까 관성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되고. 음반작업도 음반회사에서 콜이 와서 음반작업을 하게 되고, 기본적으로 악기구성이 변화가 안 되고 계속 갔었죠. 저는 변화를 좀 계속 원했는데, 이 멤버들이 다 같이 똑같은 정도의 성취감을 얻을 수 있도록 리더인 저는 꽤 오랫동안 노력을 해야했고, 악보작업도 “왜 쟤만 자세하게 그려줘, 나는 왜 성의 없이 그려줘.”하거나, 가끔 타악 파트에서 “형 나는….” 이런 분위기도 있었고, 요구하는 바와 성취도가 악기성격에 따라서 다 다르고, 또 악보에 의지를 하더라도 밴드 성격에 맞는 앙상블이나 바리에이션이 필요하니까요. 그런 것들이 계속 요구되고, 저는 사업계획서에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수식어를 앞에 다 집어놓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떤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건지 모르겠는… 정체성의 혼란의 시기가 오죠. 보통 2~3년에 한 번씩 온다는데 저희는 매년 왔고요. 굉장히 오랫동안 갔어요. 다른데서 사실 이야기 안했던 이야기들인데, 꽤 오랫동안 활동하던 6~7년 동안은 저희가 사실 우리가 뭐하는지 잘 몰랐어요. 그때가 3집을 내자고 하는 기간이었거든요. 그래서 내부에서 다양하게 음악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 좋겠고, 악기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악기의 연주 능력에 대해서 너무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 같이 즐겁게 음악을 했으면 좋겠고.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누구 하나 원수처럼 지내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이 안에서 편하게 행복하게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능력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들을 했으면 좋겠었고, 그래서 프로젝트 체제로 오는데 7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야기를 담는 음악들을 했으면 좋겠고. 나이들도 있어서 열심히 연주만 한다고 해서 좋은 게 나오지 않거든요. 지금은 술 먹을 체력도 안 되고. 그래서 다 모여서 커피를 마시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작품계획 짜고 그러면서 창작을 조금씩 하고 있어요.

 

권보라 : 요새 전체적인 단체의 분위기가 유닛이랄까, 단체 내에서의 개인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은데 그게 생존의 방식일까요?

 

신창열 : 저는 생존의 방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결국 창작과정에서는 안착하는 범위와 소스들이 계속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려면 연주 구성과 시스템에 대한 규모적 변화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너무 오래 가면 사실 좀 힘들어지더라고요. 지금 있는 시스템을 조금 바꿔서 완성도를 추구할 수 있는 목표 안에서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는 게 목적인 것 같네요. 어떻게 보면 기획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규모가 되어버린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전부터 변화에 대한 욕구는 어느 정도 다들 있었던 것 같아요.

창작에 대한 영감, 서로간의 앙상블

 

신창열 : 멤버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게 제일 클 것 같고요. 벼랑에 몰렸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타이밍 좋게 지탱이 되는 것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도 했어요. 누군가가 위에서 구심점이 있어서 끌고 올라가는 관계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일이 너무 많거나 그러면 쉬기도 했고요. 전통음악 내지는 국악계 내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서로 끌어주는 분위기보단, 많진 않았지만 불특정다수의 관객과 서로가 응원이 되어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상상 하지 못했었던, 저희 음반을 냈던 시기가 음반이 그나마 약간은 팔리고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던 것 같아요. 근데 그 음반들을 샀던 분들이 여기저기서 후기들이라던가, 이제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줬을 때… 그게 의외로 힘이 되더라구요.

 

정진세 : 말씀을 들어보니까 이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과부하가 걸리면 과감하게 쉬시고 그러신 거잖아요?

 

신창열 : 네. 안 그러면 좀 누구하나는 총대를 메고 너무 힘든 과정을 가야되는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안 그러면 아예 팀이 해체될 수 있다는 위기도 느꼈고. 그래서 그냥 쉬자고 했죠. 사실 활동 안하면 음악 못한다는 위기감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한 10년 후에라도 다시 하면 되지… 하고 마음 편히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정진세 : 요새 저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계속 남더라고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말이 나온 김에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고래야’는 활동을 단기간에 엄청 많이 하셨는데…. 지금도 하시지만 물들어올 때 엄청 빨리 저으신 것 같아서요.

 

안상욱 : 그 말을 해주신 분이 허윤정 선생님이셔서 쉬고 싶은데요!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정진세 : 저는 아는 멤버들이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거에요. 이제 20대 체력도 아니고, 30대 체력은 정말 힘들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똑같이 드리자면, 응원하고 지지하는 분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행운과 위기가 있었는지,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안상욱 : 저희도 사실 비슷한 고민이 있거든요. 이게 어떤 단체든 솔로가 아닌 이상 5년 이상 넘어가면 진짜… 음악적인 성취가 그 팀의 생존에 완전 크리티컬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사실 저희 팀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었다는 시기가, 사실 3년 정도였어요. 당연히 힘이 빠지게 되고, 우리가 욕심냈던 것만큼 되게 공허 해지는 게 있고…. 뭔가 성취를 못 느끼게 된 것도 있었고. 사실 저희 팀에서는 제가 끝까지 가고자 했던 모델이… 뭐랄까, 단체화 되지 않는 거였거든요? 저희가 그룹이 되고, 그 안에 직원을 뽑고, 뭐가 되고 그러면 경영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같은 공연을 여기저기 돌리게 되는 활동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거는 모르겠어요. 전수회에 적합한 형태인 것 같고. 우리는 밴드로서 시작을 했는데, 관습적으로 국악계 생존방식이 그래왔어요. 그 방식을 너무 탈피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결국에는 그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게 되면 먹고사는 문제가 결부되고, 국악이라는 문화 컨텐츠가 지원사업과 연결이 되면 사람들이 다 그걸 따라가요. 그게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저희는 그냥 밴드 활동을 하고 그 안에서 생계를 해결하기 보다는 각자… 다른 음악이 하고 싶으면 다른 밴드도 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그래서 저희는 자체 기획사를 작년에 제가 만들었어요. 에이전시가 따로 있기는 한데, 그 고민을 제가 작년~재작년에 열심히 했어요. 이대로는 확실히 아무리 주목을 받아도 6명이 다 같이 생계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겠다, 어떻게 어떤 형태로 가야할까 고민을 했고요. 팀이 오래가려면 결국에는 각자 다른 일들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이거 아니면 큰일난다’하는 상황이 되면 오래가지 못하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렇게 안 되려면 다른 관심사가 생겨야하는 것 같아요.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살아남으려면. (일동 웃음)

 

박지하 :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창작 면에서도 각자가 다른 음악에 가 있다가 다시 모여서 숨에 와서 숨의 음악을 만드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꼭 돈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음악적으로도 필요한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는 각자 레지던시도 따로 갔다 왔는데, 다시 만났을 때 생기는 에너지도 다른 것 같거든요. 각자의 시간도 만들려고 노력을 했었고요.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이 팀에 대한 기획적인 부분이나 전체적인 것들을 다 담당해서 연주활동이랑 병행하는데 있어서, 몇 배로 더… 다른 머리를 쓰는 거잖아요. 계속 같이 하는데 있어서 힘든 것에 대한 거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가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누군가에 맡기기에는 우리나라 음악시장에서는 전문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도 많이 전문화돼서 세분화 될 수 있고, 그래서 같이 발전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정진세 : 8~9년차 되셨으면 위기도 잘 넘겨 온 거라는 이야기인데, 두 분 중 한 분이 레지던시 가있으셔도 활동을 할 수 있는 건가요?

 

박지하 : 저는 ‘숨’ 활동이 없던 시기에 맞춰서 갔었고, 정민 씨는 약간 활동이 있던 때에 가셨는데… 제가 조금 참았죠.

 

정진세 : 서로 약간 조금씩 참는 식으로?

 

박지하 : 네. (웃음)

 

정진세 : 국악기의 특성이 공연 방식에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나요? 작년에 홀로 태평소 주자로 활동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단독공연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태평소 주자의 애환이랄까? 그런 게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었거든요. 세 분 다 대표이시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나 아닌 다른 주자들의 마음을 헤아려야하는 그런 상황도 직면할 것 같아서요. 악기의 서로 다른 쓰임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랄까….

 

신창열 : 자기가 이야기를 충분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창작 형태와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충분히 가능할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안상욱 : 저도 ‘그림’ 대표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악기의 가능성이라는 건 연주자 태도 문제 같거든요. 팀을 하면 그런 속도의 차이는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악기에 대한 꿈이 많은 사람도 있고, 욕심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개인 독주를 언젠가는 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는 연주자들도 있고, 나는 그런 거보다는 좋은 반주자, 조력자로서 역할을 하는 게 좋다는 사람도 있고, 성향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저희 팀은 사실 아무도 앞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제가 가장 걱정했던 거였어요. 아무로 앞으로 나서지 않을까봐… 음악을 연주하는데. (일동 웃음)

 

신창열 : 그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앙상블이 될 수 없는 악기들의 조합이 있었는데? (자료 찾음) 제 생각에는 서로 다른 국악기-서로 다른 서양 악기 조합이 있어도, 사실 앙상블로서 딱 좋은 조합은 아니에요. 차라리 누군가 하나가 딱 튀어 버리면 나머지가 앙상블이 될 수도 있을텐데…. 경험을 하지 않았고, 본인의 성향과 욕심, 영향이라는 것이 같이 가는 거죠. 그래서 많은 팀 중 ‘나 주인공 할 거야’하는 사람들은 사실 처음부터 팀에 들어오기 어려운 것 같아요. 솔리스트들은 솔리스트들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선배들을 봐도 그랬고. 같이 팀 활동하다가 나는 솔로로 활동할 거야 하는 건 거기에 대한 노력과 역량이 충분히 갖추어져야한다고 생각해요.

 

정진세 : 앙상블에 대한 동의가 강하신 분들인 것 같아요. 같이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서.

 

신창열 : 안정감이 좋은 거죠. 좋게 말해서.

 

 

팀의 변화에 대하여, 그간의 위기와 극복

 

정진세 : 팀을 시작했을 때는 20대~30대였다가 지금은 훌쩍 나이를 먹어서 생애 주기가 달라졌기 때문에…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서 국악팀들이 위기를 통해서 와해되었거나, 흩어질 수밖에 없는데, 각자 그걸 돌파하신 거잖아요. 그간의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신창열 : 많은 환경에서 용기를 주는 조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초창기에 그런 활동을 했던 팀들이 많지 않았는데, 대부분 호의적으로 말씀해주셨고요. 그렇게 쭉 오다가 저희는 3년 전에 팀 내에서 저랑 같이 곡 작업을 가장 많이 했던 파트너가 돌아가셨어요. 그 기점으로 멤버들하고의 마음속으로 다져졌던 결집력이 좀 달라졌던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말고, 인간적으로 결속력이 생겼던 것 같고, 그냥 그런거죠, ‘우리 이제 굳이 음악으로 해야 되나? 모여야 되나? 그냥 살면서 다들 좋은 동료로 지내면 되겠다.’하고. 약간의 평정심이 생겼어요. 서로 누구하나 욕심을 이제 낸다면 그걸 밀어주고. 그리고 이 정도 사업들은 같이 가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같이 가고, 음악적인 것도 밸런스가 많이 달라졌고, 저희가 이미 평균나이도 40이 넘게 되니까, 삶의 지형이라는 것들이 한참 젊었을 때 활동하던 시기와 달라졌다는 걸 경험상 알게 되었고요. 거기서 겪었던 변화들이 굳어서 서로 그런 것들을 챙기기 시작하게 된 게 아닐까…. 3년 전부터 그런 게 있었죠.

 

안상욱 : 저희는 2집을 낸 게 큰 사건인 것 같아요. 작업기간은 길었는데 곡은 몇 달 만에 다 만들었어요. 뭔가 2집은 좀 깊이 들어가는 작업을 했어요. 음악 하는 사람들이 1집 내는 건 쉬운데, 2집내기 힘들다고 해요. 이게 2집 내는 거는 이 팀으로 뭔가를 해보겠다, 해볼 여건이 된다는 말이거든요? 1집 내고 사라지지 않았구나, 2집을 냈구나 그럼 3집을 낼 수 있겠구나. 이런 느낌이었죠.

 

정진세 : 3집은 언제…?

 

안상욱 : 올해 11월 5일에 3집 발매 기념 콘서트가... 근데 한곡도 아직 안 만들었어요. (일동 웃음)

 

박지하 : 저희는 아직 결혼도 안했고, 둘 밖에 없으니까 사람에 대한 사건은 크게 없는 것 같고요. 작년에 저희는 <워멕스(WOMEX : 월드뮤직엑스포)에 대한 참가를 계기로 해외공연도 많이 가게 되었던 것 같고. 작년에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에 공식 쇼케이스 초청을 받아서 가게 되었는데, <워멕스>는 월드뮤직으로 갔었는데 그것도 감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는 ‘K-POP OUT’이란 타이틀로 갔거든요. K-POP 위주로 쇼케이스를 꾸미는데, ‘숨’ 같은 경우는 대중 펍(pub)에서 하는 쇼케이스인 어떤 프로그램에 선정이 돼서, 한국 팀으로는 처음으로 극장에서 쇼케이스를 했고요. 총괄 대표가 따로 저희 음악에 맞는 극장을 잡아줬어요. 얘네 음악은 그냥 펍에서 하면 안된다면서. 그리고 다른 부스의 쇼케이스를 두 개 더 잡아주고. 거기 계신 한국 분들도,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를 보신 분들도 이런 일은 정말 없었다고 했어요. 거기서 저희는 다른 팀의 오프닝 공연이었어요. 근데 오프닝 공연에서 기립박수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경험들이 인상 깊었던 것 같아요. 한국의 악기로 만든 저희의 음악이 다른 곳에 가서 같이 공감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감사했던 기억이 나네요.

 

 

외국공연, 해외의 경험에 대하여

 

정진세 : 제가 외국에서의 외국공연을 경험한 국악 팀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험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관객의 성숙함, 음악연주자에 대한 존경이랄까…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열광적인 반응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달라진 지점을 이야기하더라고. 이 말이 어떠한 의미인지 조금만 더 설명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세 팀 다 해외 경험이 있으시니까, 이게 작은 울타리 안에 있다가 밖에 나가서 세상이 넓어졌다는 것인지, 만국공용어로서 해외의 대중들을 통해 음악의 힘을 다시 느끼는 건지?

 

박지하 : ‘고래야’도, ‘숨’도 그렇고 단발적인 한국문화 교류차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각자 팀 음악으로 초청을 받아가는 게 늘어가고 있잖아요. 그런 게 좋은 신호인 것 같고, 지금 같은 시대에 음악적 장르의 색깔이 다른 팀들이 활동하고 있는 팀들이 많은데, 여러 팀들이 같이 활동하고 있다는 게 힘이 되고 좋은 것 같고요. 그런 것들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문화교류 차원으로 문화원이 껴서 공연했다면 이젠 이 팀의 음악이 좋아서 부르는 경우도 많이 생겨났고요. 그리고 K-POP이나 대중음악은 많이 접할 수 있잖아요. 나라에서도 K-POP 홍보를 엄청 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도 한국 문화부에서 ‘K-POP OUT’ 타이틀로 했던 거잖아요. 그렇게 브랜드화 시켜서 많이 홍보를 하는데, 그 사이에 어떤 국악적 요소가 들어간 팀들이 있고, 그런 팀들도 KPOP 못지않게 잘 활동하고 있고…. 해외에 나가면 그런 팀들을 더… 자기들이 익히 해온 음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존경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다르고 대단하게 생각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 것 같아요.

 

안상욱 : 한국 사람들이 또… 국악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해서요. 힘들어요. 해외에서는 오히려 그냥 음악으로 바라봐주는데 우리는 국악이라는 덮개를 갖고 있죠.

 

박지하 : 국악이라는 이름이 굉장히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요. 어렵고, 힘들고, 지루하고 그런 이미지가 너무….

 

정진세 : ‘고래야’도 외국공연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사연이 있으셨나요?

 

권보라 : 에딘버러 가셨잖아요?

 

안상욱 : 고생의 에딘버러…. 그거도 의미가 있었죠. 사실 해외공연을 했을 때 느끼는 경험은 다 비슷할 텐데요. 음악이라는 건 좀 더 보편적인 언어잖아요. 좋은 음악이라는 건 어떤 나라, 어떤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다가간다는 걸 느꼈어요. ‘한국에 적합한 음악’이란 것처럼 어느 나라에 적합한 음악이다, 그런 발상은 무의미 하다는 걸 느꼈어요. 에딘버러에선 거의 매일 공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직업음악인으로서의 각성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매일매일 똑같이 출퇴근을 하면서 음악을 하고 사는 게 3주쯤 되니까 괜찮네. 생각보다.

 

정진세 : 다녀오셨던 다른 지역도 이야기해주세요.

 

안상욱 : 아랍 국가를 많이 갔어요. 유럽 관객은 많은 문화를 이미 경험해 본 사람들의 티가 나거든요, 전통 클래식부터 시작해서 현대 미술까지, 이미 맛본 사람들이 많아요. 근데 아랍 국가들은 사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도 있고, 두바이처럼 부자인 나라들도 문화적으로는 풍부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뭐랄까… 굉장히 목말라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화적 콘텐츠에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게 있어요. 술을 안 먹기는 하지만, 음악과 접신에 그런 문화가 있어서, 음악하면서 미친 듯이 빠져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다들 있는 것 같아요. 되게 반응이 좋아요. 또 한류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슈퍼주니어, 엑소…. 한국에서 왔다하면 엄청 좋아해요.

 

권보라 : 생존과 국악팀의 해외 공연이 연결될 수 있을까요?

 

박지하 :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번에 페스티벌에서 뉴질랜드 측에서 뮤지션만을 위한 스케줄을 짠 거예요. 공연만 딱 한번 하고 보내는 게 아니고, 공연 전에 이틀 동안 쉬는 시간이 있었어요. 하루는 바다 보이는데서 바비큐 파티를 해 주고, 둘째날은 마오리부족에 초대를 해서 전통 음식 먹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고, 하루에 딱 하나의 스케줄만 있는 거에요. <워맥스>가 끝나고 뉴질랜드로 넘어갔는데 비슷한 라인업인 사람은 같이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비행기타고 이동하고, 버스타고 이동하고… 뮤지션들과 함께 지낸 거에요. 저도 사실 ‘숨’ 그만둬야하나, 너무 오래했으니까, 이걸 어떻게 계속 할 수 있을까. 음악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했었는데, 같이 다녀보니까 가족이 다 온 뮤지션도 있고, 부부가 경우도 있었고요. 우리나라는 젊었을 때 꼭 성공해서 스타가 되어야 하고 그런 게 있는데, 이들은 나이 많은 뮤지션들도 투어 다니면서 즐겁게 살고 있고…. 물론 우리나라에 오면 그렇게 못 할거라는 생각도 드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뮤지션들을 보니까, 충분히 뭔가 계속 열심히 한다면 즐겁게 하면 이런 것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겠구나…. 사실 우리나라에서 하는 페스티벌만 봐도 여유가 없잖아요. 우리나라와는 이런 게 다르고, 이 사람들은 이만큼의 여유가 있고… 자기네가 투자한다고 생각을 하는구나, 싶은 걸 느꼈어요.

 

정진세 : 저는 분명히 생존이라는 의미를 넓게 보면, 즉, 오늘 하루를 사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를 보고 준비하는 것으로 본다면, 전통예술팀들의 해외 경험들이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뭔가 우리안에서 야만적이었던 면이 문화화 된다던지, 예술가들끼리 여유가 생긴다던지, 저 같아도 외국 나가고 싶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 힘들게 관객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다가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떠나온 자리도 돌아보게 되고요.

 

신창열 : 초창기엔 해외 공연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어요. 제가 학교를 2000년대에 졸업했는데, 졸업하자마자 싱가포르에서 운영하는 유명한 연출자와 교육자, 전 세계 아티스트를 모아서 작품 하나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어요. 원래 원일선배가 섭외되었다가 바쁘셔서 지훈 선배와 제가 투입이 된 거에요. 싱가포르에서 몇 개월 정도 작품을 만들고 나머지 1년을 전 세계 투어를 하는 거였는데, 거의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페스티벌을 다 가는 거죠.

 

정진세 :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이네요.

 

신창열 : 이런 모델을 저는 경험을 한 거 고. 해외 페스티벌에선 음악을 포함한 종합극을 본다던지 등의 다양한 경험을 했고요. 페스티벌을 갔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들을 많이 경험하고 왔죠. 한국의 <팜스PAMS>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웃음) 처음부터 저는 ‘그림'이 해외사업에 맞는 음악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저희가 초창기에 소속사가 생긴 거에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 회사에서 모든 사업들을 진행하는데, 주로 외교부의 해외 외교사절 공연사업들을 진행하게 된 거죠. 음악이나 구성 자체가 외교사업의 수단으로서만 작용이 되고…. 꿈 꿔 온 거나 이상적인 해외공연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렇게 음악이든 사람이든 소진되고, 결국에 돈도 시간도 안 남는…. 그런 사업으로 인식이 됐죠. 거의 몇 개 나라를 묶어서 돌고 돌고 돌고…. 몇 년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까 회사에서도 더 이상 남는 장사가 아니라고 하고, 멤버들도 다 지쳐 버린 거죠. 해외사업에 대한 이후의 계획이나 사업들을 고사를 하고 그래서, 그 이후로는 거의 해외공연 안 나갔어요. 그래서 저희는 해외공연이 생존이라고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별도의 어떤 개런티 예산이 할당 되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부담이 컸었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굳이 많은 것들을 감수하고 해외공연에 투입되어서 갔을 때는 다른 보상심리가 작용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가 제주도인지, 비행기 내리면 차에 태워서 대사관 잠깐 들러서 밥 먹고, 극장 리허설 갔다가, 호텔에 집어넣어놓으면 호텔에서 하루 자고, 공연하고, 이동해야하니까 그 많은 짐들을 가지고 다시 공항으로 가고 그게 전부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경험하셨죠? (웃음) 그래서 저희는 ‘숨’ 같은 팀이 굉장히 부러워요.

 

세컨드잡에 대하여, 추억이 되었던 경험

 

정진세 : 기억에 남는 세컨드잡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권보라 :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 오브리나 행사를 안하시죠?

 

임혜경 : 이야기를 듣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는 그야말로 하기 싫은데, 할 수밖에 없는 세컨드 잡의 경우요. 세 분 다 활동을 길게 가려면 세컨드 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신 것 같아요. 오히려 인간으로서가 오래가는 방법이라고 하면… 세컨드 잡은 하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연극인들이 편의점 알바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음악적 성취와 팀의 유지를 위해서는 전략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두 가지 측면일 것 같아요. 하나는 그야말로 아주 하대하는 오브리가 있을 수 있고, 하나는 전략적으로의 세컨잡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안상욱 : 국악 팀들이 초창기에 많이 하는 건데요. <신나는 예술여행> 많이 하잖아요. 그때 제일 고생스러우면서 모든 공연이 제일 웃겼죠. 어딜 가나 환영을 많이 받았어요. 그게 웃긴 거에요. 아니 우리가 처음에 락 밴드하던 사람들이라 젊은이에게 사랑받는 음악을 해야 하고, 국악을 쓰지만 세련되고 젊은 층의 지지를 받는 그런 게 될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막상 1~2년 동안 했던 게, 할머니 할아버지들 찾아뵈면서 민요 3곡 섞어서 하면서 그런 거였죠. 웃겼어요, 정말. 재미는…. 그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던 것 같아요.

 

정진세 : 초창기에만… 할 수 있는?

 

신창열 : 저는 초창기는 아니었는데, <신나는 예술여행> 사업을 최근에 했어요. 소외지역에 가서 공연을 할 처음에는 걱정을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편견 없이 음악을 듣고, 장애인분들, 노인분들, 학생들 전부 다 굉장히 긍정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였고… 좋았어요. 어느 공연장을 가도 이런 분위기는 없을 거란 걸 느꼈어요. 예를 들면, 작년에 장애인 복지 센터에 가서 하는데 굉장히 진지하고 리듬이 강한 음악이 마지막 곡이었어요. 갑자기 장애인 관객 분들이 한 두 명씩 일어나서 무대 앞으로 오셔서 춤을 추셨어요. 그 분위기를 상상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코메디인데, 처음에 웃어야하나 웃음을 참다가…. 저 사람들은 굉장히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고, 온 공연장이 춤판이 되어 버린 거에요. 장애인 분들이 팔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신 분들이었는데, 너무 신나게 거의 약주 드신 분들처럼 춤을 추고 계셨어요.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듣는 순간이 저희 연주했던 멤버들이 통틀어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공연이었어요. 굉장히 감동적이고 웃기고 어이없고, 엉뚱하고, 누가 있었으면 찍었으면 좋았을텐데…. 뭐라 해야 하나, 우리가 생각했었던 원하는 관객? 이런 게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당신들이 원하는 관객이야 하는 사람 없거든요. 근데 우리는 늘 사실 그만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관객이 늘 요구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와보니까 약간 그런 마음이 만감이 교차되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전체 15년 통틀어서도…. 그 음악은 기존의 ‘그림’ 음반에 있는 음악이 아니에요, 훨씬 더 무겁고 진지한 곡이었어요. 공연 장소도 아주 허름한 거의 다 무너질 것 같은 강당이었는데, 갑자기 접이 의자를 접고 미시더니, 준비한 사람처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진세 : 이야기 해주신 걸 들어보니까 ‘기억에 남는’ 이라는 의미가 예기치 못한 관객을 만났던 순간, 혹은 초청받은 분들이 변하거나 한 체험 같은 것일 것 같아요. ‘숨’도 있으신가요? 어쩌면 멤버도 딱 두분이니까 많이 의뢰가 들어오지 않나요?

 

박지하 :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어요. 음악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국제회의 이런 거 많이 들어오고요. (웃음) 최근에는 화장품 브랜드 ‘숨’ 있잖아요. 이름을 짓고 나서 그 브랜드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요, 언젠가 뭔가 주변에서도 그 화장품 브랜드와 뭐하면 좋겠다고 이런 이야기를 가까운 지인들이 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연락이 와서, 해외 런칭에 저희가 음악을 하기로 했어요. (웃음) 사실 저희도 그 쪽에서 대쉬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안상욱 : 저희는 고래야잖아요. 그래서 과자 고래밥을 기다렸었는데, 연락이 없어요. 고래축제도 연락이 없어요. 언젠가는 올 줄 알았거든요? (다같이 웃음)

 

정진세 :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